생활의 기술+참선곡, 행불어록

경허스님 참선곡 15

혜주 慧柱 2009. 8. 11. 22:20

◈살아생전의 삶에 따라 죽음이 축복도, 재앙도 될 수 있다.◈

 

예전사람   참선할제   마디그늘   아꼈거늘   나는어이

방일하며   예전사람   참선할제   잠오는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어이   방일하며   예전사람

참선할제   하루해가   가게되면   다리뻗고   울었거늘

나는어이   방일한고

 

참선 잘한 도인들은 좌탈 입망, 앉아죽고 서서죽고 앓지도 않고 선탈한다. 이 선탈이라고 하는 것은 매미 선(蟬)자에 벗을 탈(脫)자입니다. 매미가 껍질 벗듯이 한다. 그냥 쉽게 가신다. 이겁니다.

등운봉 선사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죠. 등운봉 선사는 죽을 무렵에 제자들한테 물어보았습니다.

“앉아서 죽은 사람 있느냐?”

“있습니다. 그리고 많습니다.”

“그렇다면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있습니다.”

“그래, 그럼 물구나무서서 죽은 사람 있느냐?”

“그건 없는 가 봅니다.”“좋다! 그럼 나는 물구나무서서 가겠다.”

그래서 정말 장난처럼 실제로 물구나무서서 가 버렸어요. 그런데 거기까진 좋은데 장사를 치러야 하는데 시신이 움직여야 되는데 시신이 물구나무 선채로 꼼짝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비구니스님이신, 누이동생이 와서는

“아이구, 오라버니는 살아 있을 때도 괴각질을 많이 해서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더니 죽어서도 사람을 이렇게 피곤하게 하는군요!” 그러고선 손가락으로 쓰윽 미니깐 그때서야 뚝 떨어졌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정말 참선 잘한 도인은 앉아죽고 서서죽고, 물구나무서서 죽을 수 있는 그런 경계가 열린다고 하는 것이죠. 왜냐? 몸뚱이라고 하는 것은 자동차처럼 그냥 하나의 우리가 몰고 다니는 그런 도구였기 때문에 자동차 안에 있는 운전사하고 자동차하곤 다른 것이죠. 다만 자동차를 바꿔 탈 뿐이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죽으면 ‘옷 갈아입는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옷 갈아입는다.’

사실 죽음에 대해서 재앙이라고 생각하는데, 죽음 그 자체로써는 축복도 아니고 재앙도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생전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축복도 될 수 있고 재앙도 될 수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마음공부를 잘 했거나 보시복덕을 잘 지은 사람, 이런 사람에겐 죽음은 축복입니다. 왜냐? 훨씬 더 좋은 옷을 갈아입기 때문에 천상으로 가거나 그 이상으로 갑니다. 그러나 살아생전에 마음공부도 게을리 하고 보시복덕 조차 짓지 않은 사람 이런 사람에겐 죽음은 재앙입니다. 왜냐? 훨씬 더 나쁜 옷으로 갈아입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막연하게 두려움내지는 재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역시 그릇된 생각입니다.

“죽음은 그 자체로써는 재앙도 아니고 축복도 아니다. 그 사람이 살아생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재앙도 될 수 있고 축복도 될 수 있다.”

이게 바로 올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이죠.

 

 

◈생사일대사 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다리 뻗고 푹 자는가?◈

 

‘예전사람 참선할제 마디그늘 아꼈거늘 나는어이 방일하며’

‘마디그늘’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을 뜻하는 것이죠. 해가 떠서 서산으로 서서히 이동하면서 그늘이 조금씩 변화하는 것, 그것을 마디그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공부하신 분들의 일화를 보면 눈물겹죠.

불보살님, 조사스님들께서 엄청난 노력을 하셔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셨다고,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 후손들이 편안하게 받아먹고 쓰고 있는 것이죠. 근데 받아먹고 쓰기만 하면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주변에 법륜을 굴려서 전달하고 그래서 자기할 바를 해야 되는 것이죠. 지금도 불보살님들은 화현하시어 엄청나게 뛰고 계십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저런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많이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이 살아있는 것은 스님들께서 열심히 수행을 하고 또 불자님들도 열심히 공부한 덕도 있겠지만, 사실은 불보살님들의 노력에 비하면 미미한 겁니다. 불보살님들이 보신불, 화신불 막 몸을 나투어서 계속 애를 쓰고 계셔서 그나마 이정도 유지가 되는 것인데 그 만큼 우리도 열심히 노력해야 되는 거죠.

