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無心)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께 공양하는 것이 무심도인 한 분께 공양하는 것만 못하다.
⟨금강경⟩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칠보로 삼천대천세계의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한 분의 무심도인에게 공양 올리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지극정성으로 부처님께 불공드리고 공양 올리는 우리 불자들로서는 이런 말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
한 생각 돌이켜 깨달은 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지만,
근기가 하열한 중생이라면 이 말에 ‘옳다 ‧ 그르다’, ‘좋다 ‧ 나쁘다’ 시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다가 일체 강물의 흐름을 다 받아들이듯, 무릇 불자라면 소화하지 못할 말이 없을 정도로 훤칠해야 한다.
어째서 그런가? 무심한 사람에게는 일체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으로 묘한 말이다.
마음이 있다고 해도 안 되고, 없다고 해도 안 된다.
어떠한 말도 다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일체의 시비논란을 부정하는 사구백비(四句百非)를 여의고 한마디 일러라!”고 할 때,
훤칠한 기운을 써서 그 즉시 척결할 수 있어야 한다.
여여한 본체가 안으로는 목석같아서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 같아서 어디에도 막히거나 걸리지 않는다.
주관과 객관도 없고, 방위와 처소도 없다.
또한 모양이나 자태도 없고, 얻고 잃음도 없다.
후학들이 감히 이 법에 들어오지 못하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져,
의지해서 쉴 곳이 없을까 두려워서다.
막상 벼랑을 보고는 물러나서, 대개 널리 지견(知見)을 구하는 것이다.
자고로 지견을 구하는 자는 털처럼 많아도, 정작 도를 깨친이는 뿔같이 드물다.
‘목석같아서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는 무심도인의 경지를 그대로 말한 것이다.
아예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는 입장에서는 두려울 것도 없지만,
눈은 열었는데 아직 애매모호한 것이 남아 있는 입장에서는 경우에 따라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해가 되는 것만큼은 감당할 수 있는데,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자꾸 다가오면 당황하여 아찔한 생각에 벼랑 끝에서 헤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급한 마음에 이치를 구하게 된다.
하지만 완벽하게 다 벗어던진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이 일어나든 않든 전혀 상관이 없다.
도를 깨친 사람은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기 때문이다.
문수보살은 이치에, 보현보살은 실행에 해당한다.
이치란 진실로 텅 비어 걸림 없는 도리이고, 실행이란 상(相)을 여위고 끝없이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다.
안목을 갖춘 입장의 실천이란 부처님법과 이웃해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보살의 눈을 떠야 비로소 보현보살의 행을 알고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입 벌려서 보현보살의 행이라고 말하는 순간, 배워서 이해한 것을 이치로 말하는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진정한 보현보살의 행이라고 하는 것은 깨닫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안목을 열어서 원만 구족한 모습을 스스로 살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보현보살의 삶과 같다.
하지만 깨달음이 없이는 하루 종일 육바라밀을 실천하며 보현행원을 한다 하더라도, 아직 상(相)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위선일 뿐이다.
그 정도의 수준에 있는 사람한테는 ‘바라밀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오히려 맞다.
그러나 이미 그 수준을 능가한 힘을 가진 사람한테 ‘해라, 말아라.’ 하는 것은
마치 대학생한테 초등하교 문제를 풀라는 것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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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혜주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