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
최근에 칸 영화제에서, 우리나라의 영화, 밀양이 여우주연상을 받았죠!
전도연씨가 신애역을 맡았는데, 영화에 보면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신애는 어린 아들과 함께 밀양으로 가죠.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정착하고자 했는데, 사랑하는 아들이 유괴를 당해 마침내 처참하게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너무나 힘든 고통 속에서 교회를 다니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되고, 그래서 아들의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서 교도소로 면회를 갑니다. 그런데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어야 할 살인범이 너무나도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보였던 거예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미 교도소에서 하나님께 눈물로써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기에 하루하루를 평온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지낸다는 얘기였죠.
“아니, 이미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고?”
신애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겁니다. 피해 당사자인 내가 이제야 겨우 고통에서 벗어나 어렵사리 용서해 주고자 큰마음 먹고 왔는데, 벌써 하나님하고 계산이 끝나 버렸다니 피해 당사자인 나를 제쳐 놓고, 어떻게 용서를 주고받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거예요. 모든 것, 즉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아들이 유괴를 당해서 처참히 살해당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살인을 한 흉악범을 용서해 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 하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꼬물거리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인가? 나의 자유 의지란 없는 것인가? 당연히 이런 문제점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화가 상을 받게 된 데는 물론 뛰어난 여배우의 연기력이 인정받았던 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영화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점이야말로 현대 유럽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이라고 하는 것이죠.
역사상으로 중세유럽은 신본주의시대였습니다. 신본주의는 신이 근본인 것입니다. 모든 가치의 중심이 신에 있고, 신이 주인입니다. 신을 주인님으로 섬기니까, 인간은 자연히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신의 충실한 종으로 신을 섬기면서 살다 죽어야 하고, 하늘나라에 가서도 신의 종으로 사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죠. 종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주인님의 뜻대로 해야 되는 것이죠. 잘되는 것도 주인님의 뜻이요, 못되는 것도 주인님의 뜻입니다. 이렇다 보니 결국 인간의 역사는 암흑시대로써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산업이 발달하면서 마침내 재화가 근본이 되는 자본주의시대가 도래하는데, 자본주의의 資(자)자는 바로 재물 자입니다. 돈을 뜻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모든 가치의 중심에 신 대신 돈이 자리 잡게 되었고, 돈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인간이 돈에 종노릇을 자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황금만능주의시대가 도래한 것이죠. 우리는 이제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인간이나 나를 위해서, 신이나 돈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이나 돈을 위해서 인간이나 내가 존재하는 것인지. 과연 내가 신이나 돈의 종노릇해야 옳은 것인지, 주인 노릇해야 옳은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자기야 말로 자신의 주인공임을 알기◈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부처님 뜻이라거나, 신의 뜻이라거나, 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나 신을 주인으로 섬기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주인은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죠. 법구경에 보면 이러한 글귀가 나옵니다.
자기야 말로 자신의 주인, 어떤 주인이 따로 있으랴. 자기를 잘 다룰 때 얻기 힘든 주인을 얻은 것이다.
이거야 말로 불교의 핵심사상을 여실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죠. 밖에서 주인을 찾는 것, 그것은 하늘나라가 되었던, 신이 되었던, 재물이 되었던, 무엇이던, 밖에서 주인님, 주님을 찾고, 나는 그것의 종노릇을 자처하는 것, 이야 말로 미신(迷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은 주인이 아닙니다. 위대한 스승이자 후원자일 따름입니다. 스폰서이죠. 스승이나 후원자는 나를 가르치고 도와줄 수 있지만 나를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올바른 신앙은, 자기야 말로 자신의 주인! 나에게 주어진 몸과 마음을 잘 써 나가는 것, 자기를 잘 다루는 것, 이거야 말로 진정한 주인을 얻은 것이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데요.
“다른데서는 신을 믿기만 하면 알아서 다해 주시는데 얼마나 편하고 좋습니까? 근데 불교는 복잡하기도 하고, 공부를 해야 된다고 하니 왜 그럽니까?”
“그래요? 알아서 다 해 주신다고요? 정말 그렇습니까?”
그래서 제가 되물어 한번 질문 하겠습니다.
“신이 대신 밥 먹어 줄 수 있습니까? 대신 잠자줄 수 있습니까? 대신 행복해 줄 수 있습니까? 대신 돈 벌어 줄 수 있습니까?”
이렇게 일상적인 것도 대신해 줄 수 없으면서 뭐를 준다는 겁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노병사를 절대로 대신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이죠. 나대신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줄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무엇을 알아서 해 준다는 겁니까? 하찮은 심부름정도의 것 아니면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지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어요. 내가 무언가를 할 때 그것을 도와줄 수는 있을지언정 알아서 해 주신다면 이거야 말로 미혹한 신앙이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노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거죠.
