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의 대화

윤회, 그리고 업에 대하여

혜주 慧柱 2013. 9. 20. 08:41

 

윤회, 그리고 업에 대하여

 

 

 

 

적어놓고 보니 제목 한번 거창하다.

내가 무슨 불교학자도 아니고, 윤회니, 업이니 한다는 자체가 참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시장 한 귀퉁이 노점에서 상추 파는 할머니에게도 나름대로의 인생철학이 있듯이 내게도 나름대로의 윤회관이나 업에 대한 생각은 있다.

 

업이란 쉽게 말해 전생이나 현생에서 내가 지은 좋은 것(善)이나 나쁜 것(惡) 혹은 그 둘 다 아닌 무기無記를 일컫는다.

윤회란, 그 업에 의해 사생육도四生六道 즉 태란습화胎卵濕化, 태로 태어나는 것, 알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 화생으로 태어나는 것육도천상, 아수라, 인간, 아귀, 축생, 지옥로 끊임없이 바퀴처럼 돌며 몸을 받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은 중생을 위해서 몸을 받는 ‘원력수생願力受生’이지만, 우리네 중생이야 자기 지은 업에 따라 몸을 받는 ‘업력수생業力受生’이다. 그만큼 이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스님들이 그렇게 고행을 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끊임없이 나고 죽고 하는 이 윤회의 사슬을 벗고 해탈하여 대자유의 몸이 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상구보리上求普提요,

그 깨달음으로 중생들을 널리 교화하여 모든 중생들조차도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인도하는 것이 하화중생下化衆生이니 이것이 바로 불교 존재의 근본 목적인 것이다.

나는 사실 중학교 시절부터 ‘운명론자’였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과거의 업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

마치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것과 같이 우리네 삶도 스스로 알 수는 없지만 영화처럼 미리 제작되어 있어 자신의 의지대로 고칠 수가 없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출가 전까지 이어졌는데 부처님 법을 만나고부터 그 생각이 바뀌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의지론자’가 된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의 업에 의해 태어난 것이 숙명이라면, 그 출발점이 바로 운명이란 영화를 제작하는 ‘Ready go’라는 현실이다.

 

내가 우리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숙명이라면, 출가해서 열심히 정진해 도를 이루는 것은 내 의지대로 모든 것을 선택해서 이루어나가는, 내 업의 소산인 운명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과거 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미래의 업은 현재의 내가 끊임없이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다.

업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여 의지가 약해진 사람은 결국 업에 끌려가는 삶을 사는 것이 운명이고, 반대로 의지의 힘이 강한 사람은 업의 끌어당김이 약해져 결국 그의 의지에 의해 업의 열매(果)도 바뀌게 된다.

그러므로 업과 운명은 의지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내 나름대로의 운명이란, 즉 업이라는 인과 의지라는 연緣(환경)이 만나는 점들로 이어지는 연속성인 과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아주 능동적인 과정인 것이다.

 

업에 의한 윤회가 얼마나 처절한 슬픔인지를 나타내는 시가 방금 생각났다. 이생진 님의 시집⟪그리운 바다 성산포⟫에 나오는 시,⟨사람이 꽃이 되고⟩다.

 

 

 

꽃이 사람이 된다면

바다는 서슴지 않고

물을 버리겠지.

물고기가 숲에 살고

산토끼가 물에 살고 싶다면

가죽을 훌훌 벗고

물에 뛰어들겠지.

그런데 태어난 대로

태어난 자리에서

산신山神에 빌다가 세월에 가고

수신水神에 빌다가 세월에 간다.

 

 

 

이 얼마나 멋진 비유인가. 불교식으로 얘기하자면, 그들이 전생에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아마 비슷한 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경전에 숱하게 나오는 ‘전생담’이 바로 사람 몸 받기가 그만큼 힘든 것을 얘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 몸 받았을 때부터 사람 같은 행동하고 잘 살라는 얘기다. 그래야 다음 생에는 더 좋은 몸 받을 게 아닌가.

일전에 개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에게 농담 삼아 “거, 너무 개를 좋아하다 보면 다음 생에 개의 몸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적당히 사랑해주세요.” 했더니 별로 탐탁지 않게 듣는 듯했다.

그 사람은 개를 사람보다 더 귀하게 여기니 동물 애호 측면에서야 좋겠지만, 그렇게 사람처럼 호강한 그 개가 사람 몸 받게 될지, 개의 생각에 모든 것을 맞추고 사는 그 사람이 개의 몸 받게 될지는 먼 훗날 자연히 알게 되겠지.

 

 

그럼, 윤회란 또 무엇인가.

나도 한때는 좋은 업을 많이 쌓으면 극락세계에서 아미타부처님이 데리러 오고, 못된 없을 쌓으면 지옥에서 저승사자가 와서 데려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생각은 송광사 율원에서 ‘성유식론成唯識論’을 공부하면서 바뀌었다. 비슷한 의미이긴 하지만 ‘주체’가 다르다.

성유식론에 보면 ‘중동분衆同分’이라는 낱말이 나온다. 요즘 말로 하면 ‘같은 무리끼리 모인다.’는 뜻이니 한마디로 끼리끼리 모여 산다는 뜻이다. ‘끼리끼리’, 참 좋은 말이다.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 사니 얼마나 좋겠는가. 가족, 친척, 사회, 좋은 사람들은 좋아서 좋고, 악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성향이 비슷해 좋고…….

 

내가 금생에 살면서 사람같이 행동하면 사람 몸을 받을 것이고, 사람으로 살면서 수행자 업을 쌓으면 수행자가 사는 곳에서 끼리끼리 모여 살 것이고, 음악을 많이 좋아하면 결국 음악 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짐승 같은 행동을 하며 산다면 그 업의 힘에 저절로 끌림을 당해 축생계로 가서 그들과 어울릴 것이요, 아주 극악무도한 업을 지으면 지옥으로 가서 비슷한 무리들과 모여 살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주체가 바로 ‘나’란 것이다.

마치 백사장에 자석을 갖다 놓으면 쇳가루가 저절로 와서 달라붙듯이, 우리도 누가 와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생육도의 커다란 힘에 의해 내가 지은 바대로,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생전에 좋아하던 곳으로 그 ‘끌림’에 의해 나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보살님들은 그 힘에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택해 보살행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그 업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윤회가 결국 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니 매 순간 닥쳐오는 업의 선택을 잘 만들어갈 일이다.

늘 좋은 사람들과 영혼이 맑은 얘기를 나누고 선업을 쌓으면 마음을 극락세계 아미타부처님께 둔다면 다음 생은 극락정토에,

아니면 더 좋은 인간 세상에 자리를 예약해둔 것과 같다.

 

해인사 팔만대장경각 법보전 주련에 보면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라는 글이 있다.

‘깨달음, 즉 행복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나고 죽고 하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얘기다.

 

바로 지금, 이 마음이 중요하다.

‘바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