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신심명, 그리고 일기일회

29), 문 없는 문의 빗장

혜주 慧柱 2010. 5. 23. 07:29

문 없는 문의 빗장

2004년 11월 26일 겨울안거 결제

 

편히 앉으십시오. 절에 무슨 행사가 이렇게 자주 있는지. 강원도에서 나올 때마다 번거롭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절이 유지되는지는 몰라도 행사가 너무 잦습니다.

겨울이 되니까 동안거, 문화강좌, 창건 기념일 등이 있어서 제가 네 차례 정도 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산중에서 중이 한가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늘 바쁩니다.

 

일기예보로는 오늘쯤 서울에 첫눈이 내릴 것이라 합니다.

제가 사는 산중에는 이미 두어 차례 눈이 내렸고 응달에는 눈이 쌓여 있습니다,

계절마다 특성이 있는데 11월은 단풍잎도 다 지고 남을 것만 남아 있습니다.

초록이 사라지고 바위나 빈 가지, 본질적인 것만 남는 계절이 11월입니다.

 

산에 울긋불긋 단풍이 드는 광경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산답지 않고 수선스럽습니다.

산속 나무의 잎이 다 지고 빈 가지만 남아 있을 때, 산의 본래면목이 전부 드러납니다.

산에 살다 보면 이때가 감성이 가장 투명해집니다. 귀와 눈이 밝아지는 달입니다.

 

오늘은 결제일이기 때문에 옛 스님들의 공부하던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어느 노스님이 한밤중에 깨어나자 몹시 목이 말랐습니다. 물을 마시고 싶어서 옆방에 자는 시자를 부릅니다.

시자는 깊은 잠에 빠져 일어나지 않습니다. 잠시 뒤 누군가가 시자의 방문을 두드리며 “노스님께서 물을 찾으시오.” 하고 말합니다.

시자는 벌떡 일어나 물그릇을 받쳐 들고 노스님 방으로 들어갑니다.

이때 노스님이 놀라며 “누가 너에게 물을 떠 오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니 시자가 답합니다.

“누가 방문을 두드리며 노스님께서 물을 찾으신다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노스님은 탄식을 합니다.

“이 늙은이가 수행하는 법을 잘 모르고 있었구나.

참으로 수행할 줄 알았다면 사람도 느끼지 못하고 귀신도 알지 못해야 하는데, 오늘 밤 나는 도량신에게 내 생각을 들키고 말았다.”

 

이것은 당나라 때의 큰 스님인 백장 선사 어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청정한 도량에는 그 도량을 지키는 수호신, 즉 도량신이 반드시 있습니다.

<천수경>에도 ‘도량청정무하예 삼보천룡강차지道場淸淨無瑕穢 三寶天龍降此地.’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도량이 청정해서 때가 없으면 옹호 신장인 천룡팔부가 강림한다는 뜻입니다.

 

절에서 살다 보면 가끔 경험하는 일입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스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면 일어날 시간입니다. 나 자신을 지켜보는 존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스님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존재가 나를 그때그때 일깨웁니다. 그런데 그 삶이 청정해야 그런 메아리가 있습니다.

생활 자체가 흐리고 탁하면 그런 반응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맑음에 대한 울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차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 설익은 수행자라면 자신의 도력이 뛰어나서 도량신이 알고 물을 떠오게 했다며 우쭐거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백장 스님은 자신이 설익었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이분은 95세까지 살았습니다.

중국 선종 사원의 조사선祖師禪에 가보면 한가운데 달마스님, 좌보처로서 마조 스님, 우보처로서 백장 스님, 이렇게 세 분을 모십니다.

 

수행자는 이 일화의 백장 스님처럼 마음을 써야 합니다. 참선이나 기도는 남에게 보이거나 알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 은밀히 해야 합니다. 여럿 속에 있을지라도 은자처럼 처신해야 합니다. 혼자 하는 기도는 조용하게 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을 지녀서는 안 됩니다. 이기심은 수행이 아닙니다.

흔히 기도할 때보면 혼자 소원을 다 차지할 것처럼 욕심 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다는 기도처에 가보면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탐욕스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혼자 복을 받겠다는 생각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모든 수행의 첫째 조건은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내는 데 있습니다. 함께 정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나를 뛰어넘어 모두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함께 수행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의 분신입니다. 또 다른 나입니다.

 

제가 아는 스님이 풋중 시절 처음 선방에 갔습니다.

선방에 가서 얻어들은 화두 ‘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수행 정진해도 망상만 생기고 전혀 참선이 안 되었다고 합니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일들만 떠오르고 해서 제대로 정진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돌이켜 ‘나는 참선할 인연이 못 되어 수행을 못 하니 함께 수행하는 스님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낱낱이 스님들 이름을 들추며 ‘아무개 스님, 안거 기간 동안 아무 장애 없이 수행 잘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한 사람 한 사람 거명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하다 보니 마음에 환희심이 났다고 합니다.

