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강설(信心銘講說) 上
01,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至道無難이요 唯嫌揀擇이니 지 도 무 난 유 혐 간 택
지극한 도(道)란 곧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말합니다. 이 무상대도는 전혀 어려운 것이 없으므로 오직 간택(揀擇)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간택이란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말함이니,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으면 지극한 도는 양변(兩邊), 즉 변견(邊見)에 떨어져 마침내 중도의 바른 견해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간법(世間法)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니며, 마구니(魔軍)를 버리고 불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취하거나 버릴 것 같으면 실제로 무상대도에 계합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불법을 바로 알고, 무상대도를 바로 깨치려면 간택하는 마음부터 먼저 버리라 한 것입니다.
02,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는다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이라 단 막 증 애 통 연 명 백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 두 가지 마음만 없으면 무상대도는 툭 트여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는 좋아하고 마구니는 미워하며, 불법을 좋아하고 세간법은 미워하는 증애심(憎愛心)만 버리면 지극한 도는 분명하고 또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간택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즉 증애심입니다. 이 증애심만 완전히 버린다면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의 네 구절이 바로 「신심명」의 근본 골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신심명」을 바로 알려면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증애심만 떠나면 중도정각(中道正覺)입니다. 대주스님은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에서 ‘증애심이 없으면 두 성품이 공하여 자연히 해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첫 네 구절이 「신심명」의 핵심이고 뒤 구절들은 주해의 뜻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03,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毫釐有差하면 天地懸隔하나니 호 리 유 차 천 지 현 격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취하고 버리는 마음과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버리라.”고 하니, “아 그렇구나, 천하에 쉽구나!”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이 뜻을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처럼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아주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쉽다는 것은 간택심ㆍ증애심만 버린다면 중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성불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며,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지만, “이 간택심을 버린다, 증애심을 버린다.”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뜻을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벌어진다고 하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04,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欲得現前이어든 莫存順逆하라 욕 득 현 전 막 존 순 역
“무상대도를 깨치려면 따름[順]과 거슬림[逆]을 버리라.”한 것입니다. ‘따름’과 ‘거슬림’은 상대 법으로서, 따른다 함은 좋아한다는 것이고, 거슬린다 함은 싫어한다는 것이니, 이는 표현은 다르나 ‘싫어하고 좋아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데, 지극한 도를 얻으려면 따름과 거슬림의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05, 어긋남과 따름이 소로 다툼은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違順相爭이 是爲心病이니위 순 상 쟁 시 위 심 병
어긋난다, 맞는다 하며 싸운다면, 이것이 갈등이 되고 모순이 되어 마음의 병이 된다는 말입니다.
06,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不識玄旨하고로 徒勞念靜이로다불 식 현 지 도 노 염 정
“참으로 양변을 여윈 중도의 지극한 도를 모르고 애써 마음만 고요히 하고자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대도를 성취하려면 누구든지 가만히 앉아서 고요히 생각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大道(대도)라는 것은 간택심(揀擇心)ㆍ증애심(憎愛心)ㆍ순역심(順逆心)을 버리면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마음을 억지로 고요하게 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분주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안 된다고 하니 그러면 분주하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혹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움직임과 고요함 이 두 가지가 다 병으로서 움직임이 병이라면 고요함도 병이고 어긋남이 병이라면 맞음도 병입니다. 왜냐하면 고요함도 병이고 어긋남이 병이라면 맞음도 병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상대적인 변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대를 버려야 대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07,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圓同太虛하야 無欠無餘어늘원 동 태 허 무 흠 무 여
“지극한 도는 참으로 원융하고 장애가 없어서,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즉 융통 자재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음을 큰 허공에 비유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조금도 모자라거나 남음도 없습니다. 지극한 도란 누가 조금이라도 더 보탤 수 없고 덜어낼 수도 없어 모두가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바로 깨칠 뿐 증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극한 도가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08,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良由取捨하야 所以不如라양 유 취 사 소 이 불 여
