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의 대화

아름다운 마침표 중에서

혜주 慧柱 2015. 5. 16. 10:47

 

 

참선 잘한 저 도인은 서서 죽고 앉아 죽고

 

 

‘참산 잘한 저 도인은 서서 죽고 앉아 죽고……’

경허스님의 참선곡의 한 구절이다. 이만큼 죽음에 자유자재할 수 있다면 누가 봐도 잘 죽는 것이리라. 저 도인은 죽음을 제대로 알게 된 것 같다. 죽음을 앞두고는 ‘앉아 죽고 서서 죽을 정도’로 죽음을 가지고 노니 말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제대로 아는 것’이 도를 이루는 것이란 말인가?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온 인류가 죽음을 제대로 알아 도를 이루려 하다

 

 

 

오늘날 인류는 모두 도를 이루려나 보다. 모두 잘 죽는 방법에 관심을 기울이니 말이다. 앞으로 ‘서서 죽고 앉아 죽는 이’들을 지천에서 보리라.

과거에는 죽음이란 함부로 거론하는 것조차도 안 되는 참으로 조심스러운 현상이었다. 죽음이란 오직 위대한 그 무엇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로서 인간은 다만 그 뜻에 순종하고 조아리기만 해야 했다. 누가 감히 죽음을 거론할라 치면, 죽음을 관찰하려 뻣뻣이 든 그의 머리를 다시 조아리게 하려고 그의 머리를 눌러 버렸다. 인류는 서로가 그러했다.

죽음을 감히 쳐다보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이 흐르자 인류는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 죽음을 관장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죽음은 ‘그 무엇’의 일로서 인류가 하니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하는 까닭에 ‘그 무엇’은 급기야 ‘신’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위대한 신의 일에 하찮은 인류는 관여를 하지 않다 보니 인류는 점점 더 죽음에 대해 막연해져만 갔다.

그러나 인류는 스스로 죽음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가는 이에게 묻는다.

“죽음이 뭐죠?”

“죽음이 뭐냐뇨? 죽음도 몰라서 묻는 건가요? 이상한 사람이네. 누구나 다 아는 죽음을 묻다니... 쯧쯧,”

 

그러나 사실 인류는 죽음을 잘 모른다. 막연히 끝이라고만 생각할 뿐, 막연히 슬픔이라고만 생각할 뿐, 죽음 현상은 왜 일어나며 어느 때에 벌어지는 일인지, 각자의 죽음의 때는 어떻게 결정되는지……. 모른다! 막연히 알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이제 인류는 신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알려고 하니 말이다. 두렵지 않은가? 감히 신의 일에 관여하다가 신의 노여움이라도 사면 어찌 될라고.

인류는 참으로 용감해졌다. 스스로의 무덤을 팔 정도로 말이다. 지구 환경 파괴를 말함이다. 그러나 환경 파괴는 용감한 인류의 시행착오라 생각한다. 신의 영역이었던 죽음마저도 스스로 알려고 하니 말이다. 용감한 인류는 반드시 죽음을 깨달아 시행착오로 인한 환경 파괴를 깨끗이 돌려놓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불생불멸不生不滅 - 죽음은 없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까? 뻔히 코앞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읍내의 칠득이 엄마가 얼마 전 팔순이를 낳기도 했으며,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죽지 않았던가? 불교는 참으로 희한한 가르침이다. 눈앞의 일을 뻔히 두고 아니라고 하니. 석가모니와 같은 훌륭한 분이 하신 말씀이니 사실이긴 할 턴데 이해는 안 가고, 가만히 있어서 중간이나 가는 것이 나을까?

인류는 참으로 위대하다. 아는 척 하지 않고 제대로(정확히) 알려고 하니 말이다. 인류는 죽음이 무엇인지 제대로(정확히) 알려고 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인류의 물결을 타고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되지 않았는가.

