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신심명, 그리고 일기일회

13), 접속하지 말고 접촉하라

혜주 慧柱 2010. 5. 15. 11:55

접속하지 말고 접촉하라

2007년 4월 15일 봄 정기법회

 

나무마다 꽃과 새잎을 펼쳐 내는 봄날, 우리가 한자리에 모여 이렇게 말하고 듣는다는 것은 이 시대에 흔한 일이 아닙니다.

생의 한순간에 우리는 이와 같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만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모처럼 일요일에 가족들과 쉬거나 다른 바쁜 일도 있을 텐데 큰맘 먹고 나오시고,

저도 새벽에 일어나서 캄캄한 산을 내려오는 까닭은 우리 만남이 그만큼 소중해서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말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서 말을 해야 하고, 듣는 쪽에서도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야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만남을 통해 우리들의 정신세계가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 간에도 서로의 말에 진심으로 몰입하지 않습니다.

건성으로, 귓전으로 듣고 맙니다. 자연히 관계가 성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가 영혼의 메아리를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가 20세기와 크게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정보 매체입니다. 어디를 가도 인터넷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무엇엔가 또는 누군가와 접속하지 않으면 사람 축에 못 드는 세태입니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두 사람끼리 혹은 불특정 다수인을 상대로 각자의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수많은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감정을 교환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정보를 주고받기 위한 간접적인 접속이지 직접적인 접촉은 아닙니다.

 

접속과 접촉은 발음은 비슷하지만 뜻이 전혀 다릅니다. 접속은 간접적이고 일방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정이 오고 갈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비인간적입니다. 가끔 외국에 있는 분들로부터 인터넷을 통해 저의 소식을 접한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약간의 씁쓸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접촉은 상호 간의 직접적인 만남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접속이 아닌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고, 눈길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듣고, 분위기를 함께 누립니다.

때로는 손을 마주 잡거나 미소를 짓거나 쓰다듬는 일을 통해 인간의 정이 오갑니다. 접촉은 이렇듯 인간적입니다.

 

컴퓨터의 사각 스크린은 이 시대의 편리한 정보교환 수단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차디찬 기계장치이지, 살아 숨쉬는 따뜻한 생명체가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휴대전화와 컴퓨터, 텔레비전이 사라진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큰 재난이 일어납니다. 살맛을 잃고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휴대전화에 매달려 사는 젊은 사람들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휴대전화와 컴퓨터, 텔레비전이 나오기 전에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행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지능적인 사기꾼들도 덜 극성스러웠습니다.

신속하고 편리한 정보 매체를 곁에 주고 사는 이 시대의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전보다 행복할 수 없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편리한 정보 수단을 가졌음에도 왜 전보다 행복할 수 없는가?

 

데이터 스모그란 말이 있듯이 과도한 정보는 공해입니다. 정보가 인간영혼의 자리를 빼앗기 때문입니다.

접속에 중독된 사람들은 인터넷 연결이 안 되거나 해커들에게 방해를 받을 때면 마치 세상에 종말이라도 온 양 야단을 떨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은 인간의 미덕입니다. 그러나 신속하고 편리한 기계장치에 의존해 살다 보니 무엇이든 즉석에서 해답을 꺼내려고 합니다.

젊은이들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도 한때의 고비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영혼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습니다. 자신이 인간임을 망각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가치판단을 해야만 합니다.

생활의 도구인 정보 매체와 자기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를.

정보 매체 앞에서 쩔쩔매며 참고 기다릴 줄 모르고 무슨 일이든 즉석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영혼을 지닌 인간의 방식이 아닙니다.

생활의 도구에 종속되어 본질적인 삶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실상입니다.

 

사람답게 살려면 안으로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바깥의 현상에 팔리지 말고 고요히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거듭거듭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들과 살뜰한 우정을 지속하려면 한동안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홀로 자신을 확인하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정다운 사이라 할지라도 늘 한데 엉켜 지내면 이내 시들하고 지겨워집니다.

제가 날마다 이 자리에 와서 떠든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누가 여기 나오겠습니까?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기 때문에 보러 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립고 아쉬운 삶의 여백이 필요합니다. 무엇이든 가득 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포만 상태는 곧 죽음입니다.