“지극한 도는 취하려 하고, 변견은 버리려 하는 마음이 큰 병이라”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변견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중도를 많이 얘기하지만, 그 말을 듣고 중도를 취하려 하고 변견을 버리려 하면 이것이 큰 병이라는 뜻입니다. 혹 변견은 취하고 중도를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병은 마찬가지로서 무엇이든지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큰 병입니다. 대도에는 모든 것이 원만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라고 남는 것이 없지만, 우리가 근본 진리를 깨치지 못한 것은 취하고 버리는 마음, 즉 취사심(取捨心)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생을 버리고 부처가 되려는 것도 취사심이며, 불법을 버리고 세속법을 취하는 것도 취사심으로서 모든 취하고 버리는 것은 다 병입니다. 때문에 “취사심으로 말미암아 여여한 자성을 깨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여여한 자성’이란 무상대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취사심을 버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09,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莫逐有緣하고 物住空忍하라막 축 유 연 물 주 공 인
‘있음의 인연[有緣]’이란 세간법과 같은 말로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세상 일이라는 뜻입니다. 공의 지혜[空忍]란 곧 출세간 법이라는 뜻입니다. 인연이 있는 세상 일도 좇아가지 말고 출세간 법에도 머물지 말라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 병이기 때문입니다. 있음[有]에 머물면 이것도 병이고, 반대로 공함에 머물면 이것도 역시 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있음을 버리고 공함을 취하거나, 공함을 버리고 있음을 취한다면 이것이 취사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우리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세간의 인연도 버리고 출세간법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0,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이라일 종 평 회 민 연 자 진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억지로 가리킨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고 양변을 떠나면 바로 중도(中道)가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가리키므로 일체 만법이 여기에서 다해 버렸으며, 동시에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절로 다한다’고 했다 해서, 무엇이 영영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다한다.’는 것은 일체 변견이, 일체 허망[妄]이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항하사(恒河沙) 같은 진여묘용이 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 인연을 좇지도 않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않으면 중도가 현전하여 변견이 다하고 항사묘용(恒沙妙用)이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11, 움직임을 그쳐 그침으로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
止動歸止하면 止更彌動하나니지 동 귀 지 지 갱 미 동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고요함[靜]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마음을 누르고 고요한 데로 돌아가려 하면, 고요 하려는 마음이 점점 더 크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열심히 참구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망상이 일어난다고 이 망상을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망상이 자꾸 일어나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망상에 망상을 보태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 ‘화두만 참구하고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도 하지 말고 피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참구하라 ‘고 누누이 일러주는데도, 어떤 납자는 “자꾸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 하는 이것이 참선 공부에서 가장 힘들다’고 더러 말합니다. 이는 망상을 덜려고 망상을 일으킨 것으로서 망상에 망상 하나를 더 보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망상을 덜려는 생각도 덜지 않으려는 생각도 버리고 화두만 참구하라’고 납자들에게 더러 일러줍니다만, 그것이 쉽게 안 되는 모양입니다. 이것이 그침[止], 곧 고요함을 좋아하여 움직임[動]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점점 더 크게 움직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12,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 건가.
唯滯兩邊이라 寧知一種가유 체 양 변 영 지 일 종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중도를 알겠는가.”하였습니다. ‘그침[止], 곧 고요함은 버리고 움직이는[動]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하겠지만 이것도 양변이라는 것입니다. 움직임도 고요함도 버리고 자성을 바로 볼 뿐,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일종(一種)인 중도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육조 스님께서는 유언에서 ‘언제든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13,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一種不通하면 兩處失功이니일 종 불 통 양 처 실 공
‘일종(一種)’,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ㆍ진여자성(眞如自性)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의 공덕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14,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遣有沒有요 從空背空이라견 유 몰 유 종 공 배 공
이 구절은 참으로 깊은 말씀입니다.
