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스님 참선곡 17
◈선인가? 악인가?◈
우습도다 나의지혜 누 구 를 한탄할꼬 지각없는
저나비가 불 빛 을 탐하여서 제죽을줄 모르도다
내마음을 못닦으면 여간계행 소분복덕 도 무 지
허사로세
우습도다 나의지혜 누구를 한탄할꼬
지혜와 지식을 구분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선생님께 보고 듣고 배운 것은 지식이죠. 진정한 어떤 삶의 지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진정한 지혜라는 것은 바로 생사일대사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생계에는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생사일대사에는 도움이 전혀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염라대왕은 박사학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재벌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관대작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염라대왕 앞에 가서 “내가 재벌 총수였다.” 또는 “내가 장관이었다.” 이런 말을 아무리 해 봐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참다운 지혜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분별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나’로, 그것을 ‘참나’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무엇이 큰 힘이 되겠느냐? 예를 들어 선악에 대해서는 우리가 많은 판단을 하죠.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많이 받습니다. 선하게 살아야 한다. 악하게 살면 안 된다. 그러면 과연 진정으로 착하게 선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미국에 9.11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사람은 과연 선인일까요? 악인일까요? 얼마 전에 미국 언론에서는 한결같이‘악마의 화신’이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엄청난 살생을 일으킨 증오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죠. 하지만 성전을 주장하는 이슬람권에서는 그를 ‘악마의 화신’이라고 생각을 안 합니다. 오히려 최고의 영웅으로 신봉을 한다는 것이죠.
하얼삔 이토오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사는 선인일까요? 악인일까요? 당시 일본 측 입장에서 보자면 안중근은 살인범이고 무장테러범입니다. 그래서 사형을 선고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거죠. 하지만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그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위대한 의사이자 열사였던 것 입니다. 왜 이렇게 동일한 사람의 동일한 행위에 대해서 서로의 판단이 엇갈릴까요? 그것은 각자 저마다의 입장에서 분간하고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100명의 사람이 “저놈은 나쁜 놈이다.”하고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내가 그 사람한테 큰 신세를 진적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의 은인인 것입니다. 그것과는 반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덕을 칭송하고 추앙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내가 그로 인해서 큰 손해를 입은 적이 있다면 나에겐 원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흔히 우리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내’입장, ‘나’에 달려 있는 것이죠. 그래서 나에게 이익이 되면 선인이고, 나에게 해악을 끼쳤으면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따름인 것입니다. 거기에 따라서 증오하거나 애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죠. 애착하는 이는 좀 더 가까이 하려하고 증오하는 이는 멀리하려 하지만 뜻대로만 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고통과 애정이 거기서 생겨나서 진리를 보는 눈이 닫히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은 둘이 아니다.’ 이런 입장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죠.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도 항상 그런 가르침을 폈습니다. “선이니, 악이니, 나니, 남이니 자꾸 이런 얘기하지마라.” 이순신장군이 임진왜란 때 학익진전법으로 수많은 일본 배를 기만전술로 속여서 승리로 이끌었는데 이게 선이냐? 악이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악이라 합니다. 사람을 속이는 것도 역시 악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순신장군의 임진왜란 때를 갑자기 물어보니깐 그것은 선이다. 그래도 악은 악이다. 이렇게 갈라지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을 속이고 죽였는데 그게 어째서 선이냐! 우리나라를 방어하기 위한 거니까 선이지. 이렇게 갈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선이니, 악이니 이런 거 해 봐야 답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저 마다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조혜능스님의 첫 법문이 그겁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 그럴 때 그대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이게 바로 참선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분별심을 쉬어야 된다. 나다, 남이다, 옳다, 그르다, 같다, 틀리다, 부처다, 중생이다, 진리다, 세간이다 이렇게 따지는 마음 이것을 분별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절대 본래면목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거죠. 진리의 입장은 항상 둘이 아니다.