위대한 이들은 모두 어떠한 사실을 스스로 경험해서 체득하려 했다. 인류 전체가 지구는 평평하다고 알고 있을 때 큰 도전의식에 불을 집힐 만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굳게 믿고 마르코 폴로와 같은 여행가들이 목숨을 거는 용기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체득한 것이 그 증거이다. 지동설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마르코 폴로는 평평한 지구의 끝에서 떨어져 죽게 될 텐데도 그는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지금의 인류는 천동설 시대의 인류가 먼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서 수평선은 낭떠러지기로서 곧 죽음이었다.)

그러면 신의 영역인 죽음을 직접 알려고 할 만큼 점점 더 위대해지는 인류답게 죽음의 여행을 떠나 보도록 하자.(외치는 것만으로도 위대함이 느껴진다. 우리 모두 크게 외쳐 보자. ‘자! 우리 모두 죽음의 여행을 떠납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하면 ‘죽음’의 정의는 이러하다.

 

모든 생물이 겪는 생면과정의 완전 정지 상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논쟁이 되어 왔으며 문화와 법률에 따라 다르다.

 

오래전부터 죽음에 대한 정의마저 논쟁이 되어 왔다는 사실! 참으로 재미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어떤 면에서는 죽음은 너무도 뻔한 것이라 여기지 않았던가? 역시 신의 영역 안의 일이 죽음을 착실하게 침범하지 않은 탓에 인류는 죽음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은 막연한 두려움과 슬픔일 수가 있지 않을까?

답은 ‘그렇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란 속담 또한 죽음은 완전한 슬픔이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즉, 죽음에 임박한 무렵(병상에서의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입원비 등의 이유로 가족들의 마음은 슬픔에서 냉정한 이성으로 흘러가니 말이다.(전혀 나쁜 뜻으로 표현한 것이 아님을 냉철한 직관력을 가진 독자라면 알리라.)

그렇다면 왜 슬픈 것일까? 헤어짐 때문에 슬픈 것이라면 그토록 오랫동안 부모님께 연락도 못 드리며 찾아뵙지 못했을 때는 왜 슬프지 않았던가? 옆집의 미워하던 아저씨가 이사를 가게 되어 헤어지게 되는 데는 왜 슬프지 않던가?

이렇듯 ‘헤어짐’은 슬픔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 도대체 왜 슬픈 것일까?

 

아! 무엇인가를 놓지 못하는 마음이 보인다.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보인다. 그 놓지 못하는 마음은 ‘헤어짐’ ‘마지막’ ‘다시는 못 만남’ 등등으로 표현되기는 하나 그 표현들은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는 놓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두려움, 슬픔 등으로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놓지 못하는 마음이 강렬해지니 어느 누구는 통곡을 한다. 그러나 그들 옆의 칠득이 아버지는 지금의 사실을 받아들이고는 스스로 차분해진다. 사실을 받아들여 차분해진 그는 슬픔도 두려움도 없다. 그에게는 오직 지금의 사실이 그냥 그러할 뿐이다.

 

 

다른 이의 죽음에 여여해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 본다. 처음에 두렵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 끝이라는 생각,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다 놓고 가야 한다는 생각…….

그는 모든 존재들이 다 그러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죽음마저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러자 마음속의 두려움은 이내 사라진다. 모든 것의 죽음이 그러하듯 그러할 뿐이었다. 그는 주변의 슬픔과 두려움에 쌓인 이들을 둘러본다. 그들이 모두 무엇인가를 붙들고 있음을 발견한다. 놓지 못하는 것은 마음 밖의 썩어 들어갈 사랑하는 부모님의 육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부모님과 헤어져야 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임을 발견한다. 그는 깨달았다. 죽음은 슬픔도 두려움도 아니라는 것을! ‘죽음은 슬픔과 두려움이다’란 죽음은 없다는 것을!

 

 

 

이렇듯 자신에게 벌어질 죽음을 직면하여 제대로(정확히) 안다는 것은 마치 천동설 시절에 수평선 너머를 경험해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참으로 두려운 일이지만 경험해 본 자만이 수평선은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때 동시에 큰 자유로움과 설렘을 경험하게 된다.) 죽음을 직면하는 자만이 불생불멸의 마음을 제대로(정확히)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잘 죽는 것이라 하는가?

