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수행으로 이분법 넘은 절대자유 맛볼 수 있어
발제: 수불 스님
참선은 반야지혜를 통해 내면의 무명을 밝힐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단도직입적으로 진리 당처의 핵심 오의(奧義:매우 깊은 뜻)를 곧바로 드러내게 한다. 禪이 현실 속에 등장함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리석은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善과 惡으로 나누어진 이분법적인 사회윤리를 넘어서서 선과 악을 둘로 보지 않는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참선 수행을 통해 눈앞에 보이지 않게 가로놓여진 정신적인 벽을 깨트리고 절대자유를 맛볼 수 있어야 한다.
중국 선종(禪宗)은 인도의 28대 조사이자 중국에서는 첫 번째 조사인 보리달마로부터 시작됐다. 실질적으로 조사선은 육조혜능(六祖惠能) 선사가 제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조 선사는 모든 사람이 본래 지닌 자성(自性)을 직시해 바로 그 자리에서 몰록 깨치는 돈오 견성(見性)을 천명했다. 중국의 선종이 면면히 흐를 수 있었던 것은 육조께서 이러한 돈오선법을 온몸으로 펼쳐냈기 때문이다.
조사선이란 깨달음을 완성한 역대 조사들이 본래 갖춰져 있는 성품을 바로 눈앞에서 들어내 보여주신 법문이다. 이 법문으로 말(言)의 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자리에서 한 생각 돌이켜 스스로의 성품이 본래 부처임을 명확히 깨달으면,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재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일단의 일은 선지식, 즉 명안종사(明眼宗師)의 점검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모든 선어록에서 볼 수 있듯이 선종 특히 조사선계통은 종사가 제자를 지도하는데 있어 지사문의(指事問義)의 방법으로 이뤄졌다. 그 과제와 내용은 스승과 제자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정법의 안목을 체득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답들이 어록으로 기록되고 전승돼, 宋代에 이르러 본칙공안(정형화된 1700공안)으로 완성됐다.
간화선은 南宋代의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가 묵조사선(默照邪禪)의 무사안일한 적정주의(寂靜主義)에 빠진 당시의 상황을 개탄해 주창했다. 간화선은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깨달은 기연(機緣)과 상대방을 깨닫게 한 인연 등이 기록된 것을 근거로 해서 정해진 본칙공안 중 하나를 들어 철두철미하게 의심되어진 화두를 들게 함으로써 돈오하게 한 수행방법이다. 즉, 조사스님들이 법을 거량하거나 선문답을 해서 깨닫게 한 판례(判例)를 본칙공안이라 하고, 이를 통해 의심이 돈발(頓發)한 것을 화두를 들게 하는 것, 즉 참 의심을 불러일으켜 깨닫도록 한 것이 간화선인 것이다.
조사선에서는 공안 그 자체가 화두라고 할 수 있지만, 간화선에서는 ‘공안에서 비롯된 의심’이 화두이다.
간화(看話)란 말 그대로 ‘화두를 지켜본다(의심한다).’라는 뜻이다. 간화선에서 화두는 공안과 엄격하게 구분돼야 한다. 공안이 단순하게 판례집에 기록된 선대의 선문답이라면, 화두는 특정한 공안이 개인의 내면에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자기 문제로 의심화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활구(活句)가 되지 못하고 단순하게 지나가 버리는 공허한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어떻게 수행하도록 이끌어야 실제로 돈오를 체험케 할 것인가? 간화선은 어떤 원리와 실제에 의해 운용되는가? 깨달음으로 가는 장치는 어떻게 시설되는가? 소납은 지난 20여 년 동안 1만여 대중들을 대상으로 간화선 수행을 지도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간화선이야말로 대중화 할 수 있고 또 마땅히 대중화돼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안국선원에서는 간화선 수행을 하러온 사람에게 화두를 들게 하기 전에, 먼저 초심자 법문을 들려준다. 참선수행을 하기 전에 종교를 믿어야 하는 이유와 수행의 필요성에 대해 스스로 납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는 지극한 마음으로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참선수행에 임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간화선 수행을 하려는 초심자에게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는 선지식과 이 수행법에 대한 큰 믿음(大信心)이다. 수행자가 선지식에 대한 큰 믿음이 없다면 자기가 가진 선입견과 알음알이로 인해 이후 화두 참구 중에 발생하는 각종 경계를 이겨낼 수 없다. 오직 결정된 믿음(決定信) 만이 이 공부를 성취하게 해줄 수 있다.
