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 용돈 20만 원
2005년 4월 17일 봄 정기법회
꽃철에 만나 뵈게 되어 더욱 반갑습니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꽃입니다.
꽃이 있으니까 봄처럼 느껴지지, 꽃이 피지 않는다면 봄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이든 집안이든 생의 꽃을 피우며 살면 축복받는 것이요, 계절이 와도 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그 개인이나 집안은 어두운 것입니다.
머지않아 가정의 달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당사자의 친구 분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올해 일흔 살 된 할아버지인데, 3년 전쯤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 아파트에서 사는데 아들 내외가 보기 안됐으니까
아파트를 팔고 자기 집으로 들어오시면 잘 모시겠다고 몇 달 동안 사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들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들어갈 때는 빈손으로 가지 않고 지참금 같은 것을 가져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동안 지내다가 어느 날 무슨 일이 있어서 아들 며느리 방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얼 찾다가 가계부가 펼쳐져 있어서 무심히 훑어보게 되었는데 ‘촌놈 용돈 2만원’이란 기록이 보이더랍니다.
자기 시아버지한테 용돈 주는 것을 ‘촌놈 용돈 2만원’이라고 한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고 그날로 그 집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저도 이 말을 전해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가정이 해체되어 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텅 빈 썰렁한 가옥만 남아 있는 집안이 많습니다. 가정이란 어떤 곳입니까?
가족이 한데 모여 오순도순 살아가는 곳입니다. 밖에 나가서 지치면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언제든지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 주고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전통적인 가정에는 가장이 있고 주부가 있고 부모님이 계시고 자식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집안을 지키고 보살피는 수호신이 있습니다.
훈김이 돌지 않으면 온전한 가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혼이 빠져나간 몸뚱이나 다름없습니다. 가족끼리 대화가 단절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극의 싹입니다. 부르고 대답하는 것이 대화가 아닙니다.
공통적인 관심사가 있고 그걸 주제로 속의 말을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자기 본위로 살아가기 때문에 가족 간 단절현상이 발생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가족끼리 서로 닮아 갑니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따로 삽니다.
왕이든 평민이든 가정에서 평화를 찾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 집에 들어와서 평온한 분위기를 누릴 수 있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회의 구성요소인 가정이 해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사회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 붕괴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릇가게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요새 그릇이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외식문화의 영향일 것입니다.
밖에 나가 먹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또 옛날과 달리 집에 손님을 거의 초대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친구끼리도 밖에서 만나지 집으로 불러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친구네가 어떻게 하고 사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연속극의 아무개 집 소식은 잘 알면서도 막상 가까이 지내는 친구의 집안 사정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덕분에 사생활은 보호받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영역은 점점 왜소해집니다. 인간이 설 자리가 자꾸 비좁아집니다.
옛날과는 달라서 요즘 사람들은 출생부터 자기 집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집 밖의 병원에 가서 태어납니다.
돌잔치, 생일잔치, 환갑잔치, 칠순, 팔순, 구순잔치 모두 바깥에서 합니다. 죽음까지도 자기 집에서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렇다면 집은 무엇 때문에 존재합니까? 집은 무엇하는 곳입니까?
내 집 마련을 위해 수십 년 동안 애쓰다가 집이 생기면 좋아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따뜻한 가정은 사라지고 차디찬 가옥만 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순간들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평범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순간들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순간이 없다면 삶이 지속될 수 없습니다. 한 개인의 삶이 그 순간순간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 순간들이 쌓여서 한 생애를 이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을 헛되이 보내면 삶 전체가 소홀해집니다.
얼마 전에 누가 불쑥 저한테 물었습니다.
“스님, 중노릇하는 데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저는 “인간관계입니다.”하고 선뜻 대답했습니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풍진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일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가장 어렵습니다. 관계가 원만하면 마음이 편안하고 느긋해집니다.
그러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누가보든 보지 않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그럼 원만한 관계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나는 사람마다, 가족이든 직장동료이든 혹은 친구이든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둡고 추하고 모자라고 고통스런 것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굳이 신문방송을 접하지 않고 우리 일상만 보더라도 사건사고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삶이 달라집니다. 마음가짐이 삶의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20년 전에 제가 어떤 분을 만나 상담을 해 준 적이 있답니다.
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얼마 전 그 당사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 주부는 40대 초반이었고 너무나 이기적인 남편에게 시달려 이혼을 결심했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전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선풍기를 틀어도 자기 쪽으로만 돌리고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자기 위주로만 보고 꺼 버리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대학 출신이지만 책은 전혀 읽지 않으면서 몸에 좋다는 것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구해다가 혼자서 야금야금 먹었다고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필요한 만큼만 먹는데 인간은 필요 이상으로 먹어 대지 않습니까? 또 몸에 좋다면 기를 쓰고 다 구해다 먹습니다.
그 여성은 이이들을 셋이나 키우면서 정작 자신의 삶은 제대로 챙기지 못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자기실현을 못한 데 대해 아쉬워하면서 마침내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의 대화 내용을 다 잊어버렸는데 그때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식사 준비를 할 때 얄미운 인간한테 밥 준다고 절대 생각하지 말라.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라.”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이들 아버지가 저녁때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면 부처님이 돌아오신다고 여기고 반기라.
밖에 나갈 때 뒷모습을 보고도 부처님 뒷모습이라고 생각하라.”
