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죽음관
불교의 죽음관
불교에서는 원래 죽음이 없다고 말한다.
죽음이 없다기보다 내가 죽는 일은 아예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왜냐하면 이미 죽을 내가 없기 때문이다.
죽을 내가 없다는 그 무아無我를 아는 것, 이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그것을 보조 지눌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눈병이 있는 사람이 허공에 어른거리는 것을 볼 때 ‘있다’고 하나,
눈병이 다 나으면 허공의 꽃[飛蚊症]도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을 알게 된 경우와 같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가합假合되어 벌어진 현상계일 뿐,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 속은 텅 비어 있다.
그러나 마른 나무에서도 해마다 봄이 되면 꽃은 피어난다. 생명은 연기緣起로 존재한다.
조건만 맞으면 연기 상황으로 존재하다가 조건이 다하면 돌아간다. 우리의 생사도 그와 같다.
‘인연에 의하여 생긴 모든 사물은 한바탕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물위의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풀잎의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다’는 ⟪금강경⟫의 말씀이 그것이라고 하겠다.
“진실로 이 세상은 고통 속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어 간다. 어떻게 해야 이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분은 출가를 결행했고 6년 동안 극단적인 방법으로 고행했다.
무엇이 있기 때문에 늙고 죽는 것일까? 무엇에 연고해서 노사老死가 있는 것일까?
아!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늙고 죽음이 있다. 그 태어남을 인연해서 바로 늙고 죽음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음으로 해서 태어남이 있는가?
유有가 있음으로 해서 생生이 있다.
유有는 다시 취取로 인해, 취取는 애愛로 인해 있고, 애愛는 수受로 인해 있고, 수受는 촉觸으로 인해 있고,
촉觸은 6처處로 인해 있고, 6처處는 명색名으로 인해 있고, 명색名色은 식識으로 인해 있고,
식識은 행行으로 인해 있고, 행行은 무명無名으로 인해 있음을 알아내었다.
이러한 과정과 단계를 거쳐 정리된 것이 12연기법緣起法이다.
즉 생生을 멸하면 노老 ‧ 사死가 멸하고 노老 ‧ 사死가 멸하면 우비고뇌憂悲苦惱가 멸하는 것임을 알았다.
명성이 반짝일 때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삼명이 구족한 ‘불타’(깨달은 사람)가 되셨다.
이로써 그는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때의 나이는 35세, 때는 12월 8일이었다.
“생生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며, 가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노병사老病死 수상행식受想行識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지수화풍地水火風 ,
그리고 공空은 어디로부터 좇아오고 가면 어디로 가나이까?”
빈궁한 노파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생은 좇아오는 곳이 없고, 가도 가는 곳이 없으며, 늙음도 병사病死도 오는 곳이 없으며, 수상행식受想行識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지수화풍地水火風 공空도 모두 좇아오는 곳이 없고 가서 이르는 곳도 없느니라. 모든 법은 이와 같으니라. 비유하면 두 나무가 서로 비벼서 불을 내면 도리어 그 나무를 태우고,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는 것과 같으니라.”
노파는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불은 어디로부터 좇아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인연이 합하면 불이 있다가 인연이 다하면 불이 꺼지느니라.”
연기에 의해 가합된 이 몸뚱이는 그림자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본래 공空함을 알면,
즉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하나니’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말씀이⟪반야심경⟫의 핵심사상이 아니겠는가.
사리자여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空이 색色과 다르지 않다.
모든 공한 모습에는 생기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더럽거나 깨끗한 것도, 늘거나 줄거나 하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공空의 세계에는 이렇다 할 실체도 없고 감정도, 생각도, 욕망도, 의식도 없고 …… 내지 의식의 영역도 없다.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늙고 죽음도 없으며 늙고 죽음을 벗어나는 것도 없나니 괴로움도, 그 원인도 열반도 도 닦음도 없느니라.
⟪반야심경⟫의 핵심 내용을 간추려 보았다. 어디에 극복해야 할 죽음이 있는가?
불교의 죽음관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따로 없다는 것이며 그것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다.
오온의 공성空性을 절묘하게 노래한 시가 있다.
끌어 모아서 얽어매면, 한 칸의 초가집.
풀어 헤치면 본래의 들판인 것을!
그러기에 혜월스님은 ‘일체 변하는 법은 본래 그 실체가 없다.
모양이란 원래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서 부산 범일동 뒷산에 올라 솔가지를 잡은 채 호흡을 접으셨다.
고려 때의 진각스님은 도반 마곡스님과 평소에 다름없이 떠들며 웃다가 갑자기 그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이 늙은이가 오늘 몹시 바쁘다네.”
“아니 이 사람아! 여태 잔소리를 하다 말고 무엇이 그리 바쁘단 말인가? 원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먼.”
“아, 글쎄, 이 늙은이가 오늘은 몹시 바쁘다니깐.”
마곡이 얼떨떨해 있는 동안 진각스님은 미소를 띠며 호흡을 접으셨다.
오온이 다 빈 그릇이어서 이 몸에는 ‘나’라고 할 것이 없고,
참마음은 모양이 없어 오고 가는 것도 아니다.
날(生) 때에는 성품은 난 바가 없고 죽은 때에도 성품은 가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지극히 고요해 마음과 환경은 하나인 것이다.
직 이와 같이 관찰하며 단박 깨치면 삼세인과 얽매이거나 이끌리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뛰어난 자유인이다.
⟪선가귀감⟫의 말씀이다.
오고감이 없는 생사불이生死不二의 도리를 의상스님은 이렇게 읊으셨다.
간다 간다 하지만 본래 그 자리요 行行本處
이르렀다 이르렀다 하지만 떠난 그 자리네. 至至發處
월산스님의 임종게도 여기에서 다르지 않다.
한평생을 돌고 돌아 廻廻一生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았네. 未移一步
본래 그 자리 本來其位
그것은 천지 이전에 있었네. 天地以前
불교 선양을 위해 기꺼이 목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차돈 성사,
그리고 보우스님이 불교 중흥을 이룩하고 문정왕후 서거 후 제주도에 유배된 뒤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
순순히 육체를 내맡긴 것도 그것이 환화幻化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허깨비 몸으로 와서
오십여 년 온갖 미친 짓
모든 영욕 다 겪고
이제 그 더러운 탈을 벗는다.
그의 임종게가 웅변으로 말해 준다.
‘허공에 응應한’ 그의 다른 이름 ‘허응당虛應堂’처럼 보우스님은 허깨비 몸을 통쾌하게 벗어던졌던 것이다.
중국의 승조스님이 왕명을 거역하여 처형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몸은 본래 주인이 없고 四大非我有
오온은 원래 텅 비었어라. 五蘊本來空
저 칼이 내 목을 친다 해도 以首臨白刀
봄바람을 자르는 것과 다름없어라. 猶如斬春風
육신의 죽음은 깨달은 자에 있어서는 죽음이 아니다.
죽은 것은 육신이지 본질적 자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은 경지에서는 더 이상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찍이 난(生) 적도 없고 죽지도 않았으니까. 왜냐하면 본래부터 적멸상寂滅相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며 깨달음의 완성이다.
깨달은 이는 적멸상을 통해 이미 죽음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