현상[有]이 싫다고 해서 현상을 버리려고 하면 버리려 하는 생각이 하나 더 붙어서 더욱 현상에 빠지고, 본체[空]가 좋다 하여 공을 좇아가면 본체를 더욱 등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공이란 본래 좇아가거나 좇아가지 않음이 없는 것인데, 공을 따라갈 생각이 있으면 공과는 더욱 등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현상을 버리고서 공을 따르려고도 하지 말며, 반대로 본체를 버리고서 현상을 따라 가려고도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양변이며 취사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취사심을 버려야만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多言多慮하면 轉不相應이요 다 언 다 려 전 불 상 응
이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설명하고 거듭 설명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래 대도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것[言語道斷心行處滅]’입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도(大道)가 이와 같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려 하다가는 대도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16,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絶言絶慮하면 無處不通이라 절 언 절 려 무 처 불 통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곳에서는 자연히 대도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말과 생각이 끊어진’ 여기에 집착하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통하지 않아 아주 모르게 됩니다. 이 ‘말과 생각이 끊긴 것’은 그 자취마저 없는 데서 하는 말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경지에서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과 생각이 끊어진 곳’에 집착하면 전체가 막히고 맙니다. 여기서도 근본은 취사심을 버려야 대도를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17,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歸根得旨요 隨照失宗이니귀 근 득 지 수 조 실 종
자기의 근본 자성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어 무상대도를 성취하고, ‘비춤을 따른다[隨照]’는 것은 자기 생각나는 대로 번뇌망상ㆍ업식망정을 자꾸 따라가면 근본 대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18,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須臾返照하면 勝脚前空이라수 유 반 조 승 각 전 공
잠깐 동안에 돌이켜 비춰보고 자성을 바로 깨치면 ‘공했느니 공하지 않느니’ 한 것이 다 소용없는 꿈 같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19, 앞의 공함이 전변(轉變)함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前空轉變은 皆由妄見이니전 공 전 변 개 유 망 견
앞에서의 공함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妄見]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18공(十八空))ㆍ20공(二十空))등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이런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제로 뜻이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공이 어떻게 옮겨 변할 수 있겠습니까? 공함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게 된 것은 중생의 망견(妄見) 때문이며 진공(眞空)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20,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不用求眞이요 唯須息見이라불 용 구 진 유 수 식 견
누구든지 깨치려면 진여본성을 깨치려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빛나듯 태양을 따로 찾으려 하지 말고 망상의 구름만 걷어 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자성 청정한 진여본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여자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도 망견이 앞을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니, 망견만 쉬어버리면 진여자성을 달리 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견이란 무엇일까요?
21,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二見不住하야 愼莫追尋하라이 견 부 주 신 막 추 심
두 가지 견해는 즉 양변의 변견을 말합니다. 이 변견만 버리면 모든 견해도 따라서 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변에 머물러 선악ㆍ시비ㆍ증애 등 무엇이든지 변견을 따르면 진여자성은 영원히 모르게 됩니다.
22,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纔有是非하면 紛然失心이니라.재 유 시 비 분 연 실 심
갓 시비가 생기면 자기 자성을 근본적으로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앞에서는 자기의 잔여자성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면 된다고 했는데, 그 망령된 견해란 곧 양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양변을 대표하는 시비심(是非心), 즉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을 들어 망견이라는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불법(佛法)이 옳고 세법(世法)이 그르다든지, 반대로 세법이 옳고 불법이 그르다든지 하는 시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큰 병입니다. 우리가 실제의 진여 자성을 바로 깨쳐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이 시비심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견을 쉬고 양변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비심은 두 가지 견해를 대표하는 예로 들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상대법(相對法)의 전체가 다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23,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二由一有니 一亦莫守하라이 유 일 유 일 역 막 수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하나마저도 버려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알았다 해도 중도가 따로 하나 존재한다고 하여 여기에 집착하면 병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 때문에 둘이 있으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고 버려라, 곧 중도마저도 버리라 하였습니다. 중도는 무슨 물건이 따로 존재하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떠나서 융통 자재한 경지를 억지로 표현해서 하는 말입니다.
24,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 법이 허물 없으니라.
一心不生하면 萬法無咎니라일 심 불 생 만 법 무 구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만법이 원융무애하여, 아무 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허물이 없다’는 것은 융통자재를 말한 것으로서 사사무애(事事無碍)ㆍ이사무애(理事無碍)의 무장애법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어디서 성립되느냐 하면 양변을 여윈 중도에 성립됩니다. 즉 시비심의 두 견해를 버리고, 하나마저도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일체 만법에 통달 무애한 무장애법계가 벌어져 일체에 원융자재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른바 ‘허물이 없다’고 합니다.
