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일회一期一會
2008년 10월 19일 가을 정기법회
요즘처럼 청명한 가을날이 되면 사는 일이 새삼스럽게 고맙고 풋풋해집니다.
도시에서도 그렇지만 산중에 살면 날씨의 영향을 특히 많이 받습니다.
우중충하고 비바람 치는 날씨에는 마음 역시 흐리고 스산해집니다.
오늘처럼 화창한 날엔 마음이 활짝 열려서 무척 즐겁습니다.
연일 청명한 가을 날씨 덕에 저도 여러 가지로 흥겨운 일상을 지냈습니다.
빨래를 널면서 곧잘 서정주의 ‘푸르른 날’이라는 시를 외우곤 했습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이렇게 두런두런 시를 외고 있으면 마음이 더 즐거워지고 사는 일이 새삼 고맙게 여겨집니다.
가을날 외는 시는 마음을 더없이 그윽하게 합니다. 시는 언어의 결정체입니다. 그 안에 우리말의 넋이 살아 있습니다.
나지막이 시를 외고 있으면 우리말의 아름다운 속 얼굴이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가끔은 바쁜 일상 속에서 시를 읽으십시오.
지나날 학창 시절에 더러 시를 외우지 않았습니까?
세상 살다 보면 문학에서 멀어져 시가 무엇이고 소설이 무엇이며 산문이 무엇인지 망각하게 됩니다.
때로는 시를 읽으며 자기 삶을 새롭게 가꿀 필요가 있습니다. 시를 읽으면 피가 맑아집니다. 무뎌진 감성의 녹이 벗겨집니다.
험한 세상을 사느라 우리들의 감성이 얼마나 무뎌졌습니까?
달이 뜨는지 해가 돋는지 별이 있는지, 도시의 환경 자체가 우리들 감성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요즘 눈을 뜨기 무섭게 들려오는 우울하고 부정적인 뉴스들에 크게 위축되고 있습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어떻고, 외환사정이 어떻고, 펀드와 증권으로 몇조 원이 날아가고,
농사를 짓지도 않는 사람들이 국민의 쌀 직불금을 받아 가고…… 들리는 소식마다 우리를 몹시 절망하게 만듭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저 경제와 돈, 물질적인 얘기들뿐입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널뛰고 있는 경제에 갈팡질팡 쫓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입만 열면 경제를 말하는데 우리는 과연 가진 것만큼 행복한가? 스스로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그만큼 더 행복한가? 그렇다고 해서 많이 갖지 못한 사람들은 다 불행한가?
이와 같은 물음을 자기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외부적인 조건만 가지고 행복과 불행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많이 가졌으면서도 살 줄 모르면 불행하고, 적게 가졌으면서도 살 줄 알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외부적인 상황이나 조건에만 있지 않고 내적인 수용, 즉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요즘처럼 들려오는 소식에 휩쓸리다 보면 우리들 자신이 너무 왜소해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살아가는 일에 자신을 잃고 끝없이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인 현상만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경제와 물질만이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눈을 안으로 돌리면 보다 긍정적이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영역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늘 눈앞의 현실, 밤낮 들려오는 세상 뉴스에만 귀 기울이고 거기에 매몰되면 사는 일 지체가 무기력해집니다.
그런 외압에 짓눌려서 안으로 충분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일깨우려 하지 않습니다.
옛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그 자취를 살펴보면 후손인 우리들이 배울 점이 참으로 많습니다.
250여 년 전 서울을 배경으로 활동한 장혼張混이라는 선비가 있었습니다.
선비라고 하면 그 당시의 지식인입니다. 장혼 선비는 자신의 <평생의 소망平生志>이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인왕산 아래 옥류동 골짜기에 있는 허름한 집 한 채에 마음이 끌려서 언젠가 그 집을 사들여 꾸미고 싶은 소망에 부풀어 있습니다.
어느 날 그 집을 팔려고 내놓은 것을 알고 집값을 물어보니 엽전으로 5백 냥이었습니다.
250년 전 5백 냥이면 그다지 큰돈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 집을 사들일 생각을 합니다.
집 둘레에는 자신이 평소 좋아하던 나무를 심고, 또 꽃도 가꾸고 채소밭을 일구며 살리라는 꿈에 늘 부풀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의 부록에서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주거 공간에서 어떻게 살겠다는 생활 모습을 낱낱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리는 행복, 일상에서 쓰는 도구, 늘 하는 일, 귀중하게 여기는 책, 즐기는 경치, 조심할 것 등을 차례차례 나열합니다.
그중에서도 ‘맑은 복 여덟 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태평시대에 태어난 것. 자신이 태어난 시대가 전쟁이 없고 아주 태평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때가 소위 문예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영 · 정조 시대입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살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둘째, 서울에 사는 것. 요즘의 서울에 비하면 대단한 곳이 아니겠지만, 250년 전 서울은 도성으로서 지금처럼 교통도 복잡하지 않고 여러 가지로 살기 좋았던 듯합니다.