그때 비로소 화두를 챙기고 원만하게 안거 수행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기도든 참선이든 함께 수행하는 이웃을 위한 배려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절에 가면 먼저 법당에 들어오는 사람이 초를 켜 놓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져온 초를 켜고 싶어서 남이 켜 놓은 초를 끄고 자신의 초를 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행동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먼저 초를 켜 놓은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향을 피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향을 하나 피워 놓았으면 그냥 놓아두면 됩니다. 향이 없으면 켜 놓으면 되고, 켜 있으면 또 꽂아 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부처님이 재채기를 합니다.

 

마음이 안정되어야 기도와 명상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러 절이나 교회에 나올 때 법당이나 교회당 안에 들어서야만 기도가 시작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집을 나설 때부터, 또 차 안에서부터, 지하철 안에서부터 기도하고 명상해야 합니다. 시간에 쫓겨서 빨리 절에 가야 한다,

기도 시간에 늦지 않도록 가야 한다는 바쁜 생각을 가지면 기도도 아니고 명상도 아닙니다.

문을 나설 때부터 기도가 되어야 하고 명상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명상은 특정 장소나 정해진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팎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기도와 명상이 끝나고 나서도 한결같아야 합니다. 대개 보면 방선放禪(참선을 쉬는 것)시간에 뒷방에서 잡담을 합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면 기도하던 시간과는 사뭇 다르게 처신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수행자는 이런 것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백장 스님에 의해 중국의 선종이 제대로 뿌리를 내립니다. 그전까지는 참선하는 스님들이 율원律員에서 거처하고 더부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백장 스님 때 와서 비로소 총림, 즉 수도원이 형성됩니다. 수행자가 지켜야 할 모든 규범이 그때 생겨납니다.

그전에는 온전한 선종의 수도원이 없었습니다.

마조 스님 문하에서 80여 명의 기라성 같은 큰스님들이 배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백장 스님이 가장 뛰어난 존재입니다.

 

한 학인이 백장 스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마음이 자유로운 경지를 해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백장 스님이 답합니다.

“부처도 찾지 않고 지혜도 찾지 않으며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도 두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찾지 않는다는 생각에도 머물지 말아야 한다.”

대개 불자들은 부처가 어떻고 보살이 어떻고 하면서 늘 부처를 구하고 찾습니다.

또 지혜를 찾고 더러운 것을 싫어하며 깨끗한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분별을 두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지옥의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고 극락의 즐거움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야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이때에 이르러야 몸과 마음이 자유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부처를 찾고 지혜를 구하되 거기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런 장애에 부딪히기 쉽습니다.

흔히 참선하는 사람들은 화두와 깨달음에 얽매여 본래청정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깨달음이나 화두에 얽매여 본래청정, 본래성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수행이든 즐겁게 해야 합니다. 고슴도치처럼 잔뜩 긴장하면 안 됩니다.

물론 용맹정진은 필요하지만, 용맹정진이라고 해서 기쁨이 따르지 않는다면 온전한 수행이 아닙니다.

하는 일 자체가 즐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편하고 안정되어야 합니다. 무엇에 쫓겨서는 안 됩니다.

 

서산 대사의 법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수본진심 제일정진守本眞心 第一精進.’

수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수행이라는 뜻입니다.

지킨다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본래 청정한 마음을 써야 합니다. 지키고만 있으면 그것은 죽은 수행입니다.

또 기도하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열심히 부르면서도 자신이 직접 그런 보살이 될 줄은 모릅니다.

그분들은 역사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특정한 분들이 아닙니다. 누구나 관세음보살이 될 수 있고 지장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입으로만 관세음보살을 부르지 말고 나 자신이 관음의 화신이 되십시오.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지장보살이고, 지극한 자비가 관세음보살입니다. 마음 밖에서 찾지 마십시오.

참선하고 기도하는 주체인 마음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법구경>에도 같은 내용의 법문이 나옵니다.

“마음 들떠 흔들리기 쉽고 지키기 어렵고 억제하기 어렵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마음 갖기를 활 만드는 사람이 화살 곧게 하듯 한다.”

남이 이 말 하면 이리 기울고, 저 말 하면 저리 기울고, 멀쩡하던 사람이 말 한마디에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합니다.

또 <법구경>은 이렇게 설합니다.

“마음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며 선과 악을 초월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다.”

경전을 읽을 때는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기 마음에서 울려야 합니다. 곧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각자 자기 자신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2,500년 전 인도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오늘 나 자신의 이야기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두려움도 없는 좋은 안거되시기를 바라며 제 말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