◈ 인(因) × 연(緣) = 과(果) ◈
불교에서는 인연설(因緣說)을 주장합니다. 인(因) × 연(緣) = 과(果)다.
왼손과 오른손 바닥을 딱하고 부닥치면 ‘짝’하고 소리가 납니다. 박수소리죠.
왼손은 인이고, 오른손이 연이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인은 직접적 원인이고 주관적 요인이며, 연은 간접적 원인이고 객관적 요인입니다. 예를 들면 인은 나 자신의 마음가짐이나 노력을 말하는 것이고, 연은 주변의 상황이나 불보살님의 가피, 신의 은총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현재 나의 노력이 100만큼이고, 주변 상황도 100만큼 충실하다면, 결과는 100×100 = 만점이 나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노력이 100만큼이라고 해도 주변 상황이나 시대적 배경, 이런 것들이 50만큼 밖에 안 된다면 100×50 = 5,000점 밖에 안 되는 것이죠. 이와는 반대로 주변 조건이 100만큼이라 하더라도 나의 노력이 50밖에 안 되면 이것도 역시 50×100 해서 5000점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충실한 결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인과 연이 모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연은 다시 말해 주변 상황 등은 사실 과거의 나의 인에 의해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의 마음가짐이나 노력 등에 의해서 현재의 주변 상황이나 배경이 결정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현재의 나의 주변상황, 이런 것들이 마음에 맞지 않는다면, 또 미래에는 다른 연을 만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현재의 인을 바꾸어야 합니다. 현재의 연을 탓해봐야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과거에 내가 지은 인이기 때문에 결국 나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창조합니다. 지금 이 모습도 나의 작품일 뿐.
만약 지금 이 모습이 부처님작품이라면 부처님이 고칠 수 있겠죠. 신의 작품이라면 신이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나는 속수무책입니다. 그저 부처님이나 신의 관대한 처분만을 기다리면서 눈치나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구걸형 기도밖엔 없다고 하는 것이죠.
구걸형 기도라는 것은, ‘부자가 되게 해 주세요.’, ‘건강하게 해 주세요.’, ‘시험에 합격하게 해 주세요.’, ‘재수가 좋게 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해 주세요.’, ‘해 주세요.’ 하고 빌어대는 것을 말합니다.
잘 되었건, 못 되었건, 일단 내 작품이라고 인정하면 내가 고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발원형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죠. ‘적당히 먹고, 적당히 운동하고, 마음을 닦겠습니다.’, ‘열심히 벌어서 알뜰히 쓰겠습니다.’, ‘공부를 꾸준히 해서 실력 발휘하겠습니다.’, ‘나는 억세게 재수 좋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하겠다.’, ‘하겠습니다.’라는 다짐을 하면서, ‘지켜봐 주시고 도와주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인연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박수소리는 분명히 내가 만들었습니다. 내 작품이죠. 나의 왼손과 오른손이 만나서 생긴 것이고,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사라집니다. 결국 소리자체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인과 연이 닿으면 홀연히 생겼다가, 인과 연이 다하면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죠. 영원히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기는 있지만 찰라, 찰라 변해가면서 있다는 것이죠. 이것을 불교에서는 공사상(空思想)이라고 하고, 중도설(中道設)이라고 하기도 하고, 연기설(緣起說)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핵심 교리 인연설(因緣設)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설명은, 말하자면 교과서적 해석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禪)에서는 이렇게 자세히 설명 안합니다. 곧바로 들이댑니다. 양손 바닥을 마주치면 손뼉소리가 난다. 이 소리를 듣는 성품은 어떤 건가? 어떻게 생겼는가? 한번 내 놓아보아라.
◈소리를 듣고 있는 이 성품이 어떤 걸까? 어떻게 생겼을까?◈
짝, 짝, 짝.
양손바닥을 마주치면 이와 같이 소리가 납니다. 이를 듣고 우리는 손뼉소리라 하는데, 사실은 이 소리는 귀가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방 안의 괘종시계는 계속 쉬지 않고 소리를 내고 있지만, 방안에 있는 우리는 그 소리를 계속 듣지는 않습니다. 계속 들리지 않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죠. 우리가 다른 데 몰두하고 있다거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거나, 하면 시계소리는 더 이상 안 들립니다. 시계소리는 계속 나고 있었으나 나는 그 소리가 왜 안 들렸을까? 이걸 잘 생각해 둬야 됩니다. 만약에 귀로 듣는 것이라면 소리는 계속 나고 있고, 귀도 계속 열려 있기 때문에 24시간 계속 들려야 되는데 그것이 안 들리는 것은 내가 마음을 맞춰야만 들린다고 하는 것이죠.