수행자에게 필요한 두 번째 요소는 이 벽을 꼭 뚫고야 말겠다는 대분심(大憤心)이다. 실제로 은산철벽에 부딪쳐보면 아무리 애를 써도 쉽게 뚫을 수 없기 때문에, 애간장이 타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막막하고 갑갑하며 끝도 보이지 않아서, 울분이 솟아나고 오기도 발동한다. 그럴 때 선지식이 공부 길을 부추기면 꽉 막힌 기운이 천지 분간 못하고 치솟게 되는 법이다. 이 분심이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터져 나와야 용맹스런 추진력이 생겨 눈앞의 철벽을 뚫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수행자는 천군만마 속에 단기필마로 쳐들어간 장수처럼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세 번째로 필요한 요소는 활구 의심이 들려져야 한다는 점이다. 수행자는 마땅히 본 참 공안 상에 나아가 의심을 일으키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의심되어진 화두를 들고 참구해야, 생사심(生死心)을 타파할 수 있다.
이렇게 간화선 수행을 하는데 꼭 필요한 신심, 분심, 의심을 간화선의 삼요(三要)라고 한다. 일단 이 세 가지 요소가 구비되면, 즉 신심과 분심이 충만한 상태에서 활구(活句)를 들고 의심하면, 그 의심은 단기간 내에 타파될 수밖에 없다. 중국 송말 원초(宋末元初)에 살았던 고봉원묘(高峰原妙) 선사는 <선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선하는데 만일 한정된 날짜에 공을 이루려면 마치 천길 우물에 빠졌을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밤이나 낮이나 천 생각 만 생각이 오로지 다만 한낱 우물에서 나오려는 마음뿐이고 끝끝내 결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이 하여라. 진실로 이렇게 공부하기를 혹은 3일 혹은 5일 혹은 7일하고도 깨치지 못한다면 고봉은 오늘 큰 망어를 범했으므로 영원히 혀를 뽑아 밭을 가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간화선은 조사선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두 수행법 모두 그 근본 원리는 동일하다. 즉 수행자는 의심에 걸려야 하고, 그것이 점점 커져서 온몸에 꽉 차면, 시절인연을 만나 타파되면서 돈오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선지식이 공안을 통해 초심자에게 화두를 걸어주고 결국 타파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간화선 수행이 현실 속에서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잘 맞는다.
현재 안국선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간화선 수행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각자에게 손가락을 튕겨보라고 한 뒤에 문제를 제시한다.
“이렇게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손가락이 하는 것도, 내가 하는 것도, 마음이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문제를 듣고 보았다면 문제에 따른 답만 찾으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문제를 따라 답을 알려고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면,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이 마음 속에 걸리게 된다. 무엇인지 모를 답답한 기운이 수행자의 안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그런 기운이 왜 생겼겠는가? 마치 목마른 자가 물 찾다가, 물을 만나지 못하면 목만 더 마르게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 현상이다. 답답하니 알려고 해야 하고, 알려고 하면 할수록 궁금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와 같이 되었을 때 계속해서 답을 찾고 찾으면서 끝까지 이 답답함을 놓치지 않고 온몸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들려진 활구 의심을 참구하라고 선지식은 수행자를 다그치게 되는 것이다.
공부 중에는 혼침이 가장 무섭기 때문에 앉아 있을 때는 눈을 뜨고 화두를 들고 졸리면 누워서 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려고만 하면 깨우는 기운이 있어 잠을 자지 못하게 한다면 더 이상 자려하지 말고 일어나 앉아서 최선을 다해 화두를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앉아 있을 때 5분 정도 눈을 감았다가 뜰 수는 있어도 그 이상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공부가 되는 것 같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눈을 뜨고 공부를 지어 나가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산란심, 즉 번뇌 망상이 일어나더라도 무시하고 내버려 두라고 말해준다. 번뇌 망상을 없애고 공부하려 하지 말고, 같이 동행하되 화두에만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문제와 더불어 의심되어진 그 갑갑함이 바로 활구의심인 것이다. 이렇게 잡 들여진 화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지금 화두가 들려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해준다. “알약을 먹으면 그대로 있나? 몸에 들어가면 녹아버린다. 약이 몸 밖으로 나간 게 아니라, 몸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화두 의심도 같은 이치다. 선지식이 문제를 던졌을 때 답을 모르니까, 그 문제가 온몸에 퍼져 의심화된 것이다. 그러니 그 의심화 된 것을 계속 집중하고 추궁하라. 내면으로 돌이켜 자꾸 살펴서 한 덩어리가 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참구할 때, 어떤 역순경계가 나타나더라도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두고 그럴수록 화두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안국선원에서는 화두 참구하는 수행자를 향해 “머리에 불붙은 것처럼 공부하라.” 혹은 “가시 달린 쇠 채찍을 맞는 아픔을 느낄 정도로 뼈저리게 공부하라.”는 입장을 그대로 공부 중에 수용할 수 있도록 수시로 독려한다. 또 수행자를 격발시키기를 “생사를 걸고 은산철벽을 깨뜨리려는 수행자가 무슨 거문고 줄을 고르듯이 앉아 있을 여유가 있겠는가? 처음부터 선지식을 의지해서 공부하는 수행자라면 거문고 줄이 끊어져도 좋다는 식으로 참구해야 한다.”고 말해준다.
