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의 대화

인간을 응시함

혜주 慧柱 2005. 7. 18. 21:14

연기(緣起)와 무상(無常)

그러면 無分別의 知慧에 의해 보이는 人間의 眞實은 어떠한가. 이것은‘緣起’라는 말로 表現된다. 緣起는 人間을 포함한 萬物이‘여러 가지 다른 것과의 關係에 의하여 생김’을 말한다. 내가 지금 여기에 바로 나로 存在하는 것은 나 自身만의 힘으로써도 아니며, 自身의 意志에 의한 것도 아니다. 父母가 存在하며, 祖父母가 存在하고, 친구 ‧ 知人 ‧ 社會가 存在함으로써 그리고 수많은 人間, 事物과의 복잡한 關係 속에서 내가 成長하고 生活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내가 있는 것이다. 물론 自身의 自由意志는 있지만, 自身의 意志에 따라 自由롭게 될 수 있는 部分은 極히 적다. 自身의 自由意志를 發한다고 하는 그 自體가 오히려 나의 意志와 關係없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山과 江, 植物도 마찬가지이다. 一切의 것이 正確히 알 수 없는 수많은 現狀, 事物, 生物이 關聯되어 지금 여기에 存在한다. 人間도 事物도 모두 緣起生이라는 것이 釋尊이 把握한 眞實의 內容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예를 들어 神과 같은 創造主는 없다. 佛敎가 無神論이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事實은 萬物이 因緣에 따라 生滅한다는 表現으로 說明되기도 한다. 因은‘原因’이며, 緣은 그 原因이 어떠한 結果를 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되는 外的인‘條件’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原因, 여러 가지 條件이 結合되어 지금 여기에 存在한다. 새로운 原因, 새로운 條件이 생기면 우리는 그에 따라 變化한다. 그러므로 병들고 늙고 때에 이르면 죽는다. 이러한 점에서 佛敎의 眞理觀은 상당히 冷嚴하다. 人間의 생각과 感情에 左右되지 않으며, 모든 것이 科學에서 말하는 因果律과 같은‘關係性’속에 存在하고는 다음 순간 變한다. 그러나 佛敎에서는 具體的으로 무엇이 原因이며, 무엇이 條件인가에 대해서는 追求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를 成立시키고 있는 하나의 原因은 다른 原因의 結果이며, 그 原因에는 그에 先行하는 또 하나의 原因이 있다. 이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宇宙의 第一 原因에까지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 釋尊은 이것이 人間의 知性으로써 알 수 있는 問題가 아니며, 이를 追求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 하여 排斥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갖가지 不安, 괴로움에 젖어 있는 自己 問題의 解決이다. 이를 위해서는 必然的으로‘지금 여기에 나타나 있는’事實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로 부터 解決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思惟方法은 無常이라는 말로 表現되는 事實과도 關聯되어 있다. 一切가 緣起生이며 因緣生이라면, 그리고 항상 새로운 因과 緣이 附加된다면, 이는 항상 變하고 있음을 말한다. 無常이므로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同時에 無常이기 때문에 사람은 태어나고 成長할 수 있다. 人生과 自然은 모두 無常하다. 이를 諸行無常이라고 한다. 따라서 無常과 緣起는 同一한 事實을 달리 表現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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