25,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無咎無法이요 不生不心이라무 구 무 법 불 생 불 심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허물도 없고 법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있어서 원융무애한 줄 알면 큰 잘못입니다. 이 경지는 허물도 법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마음이랄 것도 없습니다. 허물도 변(邊)이고, 법도 변(邊)이며, 나는(生)것도 변이며, 마음이라 해도 변입니다. 이 모두가 없으면 중도가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26,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에 따라 잠겨서
能隨境滅하고 境逐能沈하야능 수 경 멸 경 축 능 침
능(能)은 주관을 경(境)은 객관을 말합니다. 주관은 객관을 따라 없어져 버리고 객관은 주관을 좇아 흔적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니,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이 남아 있으면 모두가 병통이라는 말입니다.
27,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境由能境이요 能由境能이니경 유 능 경 능 유 경 능
객관은 주관 때문에, 주관은 객관 때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이 없으면 객관이 성립하지 못하고 객관이 없으면 주관이 성립하지 못 한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병이므로 주관ㆍ객관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28, 양단을 알고 할진 댄
원래 하나의 공이라.
欲知兩段인댄 元是一空이라욕 지 양 단 원 시 일 공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두 가지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원래 전체가 한 가지로 공(空)하였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관도 객관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근본 대도인데, 주관ㆍ객관을 따라 간다면 모두가 생멸법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두를 버려야만 대도에 들어오게 되는데, 양단(兩段)이 모두 병이고 허물이므로 이것을 바로 알면 전체가 다 공했다라는 것입니다. ‘공했다’는 것은 양변을 여윈 동시에 진여가 현전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공했다고 한 그 하나의 공은 말뚝처럼 서 있는 것 일까요, 아니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29, 하나의 공단은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함께 다 포함하여
一空同兩하야 齊含萬象하야일 공 동 양 제 함 만 상
앞에서 ‘공했다’고 하여, 아주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줄로 알아서는 크게 어긋나니 이는 단멸의 공[斷空]에 빠져 버립니다.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아서 두 가지가 다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의 공이란 차(遮)로서 부정을 말하고, 양단과 같다는 것은 조(照)로서 긍정을 말합니다. ‘양단을 버리면 하나의 공이 된다’는 것은 양단을 부정하는[雙遮]동시에 양단을 긍정한다[雙照]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둘을 버리고 하나가 되면 그 하나가 바로 둘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공이 둘과 동일하게 원융무애하므로 완전히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체의 삼라만상이 하나의 공 가운데 건립되어 있다고 하는 뜻이 됩니다. 결국 우리가 변견을 떠나 자성을 깨치고 중도를 성취하면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되어 삼라만상과 항사묘용이 여기에 원만구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空)이라 해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일체가 원만구족한 것을 공이라 하며 공이 또 공이 아니어서[不空], 일체 삼라만상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0, 세밀하고 거칢을 보지 못하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不見精麁어니 寧有偏黨가불 견 정 추 영 유 편 당
앞 구절에서 ‘하나의 공’이란 공공적적(空空寂寂)하여, 일체의 명상(名相)이 떨어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으므로 일체 삼라만상 그대로가 중도 아님이 하나도 없습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까지도 중도 아님이 없으므로 사사무애(事事無碍)한 법계연기(法戒緣起)의 차별이 벌어지게 되어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차별이 벌어진다고 하니 어떤 실제의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차별이 벌어져 드러났다 하여도 거기에 세밀함과 거칢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이 곧 공이 아니며 공 아님이 곧 공이므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여전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산이라느니 물이라는 생각과, 산은 높고 물은 푸르다는 등 이러한 견해가 있으면, ‘한 가지 공이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다’는 뜻을 확실히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쌍차쌍조(雙遮雙照)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한 무장애법계에 있어서는 세밀함과 거칢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쪽으로 치우치고 편벽된 것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모든 상이 다 떨어져 원융무애하고 대 자재한 것을 말한 것이지, 세밀함과 거칢이나 편당(偏黨)을 가지고 하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누구든지 세밀함과 거칢에 기우는 편당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다’는 도리는 절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31,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大道體寬하야 無易無難이어늘대 도 체 관 무 이 무 난
