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의 대화

눈 고장에서 법정 스님이 수행자에게 보내는 편지

혜주 慧柱 2016. 10. 3. 09:02

1, 눈 고장에서 수행자에게 보내는 편지 / 법정 스님

 


요 근래 여러 곳의 선원에서 해제비解制費로 막대한 돈이 주어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물량으로 넘치는 선원의 분위기와 이 땅의 선풍禪風이 우울하게 묻어온다.


명심하라, 수행자가 진리를 실현하려는 구도자로서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려면, 세속적인 사찰제도에서 벗어나 그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독립된 개체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려보라,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종교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 종교가 아닌지를 냉정히 가려보라. 이것을 가려볼 수 있다면, 승려나 사제 혹은 목사나 책들이 더 이상 우리를 속일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놓일지라도 믿고 따를 환상이나 허상을 만들어내지 않게 될 것이다.


절이나 교회에 종교가 있다고 잘 못 알지 말라. 어떤 종교든지 일단 조직화되고 제도화되면 종교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 위협적 존재가 되고 만다. 그때 종교는 더 이상 신이나 진리로 가는 길이 아니라 독선과 아집에 대한 변명이 되어 버린다. 종교의 틀 속에 갇힌 사람들은 어떤 의식이나 상징을 종교로 잘 못 알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싸우고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신은, 부처와 진리는, 이런 곳에는 없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조용히 앉아 끝없이 움직이는 생각을 지켜보라. 그 생각을 없애려고 하지고 말라. 그것은 또 다른 생각이고 망상이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라. 지켜보는 사람은, 언덕 위에서 골짝을 내려다보듯이 거기서 초월해 있다.


지켜보는 동안 이러니저러니 조금도 판단하지 말라. 강물이 흘러가듯이 그렇게 지켜보라. 그리고 받아들여라. 어느 것 하나 거역하지 말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그러면서도 그 받아들임 안에서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본래의 자기 자신과 마주하라. 삶은 영원한 현재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 그리고 이 자리에 있을 뿐이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은 바른 수행이 아닌 줄 알아라. 대오선待悟禪은 선이 아니란 말을 기억하라. 종교적인 여행은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 그저 늘 새롭게 출발할 뿐이다. 그 새로운 출발 속에서 향기로운 연꽃이 피어난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자신 안에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득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를 함께 지니고 있는 신비로운 세계다. 홀로 있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고독한 존재다.


그 고독과 신비로운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거듭거듭 안으로 살피라. 무엇이든지 많이 알려고 하지 마라. 어지럽힌다. 낙엽으로 뒹구는 후박나무잎 치다꺼리에 수고가 많겠다. 늘어나는 빈 가지에서 새봄의 싹을 찾아보아라. 나는 다시 시작하기 위해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9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