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의 대화

화두 참선에 대한 옳바른 이해

혜주 慧柱 2005. 8. 10. 21:40
< *STYLE>body { background-image:url(http://mytheme.net/zboard/data/wall_etc/Anything_nice.jpg);background-attachment: fixed;background-repeat: no-repeat;background-position: center; }table { background-color: transparent; }td { background-color: transparent; }< */STYLE> 화두 의심에대한 옳바른 이해 . 내게 이미 잇는 마음이 잇으되 모르니 생각이 저절로 끊어져 간다. 그러나 작용을 통하여 알게 한다. 배가 고플 때 스스로 배가 고픈줄을 아는 이 마음이 그 마음이 아닌가 ! 또한 우리가 소변기에다 소변을 볼때 저절로 몸안에 소변이 차면 소변을 보러 화장실을 찾지 않는 가 ! 그리고 스스로 쉬,, 이.... 하면서 소변을 내 놓을 줄도 알지 않는 가 ! 뉘 이렇게 조화를 부리는 가 ! 이렇게 하고 있을 때 내 생각이 섞혀져 있는 가 ! 생각이 전혀 섞혀 짐 이라곤 없지 않는 가 ! 스스로 일어 나고 잇는 일 아닌가 ! 이 무엇의 조화 인가 ! 그러면서 소변을 내 놓을 줄 알고 잇으니 ! 알지만 형상 속에서 안보이니 의심이 잇는 것이다. 이말은 우리들에 自性 은 형상속에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말이다. 이것을 바로 해 가고 있는 사람은 이때를 처 했을 때 반듯이 생각이 끊어진 상태에 있다. 의단 만 있다. 마음이란 말도 걷어 나가져 있어서 의심이란 말이 의단으로 바꾸어 져도 무리가 없다. 이 의단이 더 조촐해 지면 의단 독로가 된다. 아는 생각은 와ㄴ전히 끊어져 있다. 우리가 쓰는 말을 가지고 와 보면 오직 알 수가 없을 뿐이다. 끝에 가서도 不識 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모를 수 있는 것 ! 그러면서 잇는 것 ! 이것은 아는것을 알게도 하고 배고프면 배고 픈 줄 알게도 하고, 화가 나면 화가 난 줄도 알게 한다. 화 난 줄도 알지만은 화 난것에 속해 있지 않다. 배고픈것에도 속해 잇지 않다. 견문 각지를 대 하돼 견문 각지에도 속해 잇지를 않다. 사량이란 이미 끊어져 버려서 그옆에 엄두도 못 낸다. 그래서 알고 들어가는 것은 감히 되겠는가 ! 모든 공부인들이 말로 희롱을 하나 희롱을 할 수가 없는 것이어서 언어에 구애를 받는 것이 아니다. 말을 떠낫다고 해 언어 도단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말 들도 실참이 없는 이에게는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시작 해야 하는 것이다. 중생에 생각은 바람에 날리는 것이어서 이공부에는 못 쓰는 것이다. 그냥 믿고 들어 가야 한다. 사람에 따라 이런 말을 자주 들어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자리 잡지를 못 하고 있는 것은 사람을 못 만나서 그렇다. 사람은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형상을 어떻게 믿겟는 가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공부를 해 본사람은 형상 속에서 형상이 아닌 줄 알고 잇기 때문에 믿어도 되는 것이다. 형상 속에서 형상이 아닌 줄 아는 사람은 날마다 형상이 없는 곳에서 형사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미ㄷ음이 잇는 자에게는 형상과 형상이 아닌 사이를 쉽게 구별해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가 잇다. 그래서 형상을 가지고 형상에 물들어 있지 않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과 일생이라고 했다. 보리 달마께서 말이다. 어록을 보고 공부 함은 크게 히유한 일이며 자가 당착에 빠지기가 진흙속에다 발을 묻어 두었다가 발을 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는 것은 순간 순간을 중생속에서 일어나는 영악한 마음 을 스승께서는 허락 하지 를 않는다. 왜냐 ? 스승 주변에서는 영악 한 마음 같은 것은 얼신도 못 하기 때문이다. 중새ㅇ심이 쉬어진다. 돌아 봄이 자주 온다. 그대로 서 잇는 시간을 갖기가 쉬워 진다. 공부길로 들어 가기가 쉽다 혼자서 어록을 보고 믿고 알아 스스로 인정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것 같지만 경계와 사물을 접 하면 꿈속에서 혼자 해 놓은 것이어서 아무 짝에도 못쓴다 이 공부는 알고 모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듯이 믿음으로 시작 해야 한다. 그래야 공이 생기며 그 찔긴 아는 생각을 내러 놓을 수가 잇다. 스승과 함께 말이다. 추신: 서로 붙어 의지하나 , 의지 하자 마자 놓아 지는 것, 그러니 무너져 버리는 것, 무너져 버리니 빈 것만 남 는 것, 비어 있으면서 작용을 통해서 보이는 것, 알 수없는 것, ! 어떻게 해아릴 수 잇겠는 가 ! 아예 그런 생각을 접어야 한다. 알고 접어야 한다. 접하고 나니 들떠 있는 생각들이 가라 앉으며 가라 안즈니 묘용만 잇되, 알 수 없는 것 ! 알 수 없으니 의심만 있는 것, 여기에는 눈이 없어 의정만 있을 뿐 보여지는 것이 없으며 듣는 거ㅅ도 없으며 해아림은 더더욱없는 것이다. 그래서 의심만 잇으니 이것을 의단이라고 한다. 오고 가도 의단 뿐이다.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사뭇처도 의정만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실참을 거치지 않고는 識 에 붙들려 있는 것이니 없는데 떨어지고 있는데 떨어져 양쪽을 왕래 하며 바쁘기만 하니 해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으니 한가 한 사람이며 한가하니 사물을 대 하는것도 한가하여 사물로 부터 자유 로우며 지식을 머리에 이고 지고 댕기지를 않는다. 이 사람은 눈을 가지고 잇되 눈을 쓰지 않느다.귀로 듣되 귀를 쓰지 않는 다.의식을 쓰되 의식에 붙들림이 없다. 옛것과 지금것에 혼돈이 전혀 없다. 중생과 부처를 둘로 보지 않으며,중새ㅇ을 보되 낯낯히 보며 중생과 부처가 따로 떨어져 있다고 보지 않는 다 .중생속에 부처가 있다. 그러나 중새ㅇ은 부처를 스스로 등지고 있을 뿐이다.그러나 부처는 그렇게 보지를 않는 다.중생이 같이 잇음을 본다.번뇌 망상도 같이 있음을 본다. 그러나 중생은 번뇌 망상만 잇고 부처가 잇는 줄 모른다. 번뇌 망상에 붙들려 잇어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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