우리가 불가에서 인사할 때 합장인사를 합니다. 왼손과 오른손을 붙여서 인사를 합니다. 그 인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금도 인도에 가면 밥 먹을 때 쓰는 손과 화장실가서 볼 일 보고나서 그곳을 닦는데 쓰는 손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손으로 밥을 먹고 직접 물을 가지고 손으로써 용변보고 난 다음에 뒤처리를 하기 때문에 지금도 시골에 화장실 같은데 가면 휴지가 없어요. 두루마리 화장지 이런 게 없고 수돗물이 나오는 곳과 물통하나 딸랑 있습니다. 그것은 볼일 보고나서 물통에 물을 담아서 손으로써 세척하라는 것이죠. 그러고 밥 먹을 때도 보면 수저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써 뭉쳐서 먹는 그런 습관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깐 오른손은 밥 먹는 손, 왼손은 볼일보고 뒤처리하는 손 이렇게 정해져 있는 거예요. 한 손으로 가지고 밥도 먹고 볼일도 보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르자면 오른손은 깨끗한 청정한 손, 왼손은 조금 더러운 손 이런 식으로 해서 이 합장의 의미는 더러움과 청정함이 둘이 아니다. 이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대와 내가 둘이 아니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다. 이런 무분별심을 연습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진리로 향하는 지름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육조스님의 바로 ‘불사선 불사악(不思善不思惡)’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그럴 때 그대의 본래면목이 무엇이냐?”하는 이런 마음이 바로 우리의 ‘본마음’, ‘ 참나’자리를 일러주는 거죠. 본마음 자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결국은 뿌리가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분별심을 쉬는 쪽으로 자꾸 공부해 나가는 것 이것이 지혜를 발굴하는 방법이지, 자꾸 분별을 키우고, 너 와 나를 가르고, 선과 악을 가르고, 너는 나쁜 놈 나는 좋은 사람, 이런 식으로 가르는 것은 진리에 있어서는 지름길은 못 되고 오히려 돌아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 천적은 무엇일까?◈
지각없는 저나비가 불빛을 탐하여서 저죽을줄 모르도다.
불나방 같은 경우에는 불을 보면 자기가 죽을 줄 모르고 막 달려들죠.
제가 사는 지리산도 여름에 전등불 같은 것 켜놓거나, 때론 모닥불 같은 것 키게 되면 사방에서 나방 나비 할 것 없이 많이들 모여들어 뜨거운 불속으로 막 뛰어듭니다. 자기가 그 안에 들어가면 죽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냥 막 뛰어 들어가는 거죠. 당장 불빛만 보고도 그것과 우리의 삶과 큰 차이가 없다. 이렇게 보는 거죠.
국사암 사천왕수 밑에 수많은 왕개미들을 두꺼비들이 두 마리가 앉아서 “쏠랑쏠랑”다 잡아먹고 자기 동료들이 반 이상이 없어 졌는데도 먹이에만 정신없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 두꺼비는 또 뱀한테 잡혀 먹습니다. 저도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국사암 앞마당 뜰에서 뱀이 두꺼비를 반쯤 삼긴 것 제가 봤어요. 얼굴 있는 부분부터 삼키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두꺼비가 일단 뱀한테 얼굴을 물리니깐 숨이 막혀서 죽는 거예요. 사지를 쫙 뻗고 숨이 막혀서 죽으면 그걸 갖다가 야금야금 점점 삼키더라고요. 그 뱀이 입이 그렇게 큰 것 같지 않는데도 그 뼈하고 그걸 살살 녹여 같고 삼기는 것 같더라고요. 두꺼비 두툼한데도 그게 다 들어갑니다. 그래 왕 개미는 두꺼비가 잡아먹고 두꺼비는 뱀이 잡아먹고 그 뱀을 또 누가 잡느냐? 하면 뱀이 아무리 잘났다 해도 사람한테는 꼼짝 못하죠. 저도 본래 서울출생이라서 처음에는 국사암 사는데 뱀만 보면 도망가기 바빴어요. 지리산에는 뱀이 많습니다. 도망가기 바빴는데 그러다 보니깐 안 되겠더라고요. 도량을 뱀으로 장엄할 순 없잖아요. 신도들도 뱀보고 기겁을 하고 다음부터 안 옵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이걸 잡아서 저기 사람 없는 그런 곳으로 치워나야겠다. 그래서 쇠로 된 집게가 있습니다. 길쭉한 50cm정도 길이 되는 집게를 사다가 집게로 목덜미를 “탁” 잡아가지고 포대자루 같은데 잡아넣습니다. 그걸 묶어서 한참 떨어진데 가서 사람 없는 그런데다 풀어줍니다.
