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정기연(參請機緣)
세상 사람들이 다 전하기를 ‘남쪽은 혜능이요 북쪽은 신수’라고 하나, 아직 근본 사유를 모르는 말이니라. 또한 신수 선사는 형남부 당양현 옥천사에 주지하며 수행하고, 혜능 대사는 소주성 동쪽 35리 떨어진 조계산에 머무르니, 법은 한 종宗이나 사람에게 남쪽과 북쪽이 달라서 이로 말미암아 남쪽과 북쪽이 이뤄지게 됐느니라.
어떤 것을 점(漸)과 돈(頓)이라고 하는가?
법은 한 가지이나, 견해가 더디고 빠름이 있기 때문이니 견해가 더디면 바로 점(漸)이요 견해가 빠르면 바로 돈(頓)이니라. 법에는 점과 돈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는 까닭으로 ‘점’과 ‘돈’이라 이름한 것이니라.
신수 스님이 지성 스님을 불러 말했다.
“그대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니 나를 위해 조계산으로 가서 혜능 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예배하고 듣기만 하되, 내가 보내서 왔다 하지 말아라. 들은 대로 그 뜻을 기억해 돌아와서 나에게 말해라. 그래서 혜능 스님의 견해와 나와 누가 빠르고 더딘지를 보게 하여라.”
지성은 즉시 조계산으로가 혜능 대사의 법문을 듣고 그 말끝에 문득 깨달아 바로 본래의 마음에 계합했다.
“대사이시여, 제자는 옥천사에서 왔습니다. 신수 스님 밑에서는 깨닫지 못했으나 대사님의 법문을 듣고 본래의 마음에 계합했습니다. 대사께서는 자비로써 가르쳐 주시기 바라옵니다.”
대사께서 말씀했다.
“그대의 스승이 가르치는 계·정·혜는 어떤 것인지 나에게 말해 주기를 바라노라.”
“신수 대사는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을 계라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라고 하며, 스스로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함을 정이라고 합니다. 신수 대사의 말씀은 그러 하온대, 대사의 의견은 어떠하신지 알지 못합니다.”
“마음 바탕에 그릇됨이 없음이 자성(自性)의 계(戒)요, 마음 바탕에 어지러움이 없음이 자성의 정(定)이며, 마음 바탕에 어리석음이 없음이 자성의 혜(慧)이니라. 계·정·혜는 작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요, 나의 계·정·혜는 높은 근기의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니, 자기의 성품을 깨달으면 계·정·혜도 세우지 않느니라.”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법달이라 했다. 7년간 <법화경>을 외웠으나 마음이 미혹해 바른 법의 당처(當處)를 알지 못하더니 와서 물었다.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대사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오니 의심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께서 말했다.
“법달이여,<법화경>에는 많은 말씀이 없나이, 7권 모두 비유와 인연 말씀이니라.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三乘)을 말씀하심은, 다만 세상 사람들의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함이며, 경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승(乘)이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한 불승(佛乘)뿐이라’고 하셨느니라.”
“사람의 마음이 헤아리지 않으면 본래의 근원이 비고 고요해 삿된 견해를 떠나나니 이것이 바로 일대사인연이니라.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바로 양변(兩邊)을 떠나니라.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空)에 집착하나니, 모양에서 상(相)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나는 것이 미혹하지 않는 것이며,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니라.”
“법달이여, 마음으로 행하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을 신회라고 했으며 남양사람이다. 조계산에 와서 예배하고 물었다.
“대사님께서는 좌선하기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습니까?”
대사께서 일어나서 신회를 세 차례 때리시고 나서 신회에게 물었다.
“내가 그대를 때렸는데, 아프냐 아프지 않으냐?”
신회가 대답했다.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육조 스님께서 말했다.
“그대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한다 했는데 어떤 것이냐?”
신회가 대답했다.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곧 무정인 나무와 돌과 같고, 아프다 하면 범부와 같아서 이내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대사께서 말했다.
“신회여,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邊)이요, 아프고 아프지 않음은 생멸(生滅)이니라. 그대는 자성을 보지도 못하면서 감히 와서 남을 희롱하려 하는가?”
