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복을 입은 도둑들
2007년 10월 21일 가을 정기법회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서기가 몹시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최근 불교 종단 일각에서 주지 자리를 놓고 다투는 작태가 알려짐에 따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대해 실로 면목이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부모 형제와 살던 집을 등지고 출가했는지 거듭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지 자리를 놓고 다투는 이유는 한마디로 출가 정신의 부재에 있습니다.
출가란 단순히 집에서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갖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남을 뜻합니다.
매 순간 참선하고 기도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니고 있다면 결코 세속적인 유혹이나 욕망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안팎으로 자신을 갈고닦지 않고 수행 정진하지 않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비리에 물들기 쉽습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승가의 생명은 청정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극한 마음으로 청정 승가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청정성을 잃었을 때는 더 이상 승가가 아닙니다.
참선과 기도에 몰입하는 수행자의 모습은 실로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수행하고 있는 그 일 말고는 어떤 욕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수행을 통해서 자유와 평안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만일 겉으로만 수행자 차림을 하고 속으로는 돈이나 명예를 생각한다면 그는 누가 보아도 결코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그에게서 무지와 욕망의 기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불자가 아니라 가사袈裟 입은 도둑입니다.
서산西山 스님의 <선가귀감 禪家龜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수행승은 초야에 묻혀 사는 시골 선비만도 못하다.”
부처님 당시에도 지금과 유사한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부처님이 통탄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도둑들이 내 옷을 꾸며 입고 부처를 팔아 온갖 악업을 짓고 있는가?”
불쾌한 소리는 그만하고, 오늘은 날씨가 참 좋습니다. 산과 들이 아름답게 물들고, 단풍 구경 가는 사람들이 휴게소마다 넘치고 있습니다.
번잡한 일상사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는 일은 우리들의 삶에 커다란 위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삶에 아름다움이 없으면 너무 삭막하고 건조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돈과 관계된 것에만 눈을 파느라고, 경제 생각만 하느라고 삶의 가장 내밀한 영역인 아름다움을 등지고 삽니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삶의 기쁨이고 행복에 이르는 길목입니다.
아름다움을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들 삶이 아름다움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행복은 아름다움이 그 삶을 받쳐 주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을까?
제가 봉은사奉恩寺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무슨 글을 읽다가 자극을 받아 백자 항아리를 하나 갖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인사동에 가서 아는 사람을 통해 옛날 항아리를 하나 구했습니다. 약간 금이 갔지만 며칠 동안은 매우 애지중지했습니다.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불을 켜고 들여다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니까 거기 항아리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조차 없어졌습니다.
항아리 자체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남도 갖고 있으니 나도 하나 갖고 싶다는 욕심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결코 소유할 수 없습니다. 남이 가졌다고 해서 충동적으로 가지려고 하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가 몇 해 전 경기도 광주에 있는 어느 도예가의 작업장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서 유약을 바르지 않고 천연 그대로 구워 놓은 항아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유심히 보는 제 눈길을 느꼈던지 주인장이 선뜻 저한테 안겨 주었습니다.
그 항아리는 지금까지 곁에 두고 보고 있습니다.
욕심이 나서가 아니라 저절로 반해서 좋아했기 때문에 지금도 늘 곁에 두고 있으며 그 항아리에서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 풍겨 나옵니다.
제 마음이 무척 정결해 집니다.
하나의 조그마한 항아리이지만 욕심을 갖지 않고 텅 빈 마음으로 보니까 그 아름다움, 그 항아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수시로 캐낼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소유물이 아니라도 보는 눈과 투명한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면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투명한 감수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순수한 사랑입니다. 순수한 사랑이 없으면 아름다움을 만날 수 없습니다.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 것마다 모두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는 우리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또는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그 작곡가의 감성과 우리의 감성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음악을 들으면서도 그저 그렇다고 느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황홀경에 빠집니다.
그것은 작곡가나 연주자와 듣는 사람 자신이 일체감을 이루는가, 못 이루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물을 접했을 때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나와 그 대상이 하나가 될 때, 그 대상이 지니고 있는 가장 오묘한 아름다움을 캐낼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모든 예술품은 그것을 만든 사람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예술가도 자기 작품에 100퍼센트 온전한 아름다움을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그는 그 작품에 절반의 혼만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소장자에 의해, 감상하는 사람에 의해, 그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채워집니다.
하나의 음악이 완성을 이루려면 작곡가나 연주자와 듣는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름다움에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뜰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고 있는데 저 단풍은 작년의 것과 다릅니다.
