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지 못했기에 깨달을 수 있고 아직 모르기에 알 수 있다
돈오(頓悟)란 몰록 온전하게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80퍼센트 혹은 90페센트 깨닫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물속의 물고기가 물을 찾아 돌아다니다 선지식을 만났습니다. 선지식이 물에 돌을 던지자 ‘풍덩’하고 파문이 일었습니다. 바로 그때 물고기는 전체가 물이 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업장의 후박(厚薄)이나 노력의 경중(輕重)과는 아무란 상관없이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돈오는 곧 성불이며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심인법(心印法)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은 간절한 마음이 부족해서 믿음이 약해지고, 믿음이 약하면 바로 일러줘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부처나 조사나 나 자신이나 똑같은 사람인데 왜 나만 모르고 있는가?’하는 대 분심과 참으로 알고자 하는 간절심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시절인연이 무르익습니다.
깨달음의 순간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언하(言下)에 깨닫기도 하고, 종소리 바람소리를 듣고 마음 문이 열리기도 하며, 할이나 방에 의해 마음의 기틀이 돈발(頓發)하기도 합니다. 또한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보다가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깨달음의 순간은 언제 다가올지 모릅니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까닭은 물고기가 본래 물속에 있듯이, 사람마다 본래 성품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들고 있는 모든 망상과 집착을 놓기만 하면 되니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부처나 조사와 같이 상근기만의 전유물이라 생각하지 말고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보조스님은 도(道)에 들어가는 문(門)은 많으나 대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두 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비록 최상근기가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들어가지만 이미 여러 생에 걸쳐 닦은 결과 금생에 이르러 듣자마자 깨달음과 동시에 닦음을 마친 것이니, 이 또한 깨닫고 나서 닦은 결과라고 하였다. 당연한 귀결로 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밟아온 길이며, 과거의 모든 성인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 나갔고, 그 닦음에 의해 증득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신통변화는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고 차츰 익혀야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은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신통이란 통달한 사람의 경지에서는 요괴한 짓이며, 성인에게 있어서도 말단의 일이며, 혹시 나타낼 지라도 요긴하게 쓸 것은 못됩니다.
마음은 몰록(홀연히)옵니다. 동시에 모든 의심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마음의 본체는 분명해지나 일상 속의 망념과 습기는 곧 제거되지 않기 때문에 규봉스님은 “얼음 못 전체가 물인 줄은 알았으나 햇빛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부처인 줄 깨달았으나 법의 힘을 의지하여 익히고 닦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야 그 물에 씻는 보람이 나타나고 망상이 사라지면 마음이 신령하게 통해 광명의 작용이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깨닫고 나서 성태(聖胎)를 길러 온전하게 되는 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육근을 갖추고 있는 것이 다른 어른과 다를 바가 없으나 그 힘은 충실치 못하므로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야 비로소 온전한 어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중에 어느 것이 옳은 가를 두고 논쟁이 있습니다만, 바로 알면 둘 다 맞습니다. 돈오돈수만이 맞는 것은 아닙니다.『수심결』은 너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다 보니 오히려 시비가 많은 것 같습니다. 도(道) 혹은 각(覺)이라 하면 뭔가 어려워야 하고 거창해야 한다는 선입견들이 있습니다. 어렵게 얘기하면 환호하고, 쉽게 얘기하면 반신반의합니다. 마치 똑같은 유명회사의 명품인데도 비싼 가격을 매겨 넣으면 잘 팔리고 정상 가격을 매겨 놓으면 잘 팔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조사스님은 “다가오는 대로 묵은 업을 녹여낼 뿐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으며, 닦을 것도 깨칠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어서 늘 특별할 게 없다.”고 했습니다. 돈오 후에는 일상 속에서 본래의 성품자리를 지키면서 성태(聖胎) 장양하는 오후보임(悟後保任)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닦음이 없는 닦음(無修)’ 즉 ‘참된 닦음(眞修)’입니다. 이 기간의 길고 짧음은 깨달은 자의 근기에 따라 다릅니다.
스스로의 마음이 곧 부처인데 깨닫기 위해 무슨 특별한 방편이 필요하겠습니까? 방편을 써서 알고자 한다면 어긋납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자기 눈을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눈을 보려고 애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눈을 찾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밖으로 헤매고 다녀도 이미 자기 스스로의 눈이니,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만약 잃지 않은 줄 알면 곧 눈을 보는 것입니다. 알려고 하면 알지 못할 것이니 다만 알지 목할 줄 알면 곧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 눈을 찾아 온 동네를 헤매고 다니면서도 자기 집은 잘도 찾아옵니다.
