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신심명, 그리고 일기일회

20),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림이다

혜주 慧柱 2010. 5. 22. 20:04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림이다

2005년 11월 15일 겨울안거 결제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 밖의 땅바닥에 앉아서 혹은 서서 듣고 계신 분들께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들어와 보니 법당 안도 그다지 따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햇빛이 비치는 바깥의 양지바른 곳이 더 따뜻할 것 같습니다.

11월입니다. 산에 사는 사람들은 11월을 그 어느 달보다도 마음에 들어 합니다.

여기 길상사의 나무들엔 아직도 잎이 남아 있는데, 11월의 산중은 잎이 다 지고 빈 가지들뿐입니다.

또 바람결도 매서워지고, 하늘은 맑게 개어, 여름 동안 가려져 있던 산과 계곡이 그 모습을 다 드러내는 계절입니다.

산에 사는 저 역시도 11월을 가장 좋아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11월을 가리켜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습니다.

다 사라진 듯하지만, 또 다시 소생할 여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서울 종로 사거리의 횡단보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쪽 다리가 없고 남은 다리도 주체를 못해서 바닥에 끌고 다니는 남루한 옷차림의 한 걸인이,

앉은 채 두 손으로 길바닥을 짚으며 힘겹게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신호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은 그저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때 맞은편에 서 있던 두 청년이 서로 마주 보더니 재빨리 걸인에게 달려가,

한 청년은 뒤쪽에서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부축하고

다른 청년은 힘없이 흔들거리는 걸인의 다리를 조심스레 들어 올려서 길을 건너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인도에 걸인을 내려놓은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길을 건너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저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러한 걸인을 보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호를 기다리면서 귀찮으니까 마음을 내지 못하는데,

이 두 젊은이는 선뜻 나서서 나누는 일을 실천한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입니다. 아무 분별없이 선뜻 나서서 돕는 일을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불교 수행의 첫걸음은 이 보리심을 발하는 것입니다.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서는 불도를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발보리심을 줄여서 발심發心이라고 합니다. ‘발’이란 본래 지니고 있는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어 널리 펼친다는 뜻입니다.

 

옛 선사의 법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불도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를 배우는 것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자기를 잊어버릴 때 모든 것은 비로소 자기가 된다.”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보고 선뜻 나서서 돕는 일에는 자신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심코 그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남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비로소 내 마음이 열립니다. 선행이란 그런 것입니다. 개체로부터 전체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은 가지고 있지만 보리심을 발하지 않기 때문에 묵혀두고 있을 뿐입니다.

 

송나라 때 스님으로 종색 자각宗賾慈覺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종색 선사는 <좌선의坐禪儀>의 첫 구절에서 좌선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먼저 큰 자비심을 일으키라. 넓은 서원을 세우고 정의롭게 삼매를 닦아야 한다.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고, 내 한 몸만을 위해 해탈을 구해서는 안 된다.”

선방에서는 참선할 때 화두를 가지고 합니다. 화두는 선사들의 일종의 문답입니다.

옛 선승들은 이러한 문답을 하나의 공부 주제로 삼았습니다. <전등록>에 등장하는 인물은 1,700명에 달합니다.

1,700명 모두가 화두를 말한 것은 아니지만 화두가 그 정도로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화두가 <전등록>에 나오는 옛 스승들의 혀끝에만 있는 것인가? 참선하는 분들은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여기 길상사에도 길상선원이 있고 지방에도 수많은 선방들이 있습니다.

각자 집에서도 참선을 합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화두, 공부의 명제에 대해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짜 바른 화두를 들고 있는지, 건성으로 죽은 화두를 들고 있는지 스스로 되돌아보면 알 것입니다.

살아 있는 화두를 지녀야 합니다. 죽은 화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 화두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상황에서는 살아 있는 화두의 역할을 했지만,

이 시대에 와서 우리가 그것을 관념화시키면 살아 있는 화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화두는 어디에 있는가?

진짜 살아 있는 화두는 사거리나 동네 길목 또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늘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찾기 때문에 삶의 절실한 명제인 화두를 놓치게 됩니다.

순간순간 깨어 있는 사람은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삶의 문제이자 과제인 화두와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화두입니다.

 

제 풋중 시절 경험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벌써 50년 전 이야기인데, 제가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입니다.

그때 수덕사 조실로 금봉錦峰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을 해인사로 모셔 왔습니다. 선방 곁에 조실스님 방이 있었습니다.

한 달에 두 번씩 조실스님 방에 가서 공부한 것을 묻고 점검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조실스님에게 갈 때 저도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 스님은 금봉 스님에게 화두가 잘 안 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화두를 잘 들 수 있겠습니까?”

이때 금봉 스님이 물었습니다.

“무슨 화두를 들고 있는가?”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본래면목이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 본래의 자기 자신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금봉 스님이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본래면목은 그만두고 지금 당장 그대 면목은 어떤 것인가?”

곁에서 듣고 있던 저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참선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불교는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참선과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와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있습니다.

삶 역시 그렇습니다. 다음 순간의 일을 누가 압니까? 한 번 숨들이 쉬었다가 내쉬지 못하면 굳어지는 것이 육신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어제도 없고 늘 지금입니다. 지금이 자리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번 겨울안거 동안 죽은 화두를 챙기지 마십시오. 죽은 화두를 가지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살아 있는 화두를 가지고 정진해야 합니다. 보리심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화두를 통해 수행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수행하는 분들, 특히 참선하는 분들, 염불 혹은 기도하는 분들도 낱낱이 살펴보십시오.

내가 간절하게 하는 일이 보리심을 발하는 일인가? 내 수행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은 바른 수행입니다. 혼자만 좋아서 하는 수행은 바른 수행이 아닙니다.

 

불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서원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입니다.

“끝없는 중생을 기어이 다 건지고 어려운 이웃들을 다 뒷바라지하고 보살피겠습니다.”라는 서원입니다.

이것이 발보리심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겨울안거 결제일을 맞이해 각자 자기 자신부터 이런 다짐을 하십시오.

발보리심을 실천하며 이웃에게 회향廻向할 수 있는 마음을 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