내일은 또 다른 모습으로 있습니다. 순간순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마음껏 내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보면 그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지만,
선입견을 갖고 보거나 작년 것과 비교하거나 하면 지금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저 나무를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투명한 감수성이, 사랑이 있어야 그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마치 조각가가 아무 표정도 없는 돌덩이에서 아름다움을 캐내듯이.
임제臨濟 선사 어록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무사시귀인 단막조작無事是貴人 但莫造作.”
‘있는 그대로가 귀하다. 일부러 꾸미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존재 자체는 있는 그대로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 독특함은 누구도 모방할 수가 없습니다.
저마다 그 나름의 모습을 지니고 있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남과 비교해서 그걸 꾸미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꾸미면 가짜입니다. 천연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무엇에도 걸림 없는 자연스러움이 귀하다는 말입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 안에 조화와 균형이 갖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마다 자기 얼굴이 있습니다.
그런 자기만의 얼굴을 스스로 가꾸고 드러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그런 얼굴은 사랑의 눈으로만 인식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씨는 신용장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에, 맹목적인 유행에 속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추천장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신용장인 마음씨가 고와야 합니다.
아름다움에는 여백의 미가 있습니다. 동양화에서 여백은 그 그림의 격을 좌우할 정도입니다. 서양화에는 여백이 거의 없습니다.
덜 채워진 부분, 좀 모자라는 구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립고 아쉬움이 따라야 합니다.
이와 같은 여백의 미는 우리들 삶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가득가득 채우려고만 하면 욕망이 작용해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리지고 추해집니다.
그러나 덜 채우면 그 빈자리에 생기가 돌아서 시들지 않는 품격이 감돕니다.
세상사는 일도 그렇습니다. 가득가득 채우려는 욕망은 결국 그 스스로를 걸려 넘어지게 만듭니다.
좀 모자란 듯한 구석, 덜 채워진 구석이 있어야 사는 맛이 납니다.
아름다움에는 또 거리낌 없는 무애無碍의 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미륵반가유상’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똑같이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미륵반가사유상’에는 고요와 평안과 잔잔한 미소가 스며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 서면 저절로 고요와 평안과 미소가 우리 안에 스며듭니다.
그러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는 그러한 고요와 평안과 미소가 없습니다. 그저 무거운 고요가 감돌고 있을 뿐입니다.
직접 본 분은 아시겠지만, 파리의 로댕 박물관 뜰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은 무거운 고요 속에 굳어 있습니다.
‘미륵반가사유상’에는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데, ‘생각하는 사람’에는 이 무애의 미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는 그저 무겁고 답답하기만 할 뿐입니다.
철학자 야스퍼스가 ‘미륵반가사유상’을 보고 그토록 격찬한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사물의 아름다움이 거리낌이 없을 때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물론 그 작가의 혼이 그렇게 작용을 한 것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사유상思惟像을 통해서도 우리는 동서 문화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걸림이 없는 무애의 시를 한 편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일지 않고 달이 연못에 들어도 물에는 흔적 없네. 竹影掃階塵不動 月輪穿초水無痕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나오는 야보冶父 선사의 송頌입니다. 바람이 불어 대나무가 일렁거려서 마치 뜰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먼지 하나 일지 않습니다. 또 밤에 달이 연못 속에 들어가도 물에는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뛰어난 장인은 자취를 남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만든 작품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명인이든 도인이든 생각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면 흔적이 남습니다. 만들 때의 그 사람의 마음이 그 작품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전시회에 가서 그림이든 조각 작품이든 도자기이든 아무 고정관념 없이,
그 작가에 대한 아무 선입견 없이 빈 마음으로 보면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샘물과 같아서 아무리 퍼내도 다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꾸지 않으면 솟아나지 않습니다.
어떤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안으로 느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은 가꾸지 않으면 솟아나지 않습니다.
내 안의 샘에서 아름다움이 솟아나도록 해야 합니다.
남과 나누는 일을 통해 나 자신을 수시로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선하고 염불하고 경전을 읽는 것은 자신을 가꾸는 추상적인 일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나눔의 삶을 살아갈 때 내 안에 들어 있는 자비심이 샘솟듯 생겨납니다.
아름다움은 시들지 않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 가을에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시길 권합니다.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지내지 마십시오.
이 가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일기일회, 생애 단 한번뿐인 가을입니다. 누구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이 삶입니다.
이 가을날, 그저 대상만 보고 즐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도 샘솟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 아름다움은 남과 나누는 데서 움이 틉니다.
이 가을에 다들 아름다움을 만나고 가꾸면서 행복해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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