그리움이 고인 다음에 친구를 만나야 우정이 더욱 의미 있어집니다. 인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아는 것은 우리 영혼에 공해와 같은 것임을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문명의 연장을 알맞게 활용할 줄 알면 이롭습니다. 우리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 놓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매달리거나 그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문명의 이기가 흉기로 변합니다.

욕구를 적당히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그런 자제력이 모자랍니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미개한 나라에서 왕과 왕비가 엉터리 관상가의 말을 듣고 얼굴에 성형수술을 합니다.

하는 일이 잘 풀리고 남의 입방아에 덜 오를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무모한 수술을 감행한 것입니다.

왕과 왕비가 성형수술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라 안 백성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성형외과를 찾아갑니다.

멀쩡한 얼굴을 째고 꿰매느라 비싼 돈을 들입니다.

 

얼굴이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업의 모습이고, 인생의 이력서입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아름다움에 표준형이 있습니까?

저마다 자기 얼굴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덕스럽게 살면 덕스러운 얼굴이 되고, 선한 행동을 하면 그것이 축척되어 아름다움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의식에 필름처럼 찍힙니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과거의 일들이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경험한 일들은 의식의 필름에 각인되어 잠재의식을 이룹니다.

잠재의식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 지금까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한 것이 현실로 재현됩니다. 이것이 업의 파장, 카르마의 파장입니다.

 

불교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식론唯識論에서 이것을 매우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유식론에서는 인간의 마음 구조를 크게 전5식, 제6식, 제7식, 제8식의 네 가지로 나눕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는 것, 즉 감수感受작용을 전5식이라고 합니다.

 

제6식은 요별식了別識으로, 의식하는 것, 즉 분별 작용입니다. 가령 교차로에서 빨간 신호등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으로는 보고 있는데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에 눈이 분별 작용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7식은 말라식末那識으로, 자기애라고 할 수 있는 잠재적인 자아의식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이것을 에고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카드빚에 시달리거나 감당할 수 없는 복잡한 일 때문에 자살을 하려고 낭떠러지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큰 바위가 굴러오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피합니다.

죽으로 간 사람이 돌에 맞아 죽든 물에 떨어져 죽든 왜 피합니까? 이처럼 제7식은 자기를 지키는 본능입니다.

 

제8식은 종자식種子識으로, 다음 행동의 원인이 되는 씨앗입니다.

인간 생활의 근원인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일단 저장되어 의식의 필름에 찍힙니다.

이것이 종자식입니다. 앞으로의 지각에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어떤 상황에 이르면 현실적으로 싹이 돋고 움이 터서 활짝 열립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업이 됩니다.

이것을 되풀이하면 마치 안개 속에서 옷이 젖듯, 향기 속에서 냄새가 배듯 훈습이 됩니다. 훈습이 되면 업장이 두터워집니다.

업장이 두터워져서 자기 의지로 할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물질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자주적인 삶을 이루려면 철저한 자기 관리가 필요합니다.

가치판단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내가 이 일을 해서 행복할 것인가, 불행할 것인가? 그것이 답입니다. 순간에 속지 마십시오.

순간순간을 살되 거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풍진세상을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불필요한 말들을 쏟아 내며 삽니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노후를 걱정하고 온갖 근심 걱정을 미리 가불해서 쓰느라 밤잠을 못 이룹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왜소하고 무기력해져서 인간으로서의 기상을 지니지 못하게 됩니다.

내 삶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 표류하는 실정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본질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찮은 생각을 제쳐 두고 삶의 본질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찬란한 봄날, 다들 꽃처럼 활짝 열리십시오, 끝으로 이 자리에서 만난 인연으로 독서 숙제를 하나 내드리겠습니다.

읽고 나면 왜 이 법회에서 소개하는지 제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오늘 법회를 준비하는 일보다 이 책을 읽는 데 더 열중했습니다. 제목은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입니다.

철학자의 글이라고 해서 어렵지 않습니다. 저자는 아프리카 알제리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대장간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가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이 우연히 그를 보고 입양을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교육받게 됩니다. 이름도 프랑스식으로 피에르 라비라고 짓습니다.

이 책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일깨워 줍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우리나라에 필요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며 ‘아, 우리 곁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 나라가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는 조화로운 삶이라는 출판사에서 펴냈습니다. 숙제를 통해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