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부처님 대신 주님이나 천주님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음식을 준비할 때도 주님이나 천주님이나 부처님에게 식사를 올린다는 생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은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사람이 불결하면 차라리 굶는다고 합니다.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불결한 사람이 만든 것을 먹으면 제대로 소화가 안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식중독에 걸릴 때 단지 음식에 세균이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음식을 만든 사람의 마음씨에 독하고 미운 생각이 들어 있으면 제대로 소화를 시킬 수가 없습니다.
음식 만드는 것은 손발이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녁때 직장에서 아이들 아버지가 돌아올 때도 ‘부처님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라고 했다 합니다.
또 현관을 나설 때의 뒷모습을 보고도 ‘아, 부처님 뒷모습이다.’ 하고 생각하라고 했답니다.
그분은 처음에는 제 말이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공부 삼아서 하루하루 그와 같이 대했더니 차츰 자신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마음이 서서히 풀린 것입니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니까 상대방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다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란 마음의 주고받음입니다. 맞서면 서로 상처 입습니다.
맞서면 부부만이 아니라 친구이든 스승과 제자이든 혹은 동료이든 연인 사이이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나 생각을 돌이켜 마음을 긍정적인 쪽으로 향하면 본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자아실현입니다.
마음공부 열심히 한 결과 위태롭던 가정도 다시 회복되고 자식들
역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번듯하게 성장해서 위기를 극복했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요즘은 이혼율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이혼한다고 해결이 되거나 매듭이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왜 내가 그런 여자, 그런 남자를 만나 이 고생을 하는가?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내 업입니다.
선을 잘못 봐서 순간의 선택으로 실수를 한 것이 아닙니다.
업을 고쳐야 매듭이 풀리지, 내 업은 고치지 않고 이혼을 한다고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투철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자기의 실체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배우자는 내 부름에 대한 응답입니다. 내가 왜 그런 사람을 만나서 그렇게 사는 것인가? 그것이 업입니다.
업을 고치지 않고는 매듭이 풀리지 않습니다.
부처나 보살을 먼데서 찾지 마십시오. 절에 부처와 보살은 없습니다. 밖에서 찾지 마십시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부처와 보살을, 생각을 돌이켜 일깨워야 합니다.
이렇게 화창하고 눈부신 봄날, 꽃구경 가지 않고 무엇 하러 절에 옵니까?
무엇인가 일상의 삶에서 성이 차지 않기 때문에 오지 않습니까?
<화엄경>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결코 차별이 없다.”
마음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지만 이 셋은 결코 근원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어만 다르지 뿌리는 하나입니다.
부처와 보살을 먼 곳에서 찾지 마십시오. 부처와 보살을 밖에서 만나지 말고 때로는 자기 집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시들했던 관계도 새로운 활기로 채워집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가옥이 다시 가정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삶이 기쁨과 고마움으로 채워질 때 삶의 향기가 배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향기입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순간순간 살고 있는 이 삶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철학자만이 탐구하는 명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나는 진정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런 근원적인 물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몸뚱이는 유기체이고 껍데기입니다. 제가 오랜만에 아는 분들을 만나면 대개 “스님 너무 야위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적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중이 살찐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시주 받아먹는 사람이 육체나 돌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내 영혼도 야위었을까?’ 하고 혼자 묻게 됩니다.
이 몸은 유기체인 동시에 껍데기이지 알맹이가 아닙니다. 콩깍지와 콩은 다릅니다. 이 육체는 콩까지 같은 것으로 덧없고 무상합니다.
세월의 비바람에 바래져 갑니다. 그러나 콩은 세월의 비바람에도 아랑곳없이 늘 새로운 싹인 생명력을 지닙니다.
그 콩깍지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주의 에너지 같은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참 나인가? 우리는 몸에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이 몸이 곧 자신의 실체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몸에 좋다고 하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구해다가 기를 쓰고 먹습니다.
한국인들이 자주 가는 해외 관광지에는 몸에 좋다는 약들이 한글로 선전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몸에 좋다고 하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구해다 먹는 사람들은 대개 진정한 자아는 까맣게 망각하고 있습니다.
콩깍지는 생각하면서 그 알맹이인 콩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자아를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마음공부란 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참선하는 일은 결코 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늘 이렇게 절에 오신 것은 몸이 온 것이 아닙니다. 할 일도 많은데 무엇이 내 몸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이곳은 안 올수도 있지만 한 생각이 일어나서 온 것입니다. 몸은 그저 따라올 뿐입니다. 마음공부란 무엇인가?
기도하고 참선하고 참회하는 일은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간절한 염원이며 수행입니다.
이와 같은 수행을 거치면서 사람은 인간답게 성숙해 갑니다. 나이 먹을수록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숙하지 않고 옛날 그대로 있다면, 그 사람은 전혀 성장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입니다.
각자 한번 물어보십시오. 나 자신, 자아의 실현을 위해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하루하루 내 생을 소모하며 살고 있는데 과연 자아실현을 위해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여기저기서 꽃이 피어나는 것을 구경만 할 게 아니라, 이 봄철에 나 자신은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한번 되물어보십시오.
꽃을 피우지 않는 나무는 온전한 나무가 아닙니다. 상록수인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도 모두 꽃을 피웁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거듭거듭 물어야 합니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과일 속에 씨앗이 박혀 있듯이. 그러나 묻지 않고는 해답을 끌어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저마다 꽃피우면서 사는 따뜻한 가정의 가계부에는 ‘촌놈 용돈 2만 원’이 아니라 ‘부처님께 용돈 20만 원’이라는
기록이 남겨질 것입니다.
좋은 봄맞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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