셋째, 자신이 다행히 선비라는 신분을 가진 것,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넷째, 문자를 대충 이해하는 것. 이는 겸손한 표현입니다.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초서와 예서에도 뛰어났습니다.
다섯째, 산수가 아름다운 곳 하나를 차지한 것.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옥류동 골짜기 집을 사들였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여섯째, 꽃과 나무 천여 그루를 가진 것. 직접 심고 가꾸는 꽃과 나무를 아주 많이 가지고 있었던 듯합니다.
일곱째, 마음에 맞는 벗을 얻은 것, 이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마음에 맞는 벗은 매우 든든한 인생의 자산입니다.
여덟째, 좋을 책을 소장한 것.
장혼은 또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홀로 머물 땐 낡은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옛 책을 읽으면서 그 사이에 누웠다가 올려다보면 그만, 마음이 내키면 나가서 산기슭을 걸어다니면 그만, 흥이 도도해지면 휘파람 불고 노래를 부르면 그만,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으면 그만, 목이 마르면 내 우물의 물을 마시면 그만, 추위와 더위에 따라 내 옷을 입으면 그만, 해가지면 내 집에서 쉬면 그만이다. 비 오는 아침과 눈 내리는 낮, 저녁의 석양과 새벽의 달빛, 이토록 그윽한 삶의 신선 같은 정취를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말해 주기 어렵고, 말해 주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그는 이렇게 ‘그만而已’이라는 표형을 즐겨 쓰더니 “나의 천명을 따르면 그만이다.” 하면서 자신이 사는 집의 이름을 ‘이이엄而已广’ 이라고 지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각자 자기 자신이 어떤 맑은 복을 누리고 있는지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삶 속에서 내가 정말 조촐하게 지니고 싶은 맑은 복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돌아보십시오.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살아왔고, 맑은가 흐린가 하는 분별조차 없이 살았기 때문에 갑자기 생각이 나지는 않겠지만
이다음 한가한 시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맑은 복을 어떻게 받아쓰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새삼 저 자신이 몸답고 살아가고 있는 환경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경전이든 누구의 글이든 객관적으로만 읽고 지나치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의 삶을 그 거울에 비춰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글을 읽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읽는 것입니다.
저는 장혼의 ‘맑은 복 여덟 가지’를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았습니다.
제가 산중에서 혼자 지내면서도 기죽지 않고 나날이 새로울 수 있는 것 또한 무엇인가 내 뒤에서 나 자신을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내 둘레에 무엇이 있는가? 한번 돌아보니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스승과 말벗이 될 수 있는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둘째, 입이 출출하거나 무료해지려고 할 때 개울물 길어다 마시는 차가 있습니다. ‘내가 산중에 살면서 차 맛을 모른다면 무슨 재미로 할까?’ 이런 생각을 문득문득 하게 됩니다. 단지 차만 마시는 것이 아니고, 그 차를 통해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사물을 관조하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삶의 맑은 여백 같은 것입니다.
셋째, 혼자 사는 사람들은 자칫하면 신경질을 부리고 딱딱하게 굳어지기 쉽습니다. 제가 굳어지려고 할 때 삶에 탄력을 주는 음악이 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서 건전지를 사용하는 조그마한 소리통에서 음악을 듣곤 합니다.
넷째, 제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이 있습니다.
책과 차와 음악과 채소밭이 제 삶을 녹슬지 않게 받쳐주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게 여겨졌습니다.
여러분들도 한가한 시간에 자신의 삶을 녹슬지 않게 받쳐 주고 있는 맑은 복이 몇 가지나 되는지 한 번씩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바쁜 일상 속에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한적한 삶을 누리고 싶은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자식들 다 키운 뒤 시골에 내려가 조그만 밭이라도 일구면서 한가하게 그동안 살지 못했던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꿈 자체가 우리에게 풋풋한 가슴을 지니게 합니다. 또 그러한 꿈은 우리들의 본능입니다.
꼭 돈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처지에 상관없이 누구나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장혼의 <평생의 소망>도 그런 꿈의 표현입니다.
언제 현실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소망이지만 미래를 설계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현재의 삶이 여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일상에 찌들지 않고 늘 향기로운 가슴을 지닐 수 있습니다.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동파蘇東坡는 그의 <적벽부
赤壁賦>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 강물 위의 맑은 바람과 산중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들으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니 빛이 되는구나. 가지고자 해도 말릴 사람 없고 쓰고자 해도 다할 날 없으니, 이것은 천지자연의 무진장이로다. |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또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저 ‘또 달이 떴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요즘은 텔레비전을 통해 달을 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들은 저절로 ‘내 남은 평생에 둥근 달을 몇 번이나 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감사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달은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이다음 달에는 날이 흐리고 궂어서 보름달이 뜰지 말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달뿐 아니라 모든 기회가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일기일회입니다.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입니다.