 

 

 

…… 그는 깨달았다. 죽음은 슬픔도 두려움도 아니라는 것을! ‘죽음은 슬픔과 두려움이다’란 죽음은 없다는 것을!

동시에 더 많은 세상이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순간순간의 경험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영원히 끝나기 전에 누려야 될 것이 너무 많다는 설렘과 함께. 칠득이 아버지는 자신에게 벌어질 죽음의 일을 용감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두려움은 설렘으로 뒤바뀌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글의 서두에서 이미 잘 죽는 모습을 알게 되었다. 앉아서 죽고 서서 죽고 하듯이 자유자재로 죽는 것을 잘 죽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지막’의 죽음마저도 순순히 받아들임으로써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에서 가능한 것이리라.

이 글을 쓰게 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질문해 보았다.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죽을 때 고통 없이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이다.”

“죽을 때 마음이 평화로운 상태가 잘 죽는 것이다.”

“죽을 때 아무런 미련이 없이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이다.”

“죽을 때 후회 없이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이다.”

역시 대부분의 표현은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또 한 번 마음의 세계로 들어가 보았다.

 

 

 

어느덧 칠득이 아버지도 세상의 경험을 마칠 때가 되었다. 칠득이 아버지는 지난 삶을 돌이켜 보았다.

그 역시 어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루지 못한 많은 목표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 누구보다 멋진 청춘에 대한 목표, 누구보다도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목표, 어려서부터 꿈꿔 왔던 자유 여행가의 목표……. 그는 이와 같은 많은 목표들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이루지 못하였음을 발견하였다. 못내 아쉬웠다. ‘좀 더 노력할 것을……’ ‘좀 더 도전해 볼 것을……’ 그러나 그는 아쉬움에 머무르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그는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또한 ‘그때 그와 큰 말다툼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 그때 우리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그런 행동을 하였을까? 좀 더 너그러웠으면 좋았을 것을……’ ‘아! 탐욕으로 인해 좀 더 가지려다 더 많은 것을 잃었구나. 그때 조금만 더 지혜로웠다면……’ 그러지 말았어야 할 일들에 대한 한편으로 후회스러웠으나 역시 그는 스스로의 모자란 지혜를 인정하며 뉘우치고 받아들이며 다시 더 깊은 평화로움으로 안주하였다.

그는 자신의 삶 전부를 온전히 인정하고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깊은 평화로움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잘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잘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젠 도를 닦아야 잘 죽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들 것이다. 즉, 죽음을 직시해서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잘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죽음을 알게 된 후로는 앉아서 죽고 서서 죽는 죽음의 자유로움을 성취하게 되리라.

석가모니는 모든 것을 바로 안 분이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잘 보라고 하셨다. 그것의 실체를 알려면 똑바로 보라 하셨다. 생각하지 말고 보라 하셨다. 판단하지 말고 보라 하셨다. 알려고 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스스로 보고 알라고 하셨다. 어떠한 누구의 설명도 그것일 수는 없으니 직접 자신이 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알려 주는 가르침 중에 이 가르침보다 더 정확한 가르침이 또 있을까?

이 사실을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에 대한 설명이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심지어 실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칠득이 아버지는 한 방문객을 위해 보이차를 대접했다. 이미 칠득이 아버지는 모든 것의 마지막인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인 탓에 온 마음은 완전한 평화로움에 도달해 있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평등한 동시에 모든 것이 소중하고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방문객은 말한다.

“보이차가 참 진하군요. 좋은 차인가 봐요.”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인 후 이전과는 달리 경험되는 세상을 그에게 보여 주고자 칠득이 아버지는 질문을 던진다.

“보이차가 진하가요? 어떻게 해서 진하다고 생각하셨죠?”