도(道)는 알고 모르는데 속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현상이 꿈이나 환상 같아서 망념 또한 본래 고요하고 텅 비었습니다. 일체가 공(空)한 곳에 영지(靈知)가 밝으니 텅 비어 고요하면서도 신령스럽게 아는 이것이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만약 이 마음을 깨달으면 단계를 밟지 않고 곧장 부처의 경지에 올라 걸음걸음마다 삼계(三戒)에 뛰어나며 날마다 만 냥의 황금을 녹이고도 남음이니, 참으로 대장부의 일대사를 마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일까요? 하루 종일 보고 듣고 말하고 성내고 기뻐하며 때로는 옳고 그르다고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만약 몸이 그렇게 한다면 목숨이 다하여 몸이 썩지 않았는데도 눈은 스스로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며 혀는 말하지 못하니, 어찌 몸이 그렇게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까마귀가 울고 까치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습니까?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을 돌이켜 들어보십시오(返聞聞性). 그 안에서는 일체의 소리와 분별을 얻을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님이 진리에 들어간 이근원통(耳根圓通)의 문(門)입니다. 그곳은 일체를 얻을 수 없으나 밝고 밝아 어둡지 않으며, 또한 모양도 없어서 말로는 미치지 못합니다. 또한 그곳은 대소가 없고 안팎이 없으며, 원근이 없고 피차가 없으며, 왕래가 없고 생사가 없으며, 고금(古今)이 없고 미오(迷悟)가 없으며, 범성(凡聖)이 없고 염정(染淨)이 없으며, 시시비비와 이름과 말도 없는지라, 이것이 본래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는 공적한 마음입니다. 모든 것이 공한 곳에 영지가 어둡지 않아 스스로 싱그럽게 아는 이것이 청정한 마음의 체(體)입니다.
이 청정하고 공적한 마음이 삼세 모든 부처님의 맑고 밝은 마음이며, 일체 중생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각성(覺性)입니다. 이 마음은 성인에 있어도 더하지 않고 범부에 있어도 줄어들지 않으니 부처와 중생이 어찌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성인이 범부와 다른 것은 매(昧)하지 않고 능히 스스로 마음을 지키는데 있습니다.
비록 몰록 깨달은 것이 부처님과 같으나 다생의 습기가 남아 있으므로 바람이 멈추어도 파도는 출렁이고 진리가 나타나도 망상은 생겨납니다. 그런 까닭에 대혜 종고선사께서도 “영리한 무리들이 큰 힘 들이지 않고 이 일을 밝히면 쉬운 마음을 내어 다시 닦지 않다가 세월이 흐르면 예전 상태로 되돌아가 윤회를 면치 못한다.”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은 뒤에도 항상 비추어 살펴서 망념이 일어나면 덜고 또 덜어서 할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야 비로소 마친 것이니, 천하 선지식의 ‘깨달은 후에 소먹이는 행(牧牛行)’이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뒤에 닦는다고 하지만 망령된 생각은 본래 공하고 심성은 본래 깨끗한 것임을 이미 깨달았으므로 악을 끊으려 해도 끊을 것이 없고 선을 닦으려 해도 닦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닦고 참으로 끊는 것입니다.
깨닫기 전의 점수와 깨달은 후의 점수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깨달은 후의 수행은 일상속에서 늘 깨달은 경지를 지기며 성태(聖胎)를 기르는 오후보임(悟後保任)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돈오점수라 하여 깨달음을 위해 새로이 닦아야 할 뭔가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깨닫기 전의 점수와 깨달은 후의 점수는 그 성격이 확연하게 다릅니다. 깨닫기 전의 점수는 깨닫기 위해 화두나 염불, 위빠사나 기타 수행방편을 써서 몸부림치는 것이고, 깨달은 후의 점수는 더 이상 매(昧)하지 않는 성품자리를 보임하고 성태를 기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깨닫기 전에 닦는 것은 공(功)들여 잊지 않고 생각 생각에 닦지만 매사에 의심이 나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어떤 한 물건이 가슴속에 걸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스리는 공부가 익으면 몸과 마음의 객진번뇌가 가벼워지고 편안해진 것 같지만 의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 마치 돌로 풀을 누른 것과 같아서 오히려 생사계에 자재하지 못한 까닭에 깨닫기 전의 닦음은 참된 의미의 닦음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자라도 다생의 습기가 남아 있어 마음이 편안하지 않는 자는 반연을 잊고 망념을 없애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경계를 만나 마음이 연(緣)에 끄달리지 않는 것을 정(定)이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공(空)하여 번뇌가 없는 줄 비추어 봄을 혜(慧)라 합니다. 정과 혜는 자성의 체(體)와 용(用) 두 가지 뜻을 의미하니,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바로 그것입니다. 본체의 작용이니 혜는 정을 여의지 않습니다. 조계 혜능스님은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이 자성의 정이고 마음이 어리석지 않음이 자성의 혜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깨달아 ‘차단하고 비추는 것(遮照)’ 이 둘이 아니게 되면 정이 곧 혜요, 혜가 곧 정이며, 이것이 바로 돈오문의 정혜쌍수가 됩니다.