강과 산은 본래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 느끼면서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바로 강과 산의 주인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변에는 관심을 안으로 기울이면 우리들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대상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런데 눈을 밖으로만 팔기 때문에, 외부적인 상황이나 그 덫에 걸려서 나의 삶과 연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둘레에는 이렇듯 무진장한 고마운 자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을 위하고 감싸 주며 먹여 살리는 자연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을 물질에만 몰두해 있느라 그것들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있는지 없는지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좋은 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청명한 가을날, 고뇌를 이기지 못해 오늘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서른 명은 넘을 것이라고 합니다.
결코 자랑스러운 통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자살률이 세계경제협력기구 국가 중에 첫째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 해에만 12,000여 명, 하루로 치면 30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귀중한 목숨을 스스로 반납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숨처럼 귀하고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단 하나뿐이고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회적인 것입니다.
그런 목숨을 우리는 너무도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며 단 몇 분만이라고 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산소 호흡기를 떼지 못하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환자의 가족들을 또 얼마나 가슴 졸이면서 그가 단 몇 분이라도 더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이런 소중한 목숨을 너무 손쉽게 포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 살거나 죽는 것은 더 따질 것도 없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자기 혼자만을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설령 떨어져 지낸다 하더라도 그는 가족과 친구, 수많은 이웃들과 함께 삶의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함께 어울려 흐름을 이루는 삶의 대열에서 자기 감정대로 이탈하는 것은 결코 명예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고통스런 일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까?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깊이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동서고금의 선각자들이 몇 생을 겪으면서 자기 체험에서 우러나서 하는 소리입니다.
자살은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끊는 자해 행위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해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해친 자해의 업業을 짊어지고 다음 생으로 건너갑니다.
윤회의 사슬 같은 것입니다. 윤회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런데 그 고통에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은 자해의 업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곧 업이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와 같은 씨앗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낳습니다. 모든 행위는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업이 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하면 결국 죽게 됩니다. 이것이 업의 파장입니다.
누가 어떤 식으로 죽으면 바로 모방해서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업의 파장입니다. 업의 메아리입니다.
이런 업이 인과관계의 고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과관계의 배후에는 반드시 업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착한 업이든 착하지 않은 업이든 인과관계의 고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업은 그 파장이 있기 때문에 결코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관성의 법칙처럼 습관화됩니다.
그래서 업력業力이 되고 업장業障으로 굳어집니다. 결코 한두 번으로 종결되지 않습니다.
한 생애를 거치는 동안, 특히 감성이 예민한 젊은 시절에는 한두 번 자살의 충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내 놓고 보면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도 아닌데, 일시적인 고뇌의 늪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막막한 고통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습니다.
흐린 날이 있으면 반드시 맑은 날이 있듯이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유동적입니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늘 변합니다. 외부적 상황도 변하고 자기 내면적인 생각도 변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늘 변합니다. 어제는 죽고 싶어 하지만 오늘은 살고 싶어 합니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그 순간의 절망감에서
생을 포기하고 도중하차하려 하지만 그것은 한때의 절망일 뿐입니다.
얼마 전에 자살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들도 그 막막한 한때의 덫에서 헤어나 맑은 정신으로 인간사를 살필 수 있었다면,
그 잠사 동안의 외곬인 생각에서 벗어나 지금은 보다 넓은 시야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죽으면 무엇이 해결될 것 같은 환상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 그 한때에 갇혀서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궂은일이든 좋은 일이든 어디까지나 한때의 일일 뿐입니다.
몸이 아프거나 집안에 걱정 근심이 있거나 그 밖에 여러 가지 불행이 있을 때면 그것들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변합니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구나 세상을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 혼자서는 일방적인 고정관념 때문에 그 늪에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생각이 맴돌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가까운 친구를 만나서, 그런 친구가 없다면 가까운 절이나 교회를 찾아가서 자신이 홀로 짊어진 짐을 부려 놓아야 합니다.
절과 교회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종교는 힘들어하는 이들의 자문 역할을 하는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만약 자살하기 전에 좋은 친구나 좋은 스승이 있어 자기 짐을 부려 놓을 수 있었다면,
누구도 그렇게 비극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살 만큼 살다가 목숨이 다하면 누구나 몸을 바꿉니다.
부처든 부처의 할아버지든 영원히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 명대로 살다가 갑니다.
마치 헌 차를 버리고 새 차로 갈아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의 현상입니다.
그런데 한때의 극단적인 충동으로 멀쩡한 차를 버리게 되면 새 차는 전에 탔던 차만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한 업의 파장 때문입니다.
이 몸을 버릴 때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고 새로운 몸을 받아 새 사람이 되어 새 삶을 살면 될 것 같지만, 업이라는 것은 영혼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내가 평소에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업의 찌꺼기들이 설령 이 몸을 버린다 하더라도 이다음 생까지 따라옵니다.
업력이란 본디 그렇습니다. 가령 아이들이 몇 살 되지도 않았는데 피아노에 소질이 있거나 하는 것은 이번 생에 익혀서가 아닙니다.
전생에 익힌 잠재력이 때를 만나서 개발이 되어 그렇습니다. 개인차라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일기일회, 한 번의 기회, 한 번의 만남입니다.
이 고마움을 세상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가을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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