방문객은 잠시 망설이다 자신이 보이차를 진하다고 말하게 된 이유를 찾아 머릿속을 뒤적였다.

“네에, 제가 이전에 마셔 본 보이차들 보다 좀 더 진하게 우려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말씀드리게 되었답니다.”

칠득이 아버지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반문한다.

“그렇다면 ‘이 보이차’는, ‘이 보이차’는 진하가요? ‘이 보이차’는?”

방문객은 칠득이 아버지의 자비로우면서도 평화로운, 그러나 그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목소리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는 그대로 보이차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아! 진한 게 아니군요! 그리고 ‘진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진하다는 식의 상대적인 표현일 뿐 절대적인 ‘진하다’는 존재하지 않네요! 아! 전 여태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며 꿈속에서 살았었어요!”

방문객의 감탄은 이어진다.

“아! 어떻게 이럴 수 있죠? 나는 없네요! 너도 없어요. 삶도 없고 죽음도 없어요. 정말로 깨달은 이들의 말처럼 꿈속에서 살았어요. 그런 것은 모두 인식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우리 모두가 찾던 그 무엇이 원래 갖추어져 있음을 알겠어요! 꿈의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러기 위해 모든 것을 인정하고 그리고 직접, 바로 보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방법이네요!”

칠득이 아버지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평화로운 미소로 보이차를 마신다.

 

 

모든 것을 ‘바로’ 직시하는 자세! 이것을 선이라 한다. 선! 이 선이야말로 죽음마저 직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선 수행자들은 군더더기가 없다. 설명을 원치 않는다. 직접 알려고 한다. 보라! ‘나는 누구인가?(이뭣고?)’ 하고 바로 알려 하지 않던가? 사실 어렵지 않다. 놀랍게도 단지 직접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 몰라야 되는 이유는 그 이상의 이유가 없다.

 

 

방문객은 깨달은 이들이 했던 말과 똑같은 내용을 살아 있는 체험담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폭포가 시원스레 쏟아지듯이. 그리고 칠득이 아버지는 부드러운 미소로 차를 음미하며 방문객의 깨어남의 전율을 말없이 공감하고 있었다.

“참 놀라워요! 이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직접 스스로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으니 말이에요. 직접 보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를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없네요. 오직 직접 보는 수밖에 없어요! 그동안에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이 있을까요?’ ‘내기 목표한 바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이룰 수 있을까요?’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등등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원했던 모습이 참 우습게 생각돼요. 왜냐하면 직접 보는 것에 대해 특별한 방법이 없잖아요. 단지 직접 보는 것뿐!”

“성공한 이들의 ‘하면 된다.’라는 말씀 중에 아주 간절하게 말씀하시던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가요. 정말 하면 되기 때문이었어요. 안 되는 것은 될 수 있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분들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사실을 설명하다 보니까 그렇게 간절하게 말씀을 하시게 되었나 봐요! 방법이 따로 없어요. ‘해야 되요!’ 안 하면 안 돼요. 안되면 안 한 거예요!”

 

 

이와 같이 직접, 곧바로 아는 것, 직접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선이다. 그러므로 선은 어렵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고 하면 되는 것이 선이다. 또한 독자들은 이미 이 무렵이면 선의 삶이 아니라면 진정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며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선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보라! 우리가 얼마나 꿈속에서 살아 왔는지. 누구나 다 해야 할 것이 선이건만 선을 특정인들만이 해야 하는 것으로 알지 않았던가? 그렇다. 그동안 인류는 꿈속을 헤매었다!

이제 인류 전체가 깨어날 시절이 도래한 것 같다. 인류는 모든 것을 직시하려 하니 말이다. 죽음마저도…….

 

 

 

죽음을 직시하는 실천으로 얻게 되는 개인과 인류의 이득

 

 

인류 각자는 죽음을 직시하면서 자신이 죽음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죽음을 직시하면서 인류 전체는 꿈에 빠져 있었던 결과 지구 전체가 향해 가고 있었던 멸망의 길을 오싹한 느낌으로 직시하게 될 것이다. 지구가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은 지구 시간으로 5분밖에 남지 않았음을 인류는 꿈꾸느라 바쁜 나머지 자신의 집이 불타고 있는 줄 몰랐던 것을.

