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의 대화

옮긴 글

혜주 慧柱 2015. 9. 28. 07:23

마치며

죽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인생을 경쟁적으로 살지 말고, 사랑과 자비와 평화를 서로 나누라는 깨우침이다.

잠깐 사는 짧은 인생이기에 다투지 말 것이며, 함께 사는 인생이기에 타인을 위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하다, 당장 한반도에서도 남북 간, 이념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고 있고, 지역사회 내에서도 크고 작은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끊임없는 다툼과 투쟁 등 평화보다 갈등이 항상 먼저 눈에 띄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갈등의 원인은, 대상과 나를 확고하게 분리시켜 보는 이원적 사고방식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명(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된, 타인과 나, 사회와 나, 환경과 나를 분리시키는 개인주의적egoistic이고 배타적인 사고는 진실을 보는 눈을 가리게 되고, 공존의 사회질서를 간과하게 만들어 결국 갈등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모든 이들과 모든 환경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타인의 불행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기보다 모두의 행복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구현하는 길이 참된 길일 것이다.

 

티베트의 유명한 격언이 있다.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찼을 때, 모든 불행은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의 세상이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위험에 직면한 시대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며, 영적인 성장은 삶에서 사치가 아니라 모두의 생존을 위한 필수품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제시되었듯이, 죽음교육과 죽음수련이야말로 영적인 성장의 기회를 만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교육은 현재의 삶과 죽어 가는 과정뿐만 아니라 미래의 삶, 나아가 인류의 미래까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소걀 린포체, 티베트의 지혜, 582쪽)

 

나는 이 수련을 통해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불교의 가르침인 윤회Samsara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번뇌와 고통을 중단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죽음수행을 통해 나의 어리석은 미망을 내려놓고 보니, 본래 세상이 빛과 사랑과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죽음을 맞는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가장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가장 좋은 삶이란, 주어진 시간 동안 자신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삶은 우주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폭파하고 테러 훈련을 시키는 일과 폭탄, 폭격기, 미사일 등을

만드는 일에는 수백만 달러를 소비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는 일과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동전 한 푼도 투자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처럼 우리의 삶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고, 분노, 공포, 욕심 등의 감정으로 마음이 혼란스럽다면, 평화로운 죽음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죽음을 제대로 맞고자 한다면 제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평화로운 죽음을 희망한다면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평화를 일구어야 하는 것이다.(달라이 라마의 법문 중에서)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가능성을 손에 쥐고 있다. 물질주의 ․ 과학만능주의의 시대에서 영성의 시대로 옮겨 가고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우리에게 달려 있으며, 모든 종교를 초월하여 주어지는 진정한 영서에 대한 깨달음이 그 원동력이다.

모든 분야의 직업에서 앞으로는 기술 이전에 이런 삶의 깨달음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을 참으로 변화시켜 다른 존재를 돕기 위해 어떻게 하면 변화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를 배우는 것은 진정 세상을 돕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소걀 린포체, 티바트의 지혜, 582쪽)

그리고 이런 사회의 구현은 죽음 교육과 영성수행을 통해 우주 속의 진정한 나를 만나는 데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이가 애타게 그리던 내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