무상대도는 그 본바탕이 넓기로는 진시방무진허공(盡十方無盡虛空))을 여러 억천만개를 합쳐 놓아도 그 속을 다 채우지 못합니다. 이 같은 무변허공(無邊虛空)이라 해도 실체로는 이 자성에다 어떻게 비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대도의 본체는 바탕이 넓다’고 한 것으로서 무궁무진하고 무한무변한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대도의 본체는 넓어서 어려움도 없고 쉬움도 없다’한 것은 본래 스스로 원만히 구족되어 있으므로 조금도 어렵다거나 쉽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 스스로 원만히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대법이든 무엇이든 지간에 우리는 공부해서 성취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대도를 성취하려면 참으로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므로 쉬운 것도 역시 아니라는 말입니다. 곧 쉽다, 어렵다 하는 것은 모두 중생이 변견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이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는 대도를 모르고 하는 말이므로 이러한 쓸데없는 지견(知見)은 모두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32, 좁은 견해로 여우 같은 의심을 내어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지도다.
小見狐疑하야 轉急轉遲로다소 견 호 의 전 급 전 지
조그마한 견해로 여우처럼 자꾸 의심하며 급하게 서둘면 반대로 더욱 더디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대도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는데, 이를 자꾸 가깝게 하려 하면 더욱 멀어지는 것이 사실이므로, 누구든지 대도를 성취하려면 쉽다는 생각도 내지 말고 어렵다는 생각도 내지 말며, 급한 생각도 더디다는 생각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쉽다ㆍ어렵다ㆍ급하다ㆍ더디다 하는 등이 모두가 변견으로서 취사심(取捨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취사심을 버려야만 대도를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33,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執之失度라 必入邪路요집 지 실 도 필 입 사 로
대도나 중도나 또는 다른 뭐라고 하든지, 이를 집착하면 병이 됩니다. 누구든지 중도를 성취하고 부처를 이루려면 집착하는 병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착이 없는 사람은 대도를 성취한 사람이며, 집착이 있는 사람은 대도를 성취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병이 있으면 법도를 잃고 근본 대도와는 어긋나서 반드시 삿된 길, 즉 변견에 떨어지게 됩니다.
34,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放之自然이니 體無去住라방 지 자 연 체 무 거 주
홀연히 집착을 놓아 버리면 모두가 자연히 현전하며, 본체는 본래 가는 것도 머무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머무름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고, 가는 것이 있으면 머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도는 본래 원만구족 하여 머무름과 가는 것이 떨어졌기 때문에 집착하는 생각만 완전히 놓아버리면 자연히 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견인 취사심을 버려야만 대도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35,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소요하여 번뇌가 끊기고
任性合度하야 逍遙絶惱하고임 성 합 도 소 요 절 뇌
모든 집착심을 놓아 버리면 자기의 자성을 따라서 그대로 도에 합합니다. 이는 마치 구슬이 쟁반에서 구르듯이 힘 안들이고 마음대로 활동하여 아무런 장애도 없습니다. 소요(逍遙)란 한가롭고 자재한 기상을 말하는데, 일체 번뇌망상이 다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36,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서
혼침(昏沈)함이 좋지 않느니라.
繫念乖眞하야 昏沈不好니라.계 념 괴 진 혼 침 불 호
우리가 모든 집착심을 놓아 버리면 대도가 현전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번뇌망상은 그만두고, 대도ㆍ중도ㆍ부처라는 등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생각이 얽매이면 바로 진리와는 어긋나므로, 중도도 깨져 버리고 부처도 죽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부처라는 생각과 중도라는 생각, 참되다는 생각 등 어떤 생각이든지 이런 생각이 추호라도 마음에 남는다면 근본은 모두 깨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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