 

사실 웃기는 일이다. 자신의 집을 스스로 망가뜨렸다는 것이 말이다. 아무 데나 버린 쓰레기는 결국 자신의 집 안에 버려지는 것이며, 물자를 마구 퍼 쓰기만 하면 결국 메마르게 된다는 것, 이웃 나라에 핵폭탄을 던져 본들 자신의 집에 던지는 것임을, 다른 나라를 짓눌러 많은 돈을 벌어 본들 결국 같이 몰락하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니 말이다. 모두가 똑바로 보지 못한 탓이리라. 꿈을 꾸던 탓이리라. 아주 오래전 세상에도⟪법화경⟫⟨비유품⟩에 나오는 큰 부자 아버지는 존재했었다. 그들은 꿈꾸는 인류에게 꿈에서 깨어나 불타고 있는 사실을 알라고 간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믿고 따른 아이들은 집이 불타고 있음에 놀라워하고 불타는 집에서 살아남음에 다시 한 번 놀라워하며 기뻐했으리라.

이 화택火宅의 비유를 단순히 교훈을 위한 비유였다고 생각해 왔던 인류는 지금의 지구를 보라! 과연 교훈 정도만을 주기 위한 비유였던가? 우리가 겪고 있는 지금의 지구는 이 화택의 비유와 너무나도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지구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 시점에서도 꿈을 꾸고 있는 큰 부자의 가련한 아이들은 아직도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리라.

이제 인류는 직시하는 선의 삶을 반드시 선택해야 할 시대가 도래하였다. 죽음이라는 것은 거북한 사실로서 모르고 지내야 한다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자신의 죽음을 직시해야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인류 전체의 죽음에 대해서 직시해야 할 시대가 아니던가?

잘 죽는(웰다잉) 것은 죽음을 직시해서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야 가능하며 이 노력으로 죽음과 동시에 삶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아는 것은 진정한 삶을 아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얼마 전까지 유행하던 ‘웰빙’마저 아우르는 것이리라!

상상해 보라! 모든 인류가 죽음을 직시하는 것을! 나아가 모든 것을 직시해서 사는 모습을! 선의 삶으로 인해 인류는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게 될 것이며 급기야 방문객과 같이 꿈에서 깨어 나와 죽음의 실체를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나’도 없고 ‘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그래서 ‘너’를 위하는 것이 소중한 ‘나’를 위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 세상을 상상해 보라!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겠는가? 누가 누구를 미워할 것인가? 누가 누구를 괴롭힐 것인가? 누가 누구를 짓밟고 올라가려 할 것인가?

인류 모두가 죽음을 직시하는 삶으로 거듭났을 때 인류는 모두를 자신과 똑같이 여기며 모두를 위할 것이며, 부족한 것을 넘치는 것으로 채울 것이며 남을 돕는다는 생각조차 존재치 않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세상이 도래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지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단시간 내에 지구의 환경을 이만큼 파괴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한다. 인류는 다시 단시간 내에 지구를 좋은 환경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류 전체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지구 시간 3분 안에 모든 것을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란 것을!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죽음을 직시하여 죽음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가능할 것이며 더 나아가 인류 전체의 죽음을 직시해야 회생이 가능할 것이다. 웰다인 운동은 시절인연에 따라 존재계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서 드러났다. 자비로움이 존재계의 근본 모습인데 바로 이 자비로운 존재계는 죽음을 직시하여 살아나라는 메시지로 인류에게 웰다잉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모두가 죽음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반드시 살 수 있기 때문에…….

 

 

 

 

웰다잉! 웰다잉이란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들에게 영화 흉내를 좀 내볼까 한다. ‘메트릭스’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다.

“자!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웰다잉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알약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꿈을 꿀 수 있는 알약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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