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생각이 화근
‘나’가 있다는 생각에서 불안과 공포가 나옵니다.
만약 ‘나’라는 관념이 없다면 두려움도 있을 리 없고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고정된 이름의 나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내가 어떠했고, 내가 어떠해야 하고, 내가 어떠하리라는 식으로 나를 고정되게 생각합니다.
그래 놓고는 그 생각에 갇혀 옴짝달싹 못합니다.
자기가 배웠고, 자기가 알고, 자기가 다 한다고 하니까 아집, 아상이 딱 눈을 가리는 것입니다.
물질세계에 젖은 관념, 관습으로 머리가 굳어져서 물질만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근본 뿌리의 세계, 마음의 세계는 아예 보이질 않고 보려고도 하질 않습니다.
그러나 가는 길만 알고 오는 길을 모른다면 반쪽이듯이,
양면의 작용을 다 모른다면 내가 다 아노라 해도 고작 50%를 넘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문젯거리가 앞길을 딱 막아서면 손을 써 볼 길이 막막해지는 것입니다.
나의 소유, 나의 생각. 나의 명예,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 내 사랑, 나의 자존심…….
이런 것이 있어야만 나를 지킬 수 있다고 믿어 점점 더 방벽을 두텁게, 높게 쌓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벽이 두터워질수록, 높아질수록 내 마음은 추워지고 옹졸해지고, 내 삶은 불행해집니다.
그 방벽은 나를 보호하는 방벽이 아니라 나를 가두는 방벽이기 때문입니다.
벽이 높으니 시원한 솔바람을 쏘일 수도 없고, 밝은 태양을 만끽할 수도 없습니다.
일체 만물은 물론이고 내 자생중생도 다 한마음으로 돌아가는데 그걸 믿지 않고 괜스레 내가 했다,
나로소이다 하니까 안 돌아 가는 것입니다.
가령 만 명이 힘을 합쳐서 돌아가면 손쉽게 될 일도 내가 혼자 한다고 하면 그게 되겠습니까?
죽어라 힘만 들고 항상 걱정이 꼬리를 물게 될 뿐이지요.
매사에 더불어 같이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자기가 산다, 자기가 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산다고 하고 내가 했다는 생각을 하고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항상 남의 탓을 하고 상대방을 원망하게 되거든요.
내 몸뚱이 하나도 더불어 같이 사는 인생인데 하물며 이 우주 천하가 다 더불어 같이 살지 어떻게 혼자 삽니까?
그러니 ‘나’라는 것부터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상은 참으로 뿌리가 질기고 깊습니다.
비유하지면 저 아카시아 뿌리보다도 질깁니다. 잘라 내도 잘라 내도 새 움이 돋고 새 뿌리가 자랍니다.
이만하면 되었지 싶다가도 돌아서면 어느새 아만, 아상이 고개를 듭니다.
오죽 질기고 뿌리 깊으면 육신이 죽은 뒤에도 남아서 지옥과 극락을 왕래하고 새 몸을 찾아 헤매겠습니까?
그래서 ‘나’가 죽는 공부는 철두철미해야 합니다.
부처님을 조어장부調御丈夫라고 하는 것은 아상을 뿌리째 뽑아내어 완전히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하루 24시간 살아가면서 ‘내가 했노라.’ 하고 따지기로 하면 도대체 몇 가지나 될 거라고 보십니까?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로 놓고 가는 것이지 따지기는 뭘 따지겠습니까? 따지다가는 걸리는 것, 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 한번 마음에 매듭이 지면 풀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짓지 말고 놓고 가라는 것입니다.
흘러온 것은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찰나찰나로 고정됨이 없이 돌고 도는 것을 억지로 고정됐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찰나에 의식도 흐르고 생명도 흐르고 물질도 흐르고 있습니다.
고정된 모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나’라는 생각으로 고정시키려 하고 내 것으로 고정시키려 하니 고苦가 따릅니다.
변치 않는 것은 고정됨이 없다는 사실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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