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주 慧柱 2006. 6. 25. 17:21

* 실참 수행 *

 

 

행함이 없는 공부, 실천이 따르지 않는 공부는 생명이 없는 지식을 쌓는 데 불과 합니다. 백 번 보는 것이 한 번 행하는 것만 못하니, 참 지혜란 실천을 통해 얻어 지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이 아무리 어마어마하고 광대무변하다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체험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입니다. 열 번 아니라 백 번을 보더라도 내가 집어먹을 줄 모르면 보나마나 입니다. 자기 생활, 자기 몸, 자기 마음으로의 체험을 하찮게 여기고 어디 가서 불법을 찾겠습니까?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내 앞에 계신다 할지라도 내가 먹고 배부르지 않으면 그분의 배부른 도리를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라도 대신해 줄 수 없기에 마음 내지 않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습니다. 제 나무에서 열매 익어야 맛을 알게 됩니다.

수박 맛을 보겠다고 뚫어져라 들여다 보고 있으면 맛이 느껴질까요? 아니면 그냥 쩍 갈라서 먹어보아야 할까요? 이게 무얼꼬? 하는 것을 참구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지금처럼 바쁜 세상에 언제 그렇게 하겠습니까?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납니다.’하는 격으로 세월 낭비하지 말고 그냥 쪼개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 뭣꼬 하지 말고 꿀꺽 집어 삼키라는 말입니다. 그냥 나를 있게 한 주인공에 턱 맡겨 놓고 가십시오.

지나다 보면 궂은 날도 있고 맑은 날고 있듯이 마음에도 변화가 무쌍한 법입니다. 그런 마음을 화두라든가 어느 한 곳에 억지로 붙들어 두려는 것은 구름을 매어 두려는 것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공은 그렇게 해서 체현할 수 없습니다. 그저 마음의 본성을 의심 없이 직시하기만 하면 그대로 공은 체현됩니다. 그러면 날이 궂든 개었든 변함없이 여여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내면에서 솟는 의정도 아니고 남이 준 화두를 들고 쥐어짜고 있으니 어느 때 맑은 날을 볼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마음 자리가 곧 화두입니다.

참선하는 자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하든, 일어나서 하든, 누워서 하든, 한다 안 한다 또는 다했다는 생각조차 없어야 합니다. 만법에 걸림 없음이 참선입니다. 참선을 함에 있어서 서두르지 않아야 빨리 성정할 수 있습니다. 빨리 하겠다는 마음과 쥐고 늘어져서 꼭 알겠다는 마음, 또는 나는 이렇게 꼭 해야겠다는 생각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일을 하면서도 일한 줄도 모르고, 잠을 자면서도 잠자는 줄을 몰라야 하고, 보면서도 본 줄을 몰라야 하고, 들으면서도 들은 줄을 몰라야 하고, 발을 딛고 다니면서도 딛는 줄 몰라야 하고, 만 가지 법을 손으로 주무르고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한 줄을 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홀연히 깨우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앉으나 서나, 누우나 걸을 때나, 먹을 때나 눌 때에도 주인공의 선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주인공 자리는 일체 함이 없는 가운데에 삼라만상과 더불어 나로 하여금 같이 살며, 같이 쓰게 합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근본은 하나이며 그가 곧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나의 주인공이면서 태양의, 천지의, 만물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삼계의 유정, 무정이 다 같이 회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군데로 마음을 모아 일심으로 가다 보면 마침내 그것이 화산이 되어 터지는 때가 옵니다. 이것이 마음 공부의 비결입니다.

경전이란 이 세계를 말해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경전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경전을 보느라고 실상을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의 선사 중에는 수좌들에게 처음에는 오히려 경전을 보지 못하게 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경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경전 벌레밖에 될 게 없습니다.

