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방문인참문어록과 부처님말씀등

6, 즐겁고 평화로운 행복한 삶

혜주 慧柱 2006. 12. 25. 17:06
 

즐겁고 평화로운 행복한 삶 - 열반



내가 가진 괴로움과 불만족은 어떤 조건 때문에 생긴 것이며, 그 조건들을 없애기만 하면 괴로움과 불만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그럼 괴로움과 불만족을 벗어난 삶은 어떨까 궁금합니다. 물론 ‘행복한 삶’이라고 한마디로 말하면 될 듯싶지만, 행복이란 것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룩하시고, 또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괴로움과 불만족이 없는 경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봐야겠습니다. 목표를 분명히 알아야 그곳을 향해 나아갈 의욕도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괴로움과 불만족이 없다는 것은 소극적인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요? 한없는 쾌락이 있을까요? 모든 것을 다 가지는 한없는 충족이 있을까요?

나는 이런 의문을 가지고 찾아 들어갑니다. 그런데 조금 실망스럽고 충격적인 답을 듣습니다. 모든 괴로움과 불만족에서 해방된 궁극적 진리는 열반(涅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열반이라?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열반에 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죽음 비슷한 것이 궁극의 목표란 말인가요? 이런 의심 속에 계속해서 부정적인 표현들이 들어옵니다.

저건 따라 있는 것이 모두 고요해지고, 모든 더러움을 포기하고, 목마름을 소멸하고, 떠나고, 그치는 그것이 열반이다.

목마름의 소멸, 그것이 열반이다.


뭐 좋습니다. 불만족스러움과 괴로움이 일어나는 조건이 목마름과 무지에 있다면, 그것을 그치고 소멸시키는 것이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겠지요. 우리가 탐욕을 버리고 애착을 버리면 괴로움과 불만족도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흔히 마음을 비운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겠지요. 일단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적극적인 행복을 바랍니다. 그런데 열반이라는 말에는 그런 소극적인 의미는 없고, 그저 욕망이나 목마름의 소멸만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열반이라는 말, 그것과 연결시킨다면 삶의 에너지를 모두 없애라는 것과 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불만족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좋지만, 적극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픈 나의 목적과는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파고들어 봅니다. 그리고 발견합니다. 열반이란 것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부처님이나 큰스님들의 죽음을 열반이라 하는 것은 죽어서 어떤 열반이라는 세계로 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은 이미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열반이라 하는 것은 과거 업의 마지막 찌꺼기인 몸까지 버렸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며, 열반이라는 것은 다른 어떤 세계가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 그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열반은 수행의 결과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 자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어떤 딴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궁극적 진리를 깨달았을 때, 바로 그것이 열반인 것입니다. 열반이 어떤 결과로 얻어진 것이라면, 그것 또한 원인과 결과라는 사슬에 조건 지어진 것이고, 따라서 파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반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최고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거기에는 모든 잘못된 앎과 목마름이 사라지며, 당연히 그것으로부터 오는 괴로움과 불만족이라는 병도 사라집니다. 그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열반은 죽어서 도달하는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이 삶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궁극적인 진리를 꼭 목마름의 소멸이라든가 고요해지고 멈춘다는 식의 부정적인 말로만 표현했는지에 대해서 부처님의 답을 듣게 됩니다. “열반이란 즐거움이다.”라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해 보십시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꼭 자기 알음알이대로 오해를 해서 욕망 충족에서 오는 쾌락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최고의 진리는 어떤 것으로도 한정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 의미에 한계가 있습니다. 의미에 한계가 말을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한정될 수 없는 그 진리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고기에게 아무리 걷는다는 것을 설명해줘도 결국 물고기는 지느러미 흔드는 것밖에 연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오해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이 없다”, “~이 소멸 한다”는 식의 부정적인 표현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열반을 성취한 분들의 삶을 묘사한 데에는 생생하게 열반의 적극적인 의미들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우선 부처님이 ‘항상 미소 지으시는 이’라고 불리셨던 것도, 열반을 성취한 위대한 인격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불교가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고 한다 하여 불교를 믿는 이들이 뭔가 우울하고 심각한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한다면, 이는 큰 착각입니다. 진정한 불자라면 행복해야합니다. 재난에 불안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항상 평화롭고 즐거워야 합니다. 그들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괴로움을 바르게 보고 그것을 떠나기 시작한 이들입니다.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의 왕은 열반을 성취하거나 열반을 지향하는 불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다른 종교의 제자들이 수척하고, 천박하고, 창백하며, 야위고, 호감이 없어 보이는 것과 달리, 즐거움이 가득하여 고취되어 있으며, 정진하는 생활을 즐기며, 쾌활하고, 번민에서 벗어났으며, 청아하고, 평화롭고, 날랜 양과 같은 가뿐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나는 이제 확신합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정적인 말들로 표현했지만 열반이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칙칙하고 우울하거나, 우리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는 냉소주의는 부처님 가르침 속에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은 활기차고 행복에 넘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