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祖壇經

부 록

혜주 慧柱 2018. 8. 1. 15:30

附 錄



師入塔後 至開元十年壬戌八月三日夜半 忽聞塔中 如拽鐵索聲하고 僧衆 驚起하야 하니 一孝子 從塔中走出이어늘 尋見하니 師頸 有傷이라 具以賊事 聞于州縣한대 縣令楊侃 刺史柳無忝 得牒하여 切加擒捉五日이러니 於石角村 捕得賊人하야 送韶州하야 鞫問한대 云姓 이오 淨滿이니 汝州梁縣人이라 於洪州開元寺 受新羅僧金大悲錢二十千하고 令取六曹大師首하야 歸海東供養이라하야늘 柳守 聞狀 未卽加刑하고 乃躬至曹溪하야 問師上足令韜曰如何處斷 曰若以國法으로 인댄 理須誅夷어니와 但以佛敎 慈悲 寃親 平等이온 況彼求欲供養하니 罪可恕矣라한대 柳守 嘉歎曰始知佛門 廣大라하고 遂赦之하다


조사께서 탑에 드신 후(722) 개원 10년 임술 83일 한 밤중이 되었을 때 갑자기 탑 속에서 쇠줄을 잡아당기는 듯한, 소리가 나므로 스님들이 놀라서 나가보니 한 상주가 탑에서 나와 달아나므로 자세히 살펴보니 조사의 목에 상처가 있었다. 도적이 든 사실을 고을에 자세히 알리니 현령인 양간과 자사인 유무첨이 통첩을 받고 사로잡으려고 애를 쓰더니 5일 만에 석각촌에서 도적을 잡았다. 소주로 보내 죄를 심문하니 성은 장이고 이름은 정만인데 여주 양현사람이라 하였다.

홍주의 개원사에서 신라 스님 김 대비로부터 돈 2만량을 받았고 김 대비는 육조대사의 머리를 가지고 해동으로 돌아가서 공양하려 했다하므로 유수가 이 사실을 듣고 형의 집행을 보류하고 몸소 조계에 가서 조사의 제자 가운데 제일 뛰어난 사람인 영도에게 어떻게 처단해야 할지를 물으니,

영도가 말하기를 만약 국법으로 논한다면 모조리 죽여야 마땅하겠지만 불교는 자비로워 원수나 친한 이나 모두 평등한데 하물며 그 사람이 공양을 하고 싶어서 한 짓이니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하므로, 유수가 감탄하며 비로소 불문이 넓고 큰 것임을 알았습니다.”하여 풀어 주었다.



上元元年 肅宗 遣使하야 就請師衣鉢하야 歸內供養이러시니 至永泰元年五月五日 代宗 六曹大師 請衣鉢이어시늘 七日 勅刺史楊緘云 朕夢 感能禪師 請傳法袈裟하야 却桓曹溪라하고 今遣鎭國大將軍劉崇景하야 頂戴而送하사대 朕謂之國寶 卿可於本寺 如法安置하고 專令僧衆 親乘宗旨者 嚴加守護하야 勿令遺墜하라하시다

或爲人偸竊 皆不遠而獲하니 如是者 數四러라 憲宗 諡大鑑禪師하고 塔曰元和靈照라하시니 其餘事蹟 係載唐尙書王維 刺史柳宗元 刺史劉禹錫等碑하니라 守塔沙門令韜 하노라


상원 원년(760= 멸도한지 47년째)에 숙종이 사신을 보내어 조사의 의발을 대궐 안으로 가져와 공양하였는데 영태 원년 55일 대종의 꿈에 육조대사가 나타나 의발을 청하므로 7일에 자사인 양함에게 분부하여 이르시길

짐의 꿈에 혜능선사가 나타나서 법을 전하는 가사를 조계로 되돌려 주라.하시므로 진국대장군인 류숭경으로 하여금 받들어 보낸다. 짐이 국보로 생각하니 경이 직접 본사에 가서 법대로 잘 모시고 스님 가운데 종지를 친히 이은자로 하여금 더욱 엄중하게 수호하게 하여 잘 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셨다.

그 뒤에 가끔 사람들이 몰래 훔쳐 갔으나 모두 오래지 않아 찾아왔는데 이와 같은 일이 네 번이나 있었다.

헌종(806)이 대감선사라 시호하시고 탑을 원화 영조라 이름하셨다.

그 나머지 사적은 당나라의 상서인 왕유와 자사인 유종원과 자사인 류우석 등이 비문에 실었다. 탑을 지키는 사문 영도가 기록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