쉽게 받아먹기만 하면 그것은 거짓노릇, 종노릇하는 비결입니다. 맨 날 받아먹고 맨 날 구걸하고 이게 바로 거지요. 종이죠. 주인 노릇하는 연습을 해야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우리도 모두 주인공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죠.

 

예전사람 참선할제 잠오는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어이방일하며

실제로 참선할 때 너무 졸음이 오니깐 턱 밑에다가 송곳을 따악 받쳐놨다고 그래요. 꾸벅하고 졸면 송곳이 턱에“꽉”찔리면 잠이 팍 깨어나는 거예요. 그 정도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참선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졸리거나 망상을 떨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한 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 거의 한 50분은 망상 떨다가 한 망상 떨다 지치니깐 이젠 깜박 졸다가 그러다 깨는 거예요. 화두 드는 시간은 5분도 안돼요. 계속 망상을 떨다가 지쳐서 언제 깜박 졸다가 깨어나고 또 망상 떨다가 깜박 졸다가...(하하)

저도 선방에 살 때 그런 경험들을 많이 했죠. 특히 해인사 선방 살 때 거기는 꼭 하안거 동안거 철마다 용맹정진을 합니다. 일주일동안 날을 잡아서 잠을 안자고 계속 앉아있는 거예요. 틈날 때마다 하루에 물론 밥을 먹죠.

근데 만 칠일동안 용맹정진 하는데 처음엔 이 삼일정도는 평상시에 잘 하던 심야시간 이때가 되면 졸음이 와요. 안 오면 비정상이죠. 억지로 참아가면서 막 화두를 참구하려고 노력을 하고 그러다 보면 허리가 살살 구부러지면서 졸음이 옵니다. 그러면 죽비 치는 분이 돌아다니며 “따닥 따닥” 쳐 주고 자꾸 허리를 곧 추 세우려고 노력을 하죠. 그러다 한 삼일 째 지나가면 서서히 인제 망상도 덜해지고 졸음도 줄어들고 이러한 경지가 옵니다. 그러면서 몸이나 마음이 개운해지죠. 몸이 있는지 없는지 느껴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심탈락’에 있는 거죠. 몸도 탈락, 마음도 탈락 떨어져 나갔다 이 소리죠. 시험 봐서 탈락하는 것은 안 좋은 거겠지만 참선하면서 몸과 마음이 탈락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겁니다.

그런 경지가 와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심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이제 무심의 경지가 와야 되는데 무심이라는 것이 바로 처음에는 몸을 탈락하고 그 다음에는 마음 분별심이 탈락되는 그런 경지가 오게 되면 그거야 말로 정말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죠.

그러기 전까지는 즐거움을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용맹정진을 하기 전에는 “하루 밤만 철야정진을 해도 힘든데 어떻게 일주일씩이나 용맹정진 할 수 있을까?”이런 생각도 했는데 사람의 몸이 적응을 하다 보면 적응되는 그런 아주 묘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예전에 스님들 예전에 수행자들도 다 이런 과정을 지나갔구나!”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죠.

또 어떤 스님은 매일 해질 때가 되면 다리를 뻗고 “아이구 아이구”하고 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왜냐? “오늘도 내가 성품을 밝히지 못하고 하루해가 지나갔구나!”이렇게 애달파하면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통곡을 하셨다고 하는 거죠. 우리가 이 기약할 수 없는 게 인생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세계적으로 여기저기에서 각종 사건사고 총기난사 사고니, 교통사고니, 심지어는 비행기가 떨어지는 일 이런 일이 많이 있죠. 그게 사실은 언제 나한테 그런 내 주변에 닥칠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생사일대사야 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고 이 삶과 죽음의 큰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비로소 다리를 뻗고 푹 잘 수가 있다고 하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