경을 달달 왼다는 것은 나무의 잎새를 세는 것과 같습니다. 백팔 배를 한다는 것은 나뭇가지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해 놓으신 것은 잎새와 가지를 가르쳐 주면 거기에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그렇게 일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잎새를 아무리 여러 번 세어 보아도, 가지를 아무리 수 차례 어루만져 보아도 공덕이 있을 리 없습니다. 모든 것을 뿌리로 돌려야 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뿌리로 돌려야 합니다. 뿌리에 물을 주어야 잎새가 싱싱해지고 열매가 맺히겠지요. 뿌리가 아니라면 나무는 죽습니다. 경을 읽되 경이 나를 보지 않고 내가 경을 보지 않는 이치, 절을 하되 절을 한 사이가 없는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계율은 주어진 짐입니다. 그러나 하나 똑 떼어서 던지고 나면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또한 계율입니다. 일체 경계를 다 근본 주처에 놓고 나가면 구태여 계율이라는 자로 재지 않아도 계율은 저절로 지켜지며, 그 때의 계율은 자유의 날개가 됩니다. 계율에 자기를 꿰 맞추려 하지 말고 내 안에 이미 온전히 갖춰져 있는 계율이 절로 우러나오도록 수행하십시오.

모든 것을 주인공 자리에 맡겨 놓는다면 구태여 팔정도니, 육바라밀이니, 사성제니, 십이 인연이니, 따지지 않더라도 계율을 다 지킬 수 있고 더불어 다 같이 유익하게 살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됩니다. 그러니 먼저 관념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아상을 떨쳐버리고 일체를 둘 아니게 보는 공부부터 하십시오.

탐ㆍ진ㆍ치, 즉 삼독심과 망심을 여의면 절로 청정한 보리심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삼독심을 여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무조건 자신의 주인공을 믿고 일체를 놓아야 합니다. 일단 다 알고 나면 믿고 놓을 것도 없는 것이지만, 처음에는 무조건 자기가 주인공을 믿고 놓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거기에서 나오고, 들이는 것도 거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탐하는 마음이 날 때에는 즉시 자기 본래 면목, 주인공에게 탐하는 마음을 가라 앉혀 달라고 일임하여 보십시오. 화나는 마음이나 어리석은 마음이 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해 보십시오. 그냥 그대로 가라앉게 될 것이니 그렇게 자꾸 하다 보면 탐ㆍ진ㆍ치, 삼독심을 스스로 여의게 되고 본래 청정한 보리심이 나타나게 됩니다.

중생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사랑하려면 자기에게 기쁨이나 만족을 주어야 할 텐데 오히려 번뇌를 안겨줍니다. 그리하여 중생은 자기사랑으로 자기를 위한다면서 실은 자기를 번뇌에 몰아넣어 결과적으로 자기를 저주하는 전도몽상이 된 셈입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진정한 자기를 모르고 거짓된 자기를 자기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이는 모름지기 첫째도 죽어야 하고, 둘째도 죽어야 하고, 셋째도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기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먹장 구름이 걷혀야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수행을 해 나가다 보면 내면으로부터 많은 경계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럴 때 그 경계 또한 놓아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을 놓아 나가지 않을 때 그 경계는 마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경계든 싫은 경계든 붙들고 집착하면 마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인공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가는 도중 장애가 오더라도, 설사 죽게 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주인공은 나를 죽게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철저히 믿고 놓아 가십시오.

무릇 모든 것을 형상으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자기 형상은 그대로 있으면서 참 자기를 볼 때에야 비로소 남을 보아도 겉을 안 보고 속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도 없을 때가 나중에 옵니다. 그 다음에는 참 자기가 자기한테 말을 걸어오게 되고 자기도 마음속으로 말하고 듣게 됩니다. 이 때에야 비로소 자기와 참 자기가 서로 상봉하게 되며 이 때가 되면 자기 주인인 참 자기가 자기를 지도합니다. 그러면 주인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야지 반대하면 안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돌아와 보면 참 자기와 자기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후부터는 내가 하는 대로 참 자기도 같이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스승이고 제자인지 차이가 없게 되고 급할 때는 참 자기가 비서도, 의사도, 신장도, 그 무엇도 다 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천백억 화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중생인 나를 버리고 따로 이 부처인 나를 찾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곧 부처이니 버릴 나도 찾을 나도 없습니다. 다만 미망을 여윔으로써 내가 부처임을, 내가 본래로 나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고 보면 내가 바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하고 웃음을 터뜨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의 웃음이 아니고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웃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