그렇게 계속만나는 데로 잡아서 풀어주니깐 인제 안 보이더라고요. 근데 뱀을 보면 구렁이나 독이 없는 뱀들은 등치가 커요. 그래서 막 집게로 꽉 잡았다가도 한번 휘청하고 치면 놓치고 그러는데 독사는 덩치는 작은데 독이 있어서 이놈이 머리를 빳빳하게 세웁니다. 독사를 잡기가 더 쉬어요. 그 집게가 있으면 머리를 빳빳하게 세우니깐 목덜미를 잡기 더 좋죠. “탁” 잡아버리면 힘도 못 씁니다. 힘이 없어요. 뱀은 사람이 천적입니다. 그러면 나에 천적은 무엇일까요? 이게 바로 오늘의문제가 되겠습니다. 왕개미 천적은 두꺼비, 두꺼비의 천적은 뱀, 뱀의 천적은 사람, 사람의 천적은 무엇일까요? 진정 나의 천적은 무엇일까요? 나를 잡아먹는 놈은 무엇일까?
인간의 천적은 인간자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 자신의 탐,진,치 삼독심 이거야말로 나를 갈아먹는 최고의 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모르고 적을 밖에서만 찾다보면 참다운 영웅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마음공부를 어떻게 할 것이냐?◈
대웅전은 ‘큰 영웅을 모신 전각’이란 의미죠. 큰 영웅하면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칭기즈 칸 등 영웅전에서나 나올 법한 이런 영웅들을 모셔야 되는데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모셔 놨을까 하는 생각을 하여 봤는지요? 나폴레옹, 알렉산더, 칭기즈 칸 같은 영웅들은 남을 정복한 영웅이지 자신을 정복한 영웅은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영웅은 자신을 정복한 영웅, 즉 탐, 진, 치를 쉰 영웅, 이런 영웅이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대웅전에 바로 불보살님을 모셔 논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결국은 탐, 진, 치 삼독을 쉬게 하는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이고, 자기의 마음속의 탐, 진, 치 삼독을 못 닦으면 여간한 계행이나 조그마한 복덕을 지었다 하더라도 모두 허사다. 계행을 웬만큼 지키고 복덕 조금 짓는다고 해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긴 힘든 일이다.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조금 윗자리로 업그레이드 될 수는 있겠지만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진정으로 벗어나 원생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공부를 제대로 해야 된다. 이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럼 마음공부를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것에 대해서 참선곡의 앞부분에 마음 닦는 방법과 참선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풀어놨죠. 마음공부에도 삼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일심공부, 두 번째 무심공부, 세 번째 발심공부. 이래서 일심공부는 마음을 한 마음으로 모아가는 공부이고, 무심공부는 그 한 마음조차도 놓아버린 정말 그대로 ‘무아’, ‘무심’을 체험하는 단계, 그 다음 발심공부는 무심한 가운데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 무심한 가운데서 또 중생제도의 염을 일으키는 겁니다. 일부러 일으켜서 원생을 사는 것이 바로 발심공부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기도는 일심공부요, 참선은 무심공부요, 행불은 발심공부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수가 있겠습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슨 꼭 복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기도 이것은 자기마음을 한 마음으로 모으는 것 입니다. 관세음보살과 내가 하나 되는 겁니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이와 듣는 이가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무심은 하나조차도 있으면 일단 하나로 인해서 둘이 생기고 둘로 인해서 넷이 생기기 때문에 하나조차도 사라진 상태. 몸이 완벽한 무아상태 이것이 바로 참선공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처의 행을 수행하는 보살행을 실현하는 단계 그것이 바로 행불에서 이것은 발심공부다. 중생제도의 발원을 세워서 실천해 나아가는 단계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