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로도 부족하다.
99퍼센트도 부족하다
世上事가 너무 完璧하면 재미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약간의 餘裕를 가지는 것이 좋다고 말하곤 한다.
그렇다.
人生事는 조금 不足한 面이 있어야 삶이 재미있을 수 있다. 뭔가 不足한 점이 있는 것, 그것이 소박하고 人間的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음료수 광고는 ‘2프로 부족’한 것을 강조하는 廣告를 만들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100% 完璧하거나 이에 近接해야 하는 일도 많다.
一例를 들자면 비행기 엔진을 만들 때, 99%의 완성도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비행기 엔진 하나를 만들 때, 볼트 백 개가 사용된다고 생각해 보자.
볼트를 만들 때, 99%의 완성도는 백 개 중 한 개의 불량 볼트를 생산한다.
그러면 결국 비행기 엔진은 100%의 불량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결과는 우리의 生命을 威脅할 뿐만 아니라, 大形 事故를 誘發할 큰 危險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예는 볼트 生産 時 불량 시험 點檢을 하지 않았다고 假定할 때이다.
佛者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은 ‘佛敎는 무척 融通性이 많은 宗敎’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佛敎는 어떤 것이라도 包容할 수 있고, 雅量이 넓다고 생각한다.
마치 바다가 世上의 모든 강과 시냇물을 받아들이듯이, 실로 佛敎는 融通性과 폭넓은 包容力이 있다.
佛敎의 融通性과 폭넓은 包容力의 바탕에는 慈悲 精神이 있다.
이 慈悲精神이야말로 佛敎가 衆生을 包容하는 바탕이다.
大慈悲心은 衆生의 잘못과 실수, 罪惡들을 容恕하고 끌어안을 수 있다. 하지만 慈悲와 함께 두 기둥을 이루는 智慧는 嚴密하다.
智慧로 이끄는 가르침은 嚴格 · 正確하고 細密하면서도 緻密하다.
큰 眞理가 작은 眞理를 包容하는 넓음은 있지만 眞理와 맞지 않는 것은 결코 티끌만큼도 受容하지 않는다.
이런 嚴正함을 보여주는 一例로 禪家에는 백장야호(百丈野狐)의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다.
백장회해(百丈懷海)선사(禪師)가 說法할 때마다 한 노인이 와서 늘 大衆 뒤에서 열심히 듣고 있다가,
大衆이 물러가면 함께 물러가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은 물러가지 않았다. 이를 궁금히 여긴 스님이 물었다.
“앞에 서 있는 자는 어찌 된 사람이냐?”
노인이 대답했다.
“예,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 가섭불 당시에 이 절의 주지였습니다.
그때 어느 學人이 ‘大修行人은 因果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하고 제게 물었습니다.
저는 ‘因果에 떨어지지 않느니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오백 생 동안 여우의 몸이 되었습니다.
제가 여우의 몸을 벗어나도록 스님께서 한 말씀 하셔서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러고는 노인이 물었다.
“대수행인은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백장선사가 대답하였다.
“因果에 어둡지(昧) 않으니라.”
노인은 백장선사의 말에 크게 깨달아 인사하며 말했다.
“제가 이미 벗어버린 여우의 몸이 뒷산에 있을 것입니다.
스님께서 죽은 스님에게 하듯 葬禮를 치러 주시기 바랍니다.”
백장선사가 유나를 시켜 ‘식후(食後)에 죽은 스님의 장례가 있다.’고 대중에게 告하게 하니
‘모두 건강하여 한 사람의 病者도 없는데 어째서 죽은 스님의 葬禮가 있다고 하는가?’하고 大衆이 수군대었다.
食後에 백장선사가 大衆을 데리고 뒷산 바위 밑에 이르러 지팡이로 죽은 여우를 끄집어내어 火葬하였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표현해 볼 수 있다.
‘큰 修行者는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습니까?’라는 물음에
여우의 몸을 받은 이는 ‘큰 수행자는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다.’라고 대답한 것과 같다.
어떻게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백장선사의 대답은 ‘그 일에 대해 어둡지 않고 잘 안다.’라는 것이다.
이는 밝은 智慧의 눈으로 眞理를 꿰뚫어 아는 能力을 갖췄다는 意味이다.
歷代 禪師뿐만 아니라, 석가모니부처님조차도 世上의 因果法에 例外가 아니었다.
그리고 설사 因果法에 떨어지지 않는 能力이 있다고 해도 因果法을 어기는 것은 道人이 行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큰 修行者라고 해서 因果法을 벗어날 수 있다고 했으니, 오백 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는 果報가 따랐던 것이다.
주경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