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을 응시함 * 자기의 탐구 人生의 諸 問題를 根本的으로 解決하기 위하여 佛敎는 人間을 깊이 응시하고 그 實態를 밝히기를 要求한다. 人間을
응시함에는 여러 가지 觀點이 있다. 예를 들어 自然科學의 입장에서는 우선 觀察者로서의 人間과 皮 觀察者인 人間이 確然하게 區別되지 않으면 안
된다. 觀察者의 主觀이 介入됨이 없이 冷嚴하게 대상을 보고 分析하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客觀的인 사실이 解答으로서 提示된다. 물론 觀點이 變하면
觀察하는 部分도 그 解答도 다르게 된다.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으나, 生物分類學의 側面에서 말하면 人間은 哺乳類로서 內臟을 構成하는 여러
機關의 生理學的인 活動을 觀察하게 되어 전혀 다른 結論이 導出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각각 人間의 眞實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
科學뿐만이 아니라 社會科學 分野 및 藝術, 文學의 分野에서도 人間을 觀察하고 그 眞實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가 무수히 많다. 그러나 主 ‧ 客을
分離하여 살펴본 結果는 어떠한 觀點을 전제로 하여 成立되는 眞實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는 말하자면 制限된 眞實에 지나지 않는다. 制限된 智識을
아무리 結合하여도 생생히 살아있는 人間에 대한 참된 앎에 이를 수는 없다. 佛敎의 觀心은 自身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問題이다. 그러한
이상, 人間을 응시함이 人間 一般을 대상화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自己에게 나타나 있는 人間의 本性을 自己와 聯關하여 보는 것이다. 그것은
端的으로 自己를 보는 것이다. 이를 거꾸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석존은 늙음(老), 병듦(病), 죽음(死)으로 대표되는 人間의 苦痛을 自身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解決하기 위하여 自身을 觀察하였다. 苦行을 하고 禪定에 잠겼던 것도 結局은 自己의 本性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깨달음이 열리고 自己의 本性이 把握되었지만, 이 自己는 단지 自身만의 自己는 아니었다. 自身도 포함된 人間의 普遍的 眞實이 把握되었던 것이다.
時代, 場所, 性別, 知性 등에 관계없이, 人間이 人間인 이상 누구에게나 妥當한 普遍的 眞實이 發見되었던 것이다. 自己가 自己를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살결이 희다.’등의 觀察은 여기에서는 아무런 意味가 없다. 이는 自身의 知性으로써 自身의 一部를 客觀的으로 보는 것으로,
앞에서 말한 一般的인 觀察과 하등 다를 점이 없다. 慾望을 일으키고 思考하고 自我를 내세우는 自身을 있는 그대로 全體的으로 把握하는 것, 결국
觀察하는 自身과 觀察되는 自身이 하나가 되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事物을 보고 觀察하는데 知性, 分別을 使用한다. 知性은 主客分離를
바탕으로 하여 作用한다. 그러나 우리는 自身의 存在를 主觀과 客觀이 나누어지지 않은 狀態에서 보아야 한다. 과연 이러한 觀察은 가능한가. 이를
實現한 사람이 석존이며, 그의 가르침 즉 佛敎를 傳한 대대의 祖師들의 宗敎體驗이 그러하다. 이는 後代의 禪僧의 말을 빌리면 확실히 百尺竿頭에서
한 걸음 내딛는 것, 또는 절벽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소생함에 비교될 수 있는 宗敎的 體驗이다. 우리가 하루하루의 生活에서 當然한 것으로 여기는
見解, 思考方式을 버림으로써 나타나는 知慧, 이는 知性 ‧ 分別의 結果로서의 智識은 아니다. 이는 無分別의 知慧이며, 깨달음의 知慧이다. 般若의
知慧도 바로 이것이다. 또한 이는 人間을 포함한 萬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如實히 보는 知慧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