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의 대화

필요 없는 것 과감히 놓아버리는 게 수행

혜주 慧柱 2012. 6. 3. 07:17

필요 없는 것 과감히 놓아버리는 게 수행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진정한 본성은 소멸과 덧없음을 넘어서 있다. 몸은 영속하지 않지만 진정한 본성은 나고 죽음이 없다. 생멸이 없고 신성하며 모든 불안전함을 넘어선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모두 동등하고 모두 하나이다. 어떤 특성을 갖고 있든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래 아름다우며 인간은 모두 아름답다.

 

“화를 내거나 실망하는 그자가 누구인가?” 화가 나거나 실망할 때 이렇게만 물어보라.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항상 이 단순한 물음을 적용하면 된다.

 

이 물음으로써 내적인 평정심이 어렵지 않게 드러날 수 있고 모든 문제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기에 생기는 것이다. ‘자신’이라는 생각,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마음속 투쟁이 벌어진다. 인간의 의식 속에서 지독한 번뇌를 만들어 내는 주범이 바로 그 생각들이다.

 

“우리는 마치 자유롭게 흐르는 강물에 몸 담그고 있으면서도 지독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과 같습니다. 빈 컵을 들고 누군가와 마주칠 때마다 제발 물 좀 달라고 애원합니다. 강물 속에 서 있는 사람이 강물을 마시면 안 되는 이유라고 있습니까? 굳이 이유를 대자면 그 사람이 잘못된 방향으로 눈길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시선을 낮추십시오. 그 즉시 자신이 강물 속에 서 있고 마실 물이 주의에 한없이 넘실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의 길은 정말 단순합니다. 필요 없는 것을 놓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아남 툽텐 린포체는 명상을 ‘쉬고 긴장을 푸는 기술’이라고 정의한다. 완벽한 쉼이란 온갖 정신적 노력을 놓아 버리는 일을 포함한다. 쉬는 것은 자아를 놓는 참선 명상의 첫걸음이고, 쉰다 함은 어떤 것도 붙들려 애쓰지 않는 깊은 이완 상태를 말한다.

 

항상 무엇인가를 하려하고 끝없이 발버둥 치면서 현실을 통제하려 하는 ‘마음’을 어떻게 하면 완전히 평화롭고 긴장 없는 상태에 머물게 할 것인가. 여기서도 또 실패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의 참본성과 하나 된 상태를 상실하는 것이 실패다. 그 이상의 실패란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미 실패한 상태였는데 또 실패한들 무슨 상관인가?

 

하루의 생활을 따라가며 남을 바라보듯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지켜보면, 지금 여기에 충만히 머물기보다는 과거나 미래에 붙잡히기 일쑤인 것이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저 앉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다.

 

세속 일에서 하듯이 탐색하고 애를 쓰는 수행은 자아의 또 다른 각본이며 망상을 지탱하고 부추기는 것이 될 뿐이다.

 

명상 수행의 유일한 목적은 지금 이 자리에서 깨어나 완전한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명상은 기적처럼 우리를 그쪽으로 이끄는 직통 문이다. ‘알아차림’ 상태를 유지하는 것. 매 순간 개념을 제거하고 한계 짓는 개념이 떠오르면 바로 초월하는 것이다.

 

만족이란 ‘나는 이걸 원해.’ ‘나는 저걸 원해.’ 하는 지속적이고 끈질긴 욕망이 완전히 멈춘 마음 상태이고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것을 모두 가진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텅 비운 상태이다. 소유하고 쌓아 놓을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리면 만들고 싶어 했던 공간이 이미 거기에 있음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내면의 만족도 이미 거기에 있으며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이렇듯 깨달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언제나 괴로움을 겪는다. 현실에 맞서 싸우면 꿈꿔 온 것이 성취되리라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대로 된 것만 찾아내면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집요하게 희망을 품는다. 그런 헛된 꿈을 좇고 있다면 매 순간 충실히 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 준비만 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어느 날 실현하고 싶은 이상적인 삶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완전히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끝없이 찾기만 하는 삶은 순간순간이 낭비이다.

 

그때 우리 삶은 준비로 채워지고 이는 마음이 깨어나지 못하면 죽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내일은 고사하고 바로 다음 순간에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 쉬는 이 숨이 마지막 숨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이 충만하게 살아야 한다. 찾아 헤매고 있는 모든 것을 이미 얻은 듯이 살아야 한다.

 

인간이 갈등과 장애를 겪고 있다고 생각할 때 대부분 그것이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는 찾아낼 수 없다. 그것들이 의식 속에서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상상 속의 온갖 문제를 만들어 내는 공장과 같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받아들이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인간은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받아들임이 없는 상태가 갈등이다. 갈등은 고통이다. 이 고통에 시달리는 한, 다른 것에 마음을 돌릴 여력이 없다. 내적 깨달음이 일어날 수 없다. 깨달음이란 한없는 사랑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하는지 탐구하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깨어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매우 놀라운 사실이고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이라고 아남 툽텐 린포체는 말한다.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도 자신뿐이다. 그 책임을 받아들일 때 마침내 정신적 성숙에 도달하게 된다.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신적 성숙이 필요하며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수행의 길을 갈 준비가 된 것이다.

불교신문 김주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