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집에서 빨리 나오라
2007년 5월 24일 부처님오신날
오늘을 ‘부처님오신날’이라고 합니다.
이날을 단순히 해마다 한 차례씩 있는 기념행사로 여기지 말고, 부처님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오셨는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보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오늘날 이 땅에 부처님이 생존해 계신다면 어떤 문제를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게 다룰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부처님이라면 어떤 일보다도 날로 심각해져 가는 지구환경문제가 첫 번째로 떠오를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는 환경위기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해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위기에 맞닥뜨린 것입니다.
절에 들어오면 맨 처음 배우는 원효(元曉) 스님의 <발심수행장>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첫 머리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부제불제불夫諸佛諸佛이 장엄적멸궁莊嚴寂滅宮은 어다겁해於多劫海에 사욕고행捨欲苦行이요,
중생중생衆生衆生이 윤회화택문輪廻火宅門은 어무량세於無量世에 탐욕불사貪慾不捨니라.”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 우리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욕심을 버리고 견디기 어려운 수행을 겪었기 때문이요,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끝없는 세월을 두고 탐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화경>에서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타는 집에 비유합니다.
“삼계에 편안함 없음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三界無安 猶如火宅.”
생사윤회의 근본은 탐욕에 있습니다. 탐욕이란 무엇입니까? 분수에 넘치는 욕망입니다.
오늘날 지구환경의 위기도 따지고 보면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무제한으로 퍼 쓰는 탓에 재앙이 찾아왔습니다.
지구의 재생 능력을 자정 능력이라고 하는데, 전문가들의 조사에 따르면 이 자정 능력이 1980년대 초에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해마다 인간들은 자연이 생산해 내는 것보다 20퍼센트나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낳는 이자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원금까지 빼앗아 쓰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지구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미래를 내다보고 앞일을 예견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현재 이 땅의 정치인들은 정권 잡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환경위기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미래가 달라집니다. 지구환경의 위기 앞에서 다 같이 이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현재 섦의 모습이 어떠한가에 지구의 생존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의 농경지 중 절반이 가축 사료에 쓸 작물을 만드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양의 육식 위주 식습관 때문입니다. 서양인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육식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한쪽에서는 식량이 없어서 하루에도 수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곡식의 절반을 짐승 사료로 쓰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1킬로그램의 쇠고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십만 리터의 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1킬로그램의 쇠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 십만 리터의 물이 소비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식습관 때문에 귀한 수자원이 고갈될 형편입니다.
인간들이 동물에게 가하는 행동 또한 매우 잔인하고 가혹합니다. 양계장에 한번 가 보십시오. 그곳은 닭 공장입니다.
병아리가 태어나자마자 병아리 감별사들이 수컷은 필요 없으니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암컷만 달걀을 빼먹기 위해 살립니다.
서로 쪼지 못하게 부리를 다 잘라 버립니다. 또 좁은 공간에 옴짝 못하게 가두어 놓고 3주 동안 불을 껐다 켰다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닭들이 거의 미쳐 버립니다. 인간이 닭고기를 먹기 위해, 달걀을 빼먹기 위해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대할 때 동물들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죽어 갔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소나 돼지, 개의 눈을 한번 유심히 들여다보십시오. 선하디 선한 그 눈은 우리 인간의 눈보다 훨씬 맑고 투명합니다.
모든 생물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합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현재 지구상의 벌의 숫자가 과거에 비해 40퍼센트나 감소되었다고 합니다.
휴대전화의 전자파로 인해 벌 열 마리 중 네 마리는 죽고 겨우 여섯 마리가 남는다는 것입니다.
벌이 사라지면 식물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벌이 매개 역할을 해야 식물이 열매를 맺을 텐데, 벌이 없어 가루받이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독한 농약 때문에 산중에서도 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사는 산중의 높이가 해발 800미터 정도 되는데, 여기에 예닐곱 그루의 산자두와 돌배나무가 있습니다.
돌배나무를 그쪽에서는 신배나무라고도 합니다. 이 나무들에 꽃은 무성하게 피는데 열매기 전혀 열리지 않습니다.
제가 6,7년째 목격하는 현상입니다. 제가 사는 산중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랭지에서 채소를 가꾸느라 독한 농약을 수없이 뿌려 대는 탓에 벌들이 살 수가 없습니다.
누구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만큼은 자연이 공급을 하는데, 분수에 넘치는 탐욕 앞에서는 궁핍해집니다. 탐욕을 억제하려면 소비를 줄여야 합니다.
소비를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광고에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텔레비전이든 신문이든 들여다보면 광고의 마력에 빨려 들어갑니다.
멀찍이 떨어져서 봐야 합니다. 눈만 뜨면 우리는 광고의 홍수 속에서 살아갑니다.
광고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하는 욕구를 부추깁니다.
처음에는 흔들리지 않다가도 반복해서 광고를 접하면 결국 넘어갑니다.
일단 광고에 빠져들면 구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이 아닌 마음의 평화, 즉 정신적인 데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물질의 더미 앞에서도 우리는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야 행복의 움이 트는 것이지, 물질은 한때에 불과할 뿐 우리를 영원히는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가령 시장에서 남이 안 가진 물건을 사다가 집에 놓아둬 보십시오,
며칠은 좋지만 한두 주일 지나면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쓰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물건입니다.
행복은 조화로운 삶에 있습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가장 알맞은 상태, 자기 분수에 맞는 상태입니다.
조금 아쉬운 듯 가져야 합니다. 절제의 미덕에 기반을 둔 검소한 생활 습관이 조화로운 삶을 이루고 건강한 삶을 이룹니다.
인간다운 삶을 이루려면 될 수 있는 한 물건을 적게 사용하고 간소하게 지내야 합니다. 그것이 본질적인 삶입니다.
없어도 되는 것은 갖지 마십시오. 그래야 정신이 덜 흐트러지고 자기가 지닌 것들의 소중함을 압니다.
남 주기에는 아깝고 놓아두기에는 짐스러운 물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때 필요해서 구해 놓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집니다.
이런 물건들 속에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물건은 지구상의 한정된 자원으로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공장에서 기계와 기름, 전기와 화학약품으로 생산되기 때문에 과도한 소비는 자연 훼손과 환경오염을 가져옵니다.
신발 한 컬레, 옷 한 벌, 가전제품 하나, 가구 한 가지를 만드는 데 그만큼의 매연과 산업 쓰레기와 더러운 물이 생기는 것입니다.
삶의 터전인 지구환경을 살리는 일은 국가정책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비를 억제하고 절제의 미덕을 새롭게 다져야 합니다.
끝없는 욕구인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각자의 삶에서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에 지구환경의 소생과 종말이 달려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며 우리들 삶이 보다 인간답게 자리 잡기를 거듭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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