“그대 마음이 미혹해 자성을 보지 못하면서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을지니, 마음을 깨달아서 스스로 자성을 보게 되면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여라. 그대가 스스로 미혹해 자기 마음을 보기 못하면서 도리어 혜능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는 것은 내 스스로 아는 것이라 그대의 미혹함을 대신 할 수 없느니라. 만약 그대가 스스로 본다면 나의 미혹함을 대신하겠느냐? 어찌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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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정기연(參請機緣)은 다섯 단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남돈북점(南頓北漸) 사상입니다. 두 번째는 신수 스님이 지성 스님을 조계산으로 보내 혜능 스님의 법문을 듣고 다시 자신에게 그 법문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는 법달이라는 사람이 육조 스님과 <법화경>의 세계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장입니다. 네 번째가 <법화경> ‘방편품’의 최상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신회라는 사람과 육조 스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육조단경>에서 선문답의 형식이 가장 많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부처님은 <가정경>에서 아라한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아라한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가장 사람다운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의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답변을 했지만, 부처님은 아라한의 대답을 제일로 쳤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도 깨닫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라는 것 또한 깨달은 사람, 진리를 안다는 것입니다. 중국 신화에는 선지식을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착한 벗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과 참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사람과 참사람을 어떻게 구분할까요? 사람은 눈 · 귀 · 코 · 입 · 몸 · 뜻에 이끌려 사는 것이라면, 참사람은 색깔 · 소리 · 냄새 · 맛 · 촉감 · 분별에 자유로움을 의미합니다.
혜능 선사는 사람과 참사람의 차이를 <법화경>에 굴림을 당하는 사람과 <법화경>을 굴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장자는 참사람에 대해 여러 차례 강조했는데, 참사람은 무위진인(無爲眞人)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무위진인은 말 그대로 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할 일이 없다는 사람은 어떠한 것에도 헐떡이거나 흔들이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임제 선사는 <임제록>에서 참사람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며, 차별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혜능 스님은 조계산의 보림사에서 법을 펴고 있었습니다. 육조 혜능이 머무는 보림사는 남중국에 있었고, 신수 스님의 옥천사는 북중국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남능북수(南能北秀)라고 불렀습니다. 혜능 스님은 단박에 깨달음에 이르는 법을 펴고 있다고 해서 돈종(頓宗)이라 하고, 신수 스님은 점차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고 해서 점종(漸宗)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분별심을 일으켜 남돈북점(南頓北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법(진리)에는 돈, 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람에 따라 돈과 점이 나눠질 뿐입니다.
혜능 선사는 사람과 참사람을 점(漸)과 돈(頓)으로 구분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같은 사람이지만 근기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진리에는 점돈(漸頓)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는 까닭으로 점과 돈이라 이름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성 스님의 계(戒) · 정(定) · 혜(慧)에 대한 물음에도 ‘마음바탕에 그릇됨이 없음이 자성(自性)의 계요, 마음바탕에 어지러움이 없음이 자성의 정이며, 마음바탕에 어리석음이 없음이 자성의 혜이다’라며 자기의 성품을 깨달으면 그 자리가 곧 계 · 정 · 혜가 완성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혜능 스님은 법달과 <법화경> 공부에 대한 답변에서도 <법화경>에 담긴 뜻을 마음으로 녹여 <법화경>과 하나 됨을 강조하며, <법화경>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되지 말고 <법화경>을 자유로이 굴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삼승(三乘)에는 성문승(聲聞乘) · 연각승(緣覺乘) · 보살승(菩薩乘)이 있습니다. 성문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는 교법이며, 연각승은 스승 없이 홀로 깨닫는 가르침으로서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관하고 또는 다른 인연에 의해 깨닫는 가르침입니다. 보살승은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보리심을 발해 불도에 입하고 사홍서원을 발해 육도만행(六度萬行)을 수하여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증오하는 가르침입니다.
성문(聲聞) · 연각(緣覺) · 보살(菩薩)의 삼승(三乘)에서도 혜능 스님은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나눠 설명할 뿐 셋이 아닌 하나로서 최상승인 불승(佛乘)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대승경전에서 만날 수 있는 숱한 부처님의 각기 다른 이름이 진리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투신, 여럿이 곧 하나이며 문수와 보현이 둘이 아닌 하나요, 관음과 지장이 둘이 아니 하나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킬과 하이드가 둘이 아닌 하나이듯, 마음을 떠난 부처가 따로 없으며 생활을 떠나 진리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중국의 처휘진적(處輝眞寂) 스님이 깨달음을 이뤄 첫 설법을 하기 위해 법상에 앉아 있을 때입니다. 많은 대중들 사이에서 한 동자승이 일어나 당돌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첫 설법을 하셨을 때는 황금빛 연꽃이 땅에서 솟아 나왔다고 합니다. 오늘 스님의 첫 설법에는 무슨 상서로운 조짐이라도 있었는지요?”
스님은 법상 위에서 빙그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지금 막 문 밖의 눈을 쓸었네.”
어느 날 제가 머무는 사자암에 신도들이 몰려와
“고승이 죽으면 상서로운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데 먼 훗날 스님이 죽으면 어떤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신도들의 기대에 당연히 상서로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동쪽에서 해가 떠올라 서쪽으로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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