잠 잘 때도 그렇습니다. 잠자는 동안에는 우리는 눈을 감고, 귀도 잠시 그 역할을 멈추고 있죠. 그런데 우리가 잠 속에서, 꿈속에서도 보고 듣고를 다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어째서 눈을 감고 자면서도 꿈속에서 다 보고 듣고 하겠습니까? 우리의 눈과 귀는 다만 매개체 역할을 할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고 듣는 것은 눈과 귀가 아니라 바로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성품, 실제로 보고 듣는 이 성품이라는 것, 본마음이라는 것, 마음이라는 것, 이것은 도대체 어떤 걸까? 어떻게 생겼을까?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 비로소 몸뚱이 착(着)을 쉬고, 육도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죽어서도 여전히 몸뚱이를 받고 또 받아서 해탈을 기약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이죠. 소리를 듣고 있는 이 성품이 어떤 걸까? 어떻게 생겼을까? 이 문제를 깊이 참구하고 답변을 하도록 노력해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참선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이죠.
◈ 즐거운 참선 ◈
참선은 즐겁게 해야 되며, 수단과 목적이 이원화되지 않은 수행법이므로 참선을 하면서 먼저 유의할 점은 수행이라는 수단을 통해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중생지견(衆生知見)에 묶어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죠. 자기 스스로를 ‘나는 아직 못 깨친 중생이야. 각고의 수행을 통해서 언젠가는 내가 깨친 부처가 되겠지.’ 이렇게 바라는 거예요. 자기 스스로를 ‘나는 못 깨친 중생이다.’ 이렇게 묶어 버리는 한, 누구도 풀어줄 수가 없는 겁니다.
자승자박이라고 하는 것이죠. 자기가 묶은 줄, 자기가 풀어야 됩니다. 혹 남이 풀어주더라도 일순간 자기가 바로 또 묶어버립니다. 지금 비록 여러 가지로 미흡하고 부족한 점이 많다고 하더라도, ‘나는 본래 부처다.’ 이렇게 확신을 갖고 출발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예를 들어 100만 원짜리 수표가 있다고 합시다. 비록 구겨지거나 또는 오염됐다고 해서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빳빳한 새 수표나, 구겨진 수표나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 살 땐 똑같이 100만원어치 밖에 못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번뇌 망상으로 아무리 오염되고 찌들려 있다 하여도 우리의 본래 부처로서의 성품자리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지견(佛知見)을 여는 것입니다. 불지견은 “본래 부처”라 하는 그런 소견에 기초한 수행이 바로 참선입니다. 이것은 불오염의 수행, 청정한 본연의 자성자리에 입각한 수행인 것입니다.
오염수와 불오염수의 차이를 잘 알아야 참선의 특징을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염수(汚染修)라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은 뭔가에 찌들어 있고 오염되었으니 이를 닦아야 된다.’하는 이런 마음가짐이 중생지견에서 출발하는 수행입니다. 불오염수(不汚染修)는 그게 아닙니다. 내 몸과 마음은 비록 찌들거나 오염된 거 같으나 나의 본마음 참나 자리는 한 번도 오염된 적이 없다. 여기에서 입각한 수행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로 지금 여기에서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이 자체로써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깨달음조차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죠. 가부좌 틀고 화두를 잡고 있는 이 순간이야말로 최상의 순간이다. 극락에 간다고 한들 이 보다 더 즐거울 수 있으랴.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수행을 하다 보면 표정은 자연히 편안해지고 몸과 마음의 긴장도 해소가 됩니다. 그래야 큰 부작용 없이 참선을 오래도록 즐길 수 있는 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운동을 한다고 합시다. 우리가 미래에 건강해지기 위해서 물론 하겠지만, 운동을 하고 있는 자체가 즐거워야 운동을 꾸준히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죠. 화두 참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의 깨침에만 마음이 가 있어서 억지로 용을 써서 하는 참선은 옳지 않고, 조급한 마음이 생기며는 오히려 부작용이 생깁니다. 인상을 찌푸리고 용을 써서 앉아 있으면 오던 깨달음도 달아납니다.
왜냐? 깨달음의 세계는 밝고 즐겁고 청정한 세계이기 때문이죠. 바로 지금 여기에서 밝고 즐겁게 수행할 때, 밝고 즐거운 깨달음이 훌쩍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즐거운 마음을 연습해야 즐거운 일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죠.
자~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경허스님 참선곡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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