깨달은 자는 두 가지 문(門)으로 성품자리를 지켜나가니 자성문(自性門)과 수상문(隨相門)이 그것입니다. 자성문의 정혜를 닦음이란 ‘공 없는 공(無功之功)’을 써서 공적과 영지를 갖추어 스스로 자성을 회복해 불도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수상문의 정혜를 닦음이란 아직 깨닫기 전의 방편인 망상집착을 다스리는 공(功)을 써서 번뇌를 끊고 고요함을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상과 같이 두 문(門)의 행하는 바가 각각 다릅니다. 깨달은 후에 닦는 돈문(頓門)속에 수상문의 방편을 포함시킨 것은 점문의 하근기 수행법을 취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방편만을 취하여 길을 빌리고 의탁한 것뿐입니다. 그 까닭은 돈문에도 근기가 수승한 이도 있지만 다생의 습기가 많이 남아있는 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번뇌가 담박하여 선(善)에서 선을 여의고 악(惡)에서 악을 여의며 팔풍(八風)에도 동하지 않고, 세 가지 느낌(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조차 고요한 상근기는 자성의 정혜를 의지하여 되어가는 대로 공적과 영지를 갖추어 조작이 없이 자연스럽게 진리에 계합합니다. 따라서 더 이상 닦아야 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아 수상문의 방편을 빌릴 필요가 없습니다.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비록 문득 깨달았으나 경계와 인연을 대하여 망념이 일어나고 혼침과 산란에 끄달려 본래의 공적영지를 잊어버리는 자는 곧 수상문의 정혜를 빌려서 할 일 없는 지경에 들어갈 때까지 다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록 다스리는 공부를 빌려 잠시 습기를 조절하나 번뇌가 본래 공한 것을 이미 깨달았으므로 더 이상 점문의 오염된 수행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돈문의 상근기는 스스로의 성품에 의지하여 되는 대로 맡겨 닦음이 불요하나(頓門箇者 依自性門 任運亡功) 점문의 하근기는 일어나는 대상을 따라 나아가 다스리며 수고롭게 닦는다(漸門劣機 趣隨相門 對治勞功).”
경전에 의하면 만약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로서 그 곳 중생들이게 보시하여 충만함을 얻게 하고, 그 곳 중생들을 교화하여 성위4과인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를 얻게 하면 그 공덕이 한량없으나 한번 밥 먹을 동안에 부처님의 심인법(心印法)을 바로 생각하여 얻은 바의 공덕만 같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선과 악의 바탕이 본래 공한 줄을 모르고 굳게 앉은 채 몸과 마음을 눌러 조복하기를 돌로 풀을 누르는 것과 같이 함으로써 마음 닦음을 삼으면 이는 크게 미혹한 것입니다. 번뇌를 끊으려는 생각도 도적입니다. 다만 살도음망(殺盜淫妄)이 성품으로부터 일어나는 줄 자세히 관(觀)하면 일어남이 없어지는 까닭에 다시 끊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망념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알아차림이 더딜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조사들이 놓고 깨달았지 들고 깨달은 경우는 드뭅니다. 범부들은 모두 마음이 있어서 부처가 되려 하고 법을 깨닫고자 하며 해탈하여 3계를 벗어나고자 합니다. 3계가 무엇입니까? 한 생각 탐내는 마음이 욕계이고,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색계이며, 한 생각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로서 바로 마음 안의 살림살이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탐진치를 여의지 않은 채 구하는 마음, 들고 있는 마음으로는 어긋납니다. 법은 문자도 여의고 인(因)에도 속하지 않고 연(緣)에도 있지 않으며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고 입만 뻥긋해도 벌써 어긋나 버립니다.
옛적에 한 처녀가 훌륭한 배우자 만나기를 간절히 염원하던 중 부모의 권유로『법화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어찌나 열심히 했던지 때로는 밥 먹는 것도 잊고 잠자는 것도 잊은 채『법화경』‘관세음보살 보문품’을 염송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인기척이 이상해서 부모가 방문을 살짝 열어 보았더니 딸이 경전을 마구 던지고 일부는 밟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깜짝 놀라서 까닭을 물으니, 딸이 말하기를 “반야가 반야를 밟고 있는데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부모는 선지식을 찾아갔고 자초자종을 들은 선지식은 다른 얘기는 없었는지 물었습니다. 부모가 “깜깜한 밤중에 까마귀소리를 들으니 나기 전의 어머니가 그립다”는 딸의 게송을 전했습니다. 까마귀 소리는 삼매 속에서 들려온 자신의 독경소리를 의미합니다. 딸이 깨닫기 일보직전에 이르렀음을 직감한 선지식은 그녀를 데려오게 하여 몇 마디 일러 주었고 딸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떤 방편이든지 열심히 해야 합니다. 화두를 들어도 열심히 들고 일체를 놓아도 철저하게 놓으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야 됩니다.
요즈음 수행자들 가운데 입으로는 도(道)를 말하면서도 마음으로는 퇴굴심(退屈心)을 내어 범부는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불법을 배우지만 의심이 많아서 정법을 흐려놓으니 자신뿐 아니라 나까지 그르치게 됩니다. 믿음의 뿌리가 약한 자는 영영 깨칠 기약이 없습니다.
만약 스스로의 마음이 부처임을 믿지 않고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닦지 아니하면 부처되는 종자를 끊는 까닭에 점점 더 멀어집니다. 지혜로운 자가 보물 있는 곳을 알고도 찾지 않은 채 가난함을 원망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보물을 얻고자 한다면 몸뚱아리를 포함한 오온(五蘊)이 나라는 착각을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글 박지원 기자(현대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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