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자체가 하나의 기적
2008년 4월 20일 봄 정기법회
그간 평안들 하셨습니까? 제가 한 70여 년 이 육신을 끌고 다녔더니 부품이 삐걱거려서 정비 공장에 들어가 정비 좀 하노라고 한 동안 이 자리를 비웠습니다.
여러 가지로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봄이 되니까 알레르기성 천식이 또 찾아와서 밤낮으로 기침을 하게 만듭니다.
말하는 도중에 기침이 나오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산과 강과 대지에 초록이 물들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무수한 생명들이 꽃을 피우고 잎을 펼쳐 내는 이 눈부신 봄날, 여러분과 이 장소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 같지만,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고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 자체는 실제로 죽지 않는 것이지만, 개체로 보면 단 하나 뿐입니다.
우리가 가족과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와서 이러한 생명의 존엄성이 크게 손상되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어린 생명들을 유괴해 폭행을 가하고 죽입니다.
이유 없이 무작위로 살해합니다. 생명을 다루는 농경사회에서는 감히 생각조차 해 볼 수 없던 끔찍한 일입니다.
씨를 뿌려 새 움이 돋고, 또 어린 싹들이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우리 안에서 생명의 소중함이 같이 움틉니다.
그런 농경사회에서 살다가 흙을 멀리하고 도시에서,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에서 살다 보니까 인성人性이
너무 메말라져서 인간의 설자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옛날보다 소득은 훨씬 많고 가전제품도 많어 편리하게 살고 있지만 인간의 존엄성은 어렵게 살던 그 시절에 비해 훨씬 추락했습니다.
육신은 흉기로 살해할 수 있지만 생명의 근원인 영혼은 그 무엇을 가지고도 죽일 수 없습니다.
남을 죽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이 될 뿐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인간들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겉모습은 다를지라도 수많은 생명체들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어울려 함께 살아갑니다.
균형과 조화로 생명의 연결고리인 생태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이 땅의 생태계기 커다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땅이고 강이고 어느 한 곳 성한 데가 없습니다. 허물고 파헤쳐져 대지가 피를 흘리면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가운데 정부가 은밀히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은 이 땅의 무수한 생명체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끔찍한 재앙입니다.
대지는 한두 사람의 생각만으로 허물고 파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어떤 정책과 권력으로도 이 땅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 국토는 오랜 역사 속에서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영혼이고 살이고 뼈입니다.
그리고 우리만 살다 갈 곳이 아니라 후손에까지 물려줄 신성한 땅입니다.
대운하를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 신성한 대지에 대한 무례함이고 모독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이 땅은 무기물, 바위나 흙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많은 생명체들이 함께 이 땅을 이루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강은 이리 구불 저리 구불, 굽이굽이마다 자연스럽게 흘러야 합니다.
강을 직선으로 만들고, 깊은 웅덩이를 파서 물이 흘러가지 못하도록 채워 넣고,
강변에 콘크리트 제방을 쌓아 놓으면 그것은 결코 살아 있는 강이 아닙니다.
그리고 갈수록 잦아지는 국지성 호우는 토막 난 각각의 수로에 범람을 일으켜 홍수 피해를 가중시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1920년대 미국 플로리다 운하가 완공되자마자 홍수가 범람해 2천여 명이 떼죽음을 당한 참사가 있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은 운하의 위험성을 드러냅니다.
운하에는 물을 항상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에 갑작스런 폭우 때 강이 범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청계천과 운하는 그 뜻이 전혀 다릅니다.
청계천은 이미 있었던 개천을 복원한 것이고, 한반도 대운하는 멀쩡한 우리 국토를 허물고 파헤치고 토막 내겠다는 지극히 반자연적인 무모한 계획입니다.
일찍이 없었던 이런 위험한 국책 사업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커다란 재앙이 일어날 것입니다.
제가 몸의 부품을 수리하면서 느낀 소감을 이 자리에서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살 만큼 살면 늙습니다. 또한 때가 되면 다 죽습니다.
영원히 산 사람은 없습니다. 앓고 나면 철이 든다더니 새삼스럽게 둘레의 모든 사람들이 고맙습니다.
저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사물들이 새삼스럽게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죽을병이 아닐 경우에는 앓을 만큼 앓으면 낫습니다. 치료하면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50일이 넘도록 거의 단식 상태였습니다.
저를 간호한 사람들은 갈비뼈만 앙상히 남은 제 모습이 마치 6년 고행한 부처님 같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의 체중이 45킬로그램을 조금 넘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앓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날그날을 즐겁게 살자.’ 내일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서, 눈부신 봄날 이렇게 마주 앉아 오랜만에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지만 내일 일을 누가 압니까?
하루하루를 잘 살고, 후회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이 활짝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가족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일터에서의 관계…… 늘 관계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실제로는 잘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내가 활짝 열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은 쉽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극복하기 어려운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과 작별할 것이다.’
‘내일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할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이때, 내가 나를 비워야 한다. 타인과의 매듭을 풀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철저히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마음의 메아리가 전달되어 상대방의 마음도 풀립니다.
이 바쁜 날, 이 좋은 날, 우리가 절에 와서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세상을 보다 지혜롭고 너그럽게 사는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문제는 내가 내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이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절에서 흔히 마음을 찾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참선하고 염불할 때, 마음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우선은 눈에 보여야 찾을 것 아닙니까? 지극히 관념적인 소리입니다.
마음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찾는 일보다 용심用心, 내가 내 마음을 제대로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온전하게 쓸 줄 알 때 내 마음이 열리고, 잘못 쓰면 겹겹으로 닫힙니다.
순간순간 마음을 열고 산다면 둘레의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나를 반깁니다. 나를 받아들입니다.
이 사바세계에 어려운 일 없는 이가 어디 있으며, 어려운 일 없는 집안이 어디 있습니까?
어려운 일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것이 이 삶입니다.
이번에 앓으면서 속으로 또 느낀 것이 이것입니다.
‘왜 내가 이 나이에 이렇게 중병에 걸려 치료받아야 할까?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남들은 앓는데 나만 앓지 않는다면 나 자신이 더없이 오만해집니다.
이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면 언젠가는 다 병을 앓게 마련입니다. 생로병사의 숙명입니다.
‘좋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인간으로나 수행자로나 보다 성숙해지리라.’
이런 생각으로 투병하니까,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이 마음을 여유롭게 합니다.
달마達磨 스님의 법문 <관심론>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마음, 마음이여, 알 수가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구나.”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온 세상을 다 용납하다가도 마음이 한번 뒤틀려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본심本心, 본마음이고,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이 옹색하고 뒤틀린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닙니다.
따라서 빨리 비워야 합니다. 뒤틀린 마음을 지니고 있는 나는 본래의 내가 아닙니다. 빨리 비우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삶 속에서 마음 쓰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참선하고 염불하고 경전 읽는 것도 내가 내 마음을 바르고 온전하게 쓰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수행을 통해 내가 내 마음을 활짝 열고 살기 위함입니다. 그 밖의 결과를 바라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삶이 학교이고 배움입니다.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배우게 됩니다. 그때 삶의 묘미를 스스로 터득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순간순간 살고 있습니다. 이 매 순간을 깨어서 활짝 열린 마음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사는 일 자체가 즐겁고 기뻐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도 매듭이 풀리고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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