참고로 많은 수행자들이 따르고 있는 “거문고 줄 고르듯이 하라.”는 것을 비유해서 말하자면 팽이를 칠 때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때려서 최선을 다해서 정중동(靜中動)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일단 정중동이 된 뒤에는 치지 않고 지켜보는 것처럼 거문고 줄 고르듯이 하라는 말이다.
수행자는 시종일관 답을 찾는데 혼신의 힘을 경주해야 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공안의 문제는 이미 제시됐는데, 왜 답을 찾은 일을 하지 않느냐?”이다.
일념이 만년이 되도록 집중해서 답을 찾으려고 하다보면 정신적인 벽이 계속해서 앞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 때 머리로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오직 온몸으로 그 벽을 향해 더욱 더 화두에 집중해서 부딪쳐가야 된다. 집중하면 할수록, 공부를 방해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게 된다. 어떤 방해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화두에만 집중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만일 화두에 집중하지 않고 방해 받는 것을 없애고 공부하려면 방해는 없어지지 않는다. 방해가 일어나던지 없어지던지 내버려두고 화두에 집중하다보면 방해는 저절로 사라진다.
참구 중에 눈앞에 밝은 빛이나 형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갑자기 전혀 알 수 없었던 공안이 이해되기도 한다. 이 같은 것은 모두 경계이므로 학인은 경계를 가져 깨달음으로 오인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이번 병통도 옆에 선지식을 모시고 공부하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만일 혼자 수행하다가 이런 경계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선지식을 만나 뵙고 점검을 받아야 한다. 답을 찾다가 활구의심이 익어지면 화두를 굳이 들려하지 않아도 들려지고, 내려놓으려고 해도 놓아지지 않게 된다.
화두의심이 회광반조(回光返照) 되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아서 안과 밖이 그대로 화두와 더불어 한 덩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인연 따라 내면의 경계는 맑고 고요하더라도 화두 기운 따라서 목과 명치가 꽉 막혀 숨도 쉬기 어려울 지경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할 때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뎌내야 한다. 온몸 타성일편(他成一片) 되어 의단이 독로(獨露)하게 되면, 곧 시절인연을 따라서 안목이 열리게 된다고 했다.
의단이 독로되어 안팎이 한 덩어리가 되면, 곧 시절인연 따라 마른하늘에 벼락 치듯, 매미 허물 벗듯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통쾌하고 시원하며 가벼운 것이 마치 나무통을 맨 테가 ‘팍’하고 터지는 것처럼 문득의단을 타파하게 된다.
대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이 일단의 일을 알 수가 없어 그렇게 갑갑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텅 비게 된다. 온 몸과 마음이 새의 깃털보다 가볍고, 앞뒤가 탁 트인 것이 끝 간 데가 없이 시원하고, 평생 짊어지고 다니던 짐을 일거에 내려놓아 홀가분해진다.
이와 같은 시절인연은 직접 체험해 봐야 알 수 있다. 그런 연후에 속히 눈 맑은 선지식을 찾아가 점검받고, 뒷일을 부촉 받아야만 한다는 점을 명심해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간화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보다 정확한 선학적인 근거가 필요하며 동시에 이 바탕 위에서 화두 의심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타파해야 한다. 간화선은 앉아있음 만으로 선을 삼는 묵조선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제기됐음에도, 간화선의 정신에 입각한 동정일여(動靜一如)의 수행방법보다는 단지 오래 앉아있는 것만으로 수행을 삼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묵조선의 무리와 다를 바가 없다. 한국의 간화선이 만약 선정주의에 치우친다면 올바른 지견(知見)을 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혜쌍수의 수행전통에도 위배된다.
결제 · 해제 법문 때, 법문은 조사선 입장으로 하면서 수행은 간화선으로 하라고 요구한다면 그 수행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날 법문을 듣는 수행자들에게 간화선에 대한 활발하고 직접적인 방법을 제시해서 활구를 의심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화두참구를 지도할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눈 밝은 선지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리고 종단차원에서 간화선 수행만 전문으로 할 수 있는 특별한 수행공간을 마련하고 간화선 연구원을 더 많이 키워내야 한다.
어떤 수행보다도 간화선 수행이 한국불교의 기복적이고 비불교적인 행위를 극복할 수 있는 미래불교의 새로운 대안이라는 점을 명심해서, 간화선과 화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참 의심을 불러일으켜 올바르게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장치해야 할 것이다.
조계종단의 수행체제가 보다 완벽하게 구비될 때, 한국불교 세계화의 실현 가능성도 한층 높아질 것이며, 세계인에게 간화선 수행을 통한 정신적 이익을 나누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리 = 조동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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