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이 집을 짓고 한 생각이 집을 허문다.
2008년 5월 4일 설법전 점안식
여기 모인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이렇게 훌륭한 설법전이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한 생각을 어떻게 내는가에 따라서 이런 집도 세울 수 있고 또 있던 집도 허물 수 있습니다.
한 생각을 어떻게 내는가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갈림길입니다.
세상의 끔찍한 범죄도 한순간 생각을 어둡게 갖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세상을 밝히는 선행도 한순간 마음을 밝게 지녔기 때문에 좋은 빛을 발하게 됩니다.
내 마음이고 내가 하는 생각이지만 삶을 통해 그 마음과 생각을 어떻게 갖는가가 중요합니다.
생각을 밝게 가지면 내 삶이 밝아지고, 한순간 무엇인가에 휩쓸려 생각을 어둡게 가지면 내 삶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집니다.
마음은 먼 데서 찾아지지 않습니다. 바로 내 안에 늘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밖에서 찾고, 다른 대상에서 찾기 때문에 그 마음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거듭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일상의 삶을 통해 한 생각을 어떻게 먹는가에 의해 우리들 삶이 달라집니다.
저는 점안식을 할 때마다 경건해야 하는데도 속으로 웃음이 나옵니다. 점안식 때는 팥을 던집니다. 잡귀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또 붓에 먹을 찍어 부처님 눈동자에다 점을 찍는 시늉을 하고, 솔가지 가지고 물을 뿌립니다.
저는 풋중 시절에 처음 이 의식을 보고 속으로 매우 경악하면서 ‘야, 이거 불교도 무속이구나!’ 했는데 지내면서 보니까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불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적인 의식에는 이렇듯 무속적인 요소가 있고 그 나름대로 다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여기 이 부처님은 ‘불상’입니다.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예수님이 처형당했던 형틀의 모습입니다.
불상이나 십자가라는 하나의 형상, 외부에 나타나는 형상을 섬기는 것이 곧 우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매개물을 통해 실상을 볼 수 있다면 그 매개물은 단순한 우상이 아니게 됩니다.
원래 부처님 시대에 불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금방 불상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인상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그 당시 제자들은 감히 부처님 형상을 만들어서 예배하자는 생각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참 지내다 보니까, 어떤 상징물이 필요했습니다.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서 수행해 그곳에서 부처가 되었습니다.
이제 부처님이 안 계시고 너무 허전하니까 보리수나무에 대한 신앙이 생겨납니다.
또한 부처님의 법문과 설법을 상징하는 법륜法輪으로써 부처님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리고 45년 동안 여기저기 다니면서 가르침을 편 상징으로서 부처님 발바닥을 새겨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제자들이 부처님을 연상할 수 있는 간절한 매개물로서 보리수나 법륜,
부처님 발바닥 또는 부처님이 앉아서 설법한 좌대 등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불상은 외형만 가지고 보면 하나의 우상이지만 실상에서 보면,
다시 말해 이러한 매개물을 통해 부처의 실체를 우리 스스로가 인식하게 되면 결코 단순한 사물이 아닙니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적멸보궁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적멸보궁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의 진신 사리 모신 곳을 적멸보궁이라 부릅니다. 한국에도 몇 군데 있습니다.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 양산 통도사, 태백산 정암사 등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셨다고 해서 법당에 다른 불상을 설치하지 않습니다.
좌대 같은 것만 놓아두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곳을 일러 적멸보궁이라고 합니다.
지극히 고요해서 맑고 투명한 보배로운 궁전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 계신 자리를 매우 신성시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바쁘기 때문에 수고롭게 적멸보궁에 다닐 수 없습니다.
오늘 여기 설법전 부처님 점안식에 동참하는 인연으로 이 자리에서 저마다 마음속에 하나의 적멸보궁을 세우십시오.
지극히 고요하고 맑고 투명해서 보배로운 궁전을.
바깥에 있는 부처를 찾자 마십시오. 우리 자신이 곧 부처입니다.
마음속에 적멸보궁을 세워 늘 지니고 있다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크게 빗나가지 않습니다.
마음에 중심이 없기 때문에 바깥 현상들에 늘 흔들리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행사도 그렇습니다. 이 외부의 행사를 통해 내 삶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이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늘 자신의 삶 쪽으로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인연으로 저마다 마음속에 적멸보궁을 지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사가 결코 허망하거나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이 있기에 무슨 일이 닥쳐도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과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인연으로 새롭게 마음속에 적멸보궁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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