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의 대화

처음으로서의 불자

혜주 慧柱 2005. 8. 27. 19:22
 

불교는 2600여년을 내려오면서 많은 연구와 경전 등이 집필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실로 방대하여 평생 쉬지 않고 읽어도 다 읽지 못 할 것입니다. 또한 전래된 지역 등의 문화와 융합을 하면서 각각 독특한 불교로 형성되면서 지역마다 나라마다 특색 있게 발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불교는 "통불교"로서의 특징을 가집니다. 경우에 따라 다소 근본불교(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와 동떨어져 왜곡되게 전래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비근한 예가 우리나라의 기복적 불교를 들 수 있습니다.

불교에는 근본적 세계관과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가르침의 핵심사상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소위 불자라는 사람도 이러한 것을 잘 모르고 왜곡된 불교를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근본교리를 공부하다보면 느끼겠지만 우리나라 불교는 160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또 지금에 이르기까지 근본가르침은 실로 박제화 된 느낌이 듭니다. 불교의 어떠한 교리나 경전도 모두다 근본교설이 그 뿌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불자라면 근본교설은 알고 있어야 됨은 물론이고, 근본교설의 바탕 위에 바른 불교의 신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왕 불교의 근본교리를 배울 수 있는 인연이 맺었으니 그냥 스쳐 지나듯 읽지 마시고 용맹정진하시여 보다 더 철저히 공부하시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장담 컨데, 이 근본교설 공부를 다 마치면 가치관이 변화된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미리 한 가지만 말씀 드리면, 불교는 철두철미한 자기 책임을 강조합니다. 신행도 자기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지 부처님이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은 단지 의사요. 이정표에 불과 합니다.그리고 다시 강조 컨데, 발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처님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인연은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발심과 정진이 있기를 불전에 손 모아 발원합니다.

강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불교에서의 신행의 체계

2. 종교란? 특히 불교와 유일신적 종교의 차이점

3. 부처님의 생애

4. 불교의 세계관

5. 근본교설의 핵심

6. 불교의 발달사

7. 불교의 계율, 수행 체계

8. 대승 불교

우선 법우님 중 불교공부를 하신분도 계실 거라고 생각은 드나 내용의 초점은 불교를 처음 접한 분들을 기준으로 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 일반적으로 비 불자들이 불교를 보는 관점에서 왜곡된 것이 더러 있습니다. 물론 바로 알고 계시리라 믿지만, 심하게는 부처님을 신(神)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부처란 말은 각(覺), 즉 깨달은 사람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라는 말은 보통명사입니다. 불교에서는 창조신(유일신)을 철저히 부정하고 누구든지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석가모니"라는 말은 물론 고유명사이죠. 뜻으로는 석가 족으로서 앞서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같이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통칭하여 중생(衆生)이라고 합니다. 곧 생명 있는 무리라는 것이죠. 여기에서의 생명 있다는 말은 윤회의 굴레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은 불교에서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불교태동의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 얘기는 많이 다루어 질 것이니 이 말을 새겨 놓기 바랍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믿는다<신(信)>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믿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불교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출발선상이니까요. 그래서 부처님은 신심(信心)이 곧 성불(成佛 - 깨달음을 이룬다는 뜻)의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불교에서의 믿는다는 것은 고따마 싯달타가 우리와 같이 이 사바세계(우리 인간이 포함된 중생 세계)에 오셔서 6년의 고행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시고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수행하면 누구나가 보리를 이룬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직접 가르침을 주신 것을 진리라 하고 확신을 갖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을 신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생활에서도 확신이 없으면 행동을 망설이게 되는 거와 같이 확신이 없으면 어찌 불교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여기에서의 공부라는 의미는 교리를 아는 것과 수행을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다음 주제이기도 하구요)

예를 들어 경부선이 서울에서 부산 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기차를 타는 것입니다. 의심을 하면 그 기차를 타겠습니까?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그 기차를 당연히 타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라 확신하고 이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확고하므로 불교공부를 당연히 하는 것이고, 망설임이 있을 수는 없겠죠? 그래서 성불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확신 없는 믿음은 권장하지 않습니다.(그냥 철학적으로 안 다거나, 그저 절에 가니 마음이 편하더라, 또는 윤리적 수준에서의 이해 등등)물론 초발심 자에게 방편으로 원하는 측면을 우선 들어주는 경우는 있지만, 여기에서의 초점은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행을 하기 위함이므로 본질적인 얘기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실 불교가 어려운 측면 중에 하나가 좀 냉정하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바르게 알아야 깨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사람이 직접 공부해서 터득해 나가야 됩니다. 부처님은 의사요 뗏목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병이 났을 때(중생) 그 병을 인정하고(중생임을 자각하고)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처방전(불교의 가르침)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처방전을 해 주는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처방전까지 받았다고 하더라도 혹 "그 의사가 돌팔이가 아닌가?", "그 처방전이 과연 맞을까?"라는 등등의 의심이 있으면 병은 치료가 되지를 않듯이 바로 그 처방전과 처방전을 내려준 의사에 대한 믿음,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의 신심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건이 다 맞았다고 해도 환자가 직접 치료 의지를 갖고 치료를 해야 비로소 병이 낫는 것이지 의지가 낮으면 그 병은 요원하거든요. 해서 불교는 부처님이 아무리 권장해도(의사가 환자에게 치료하려고 노력해도)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자 이제 마무리하면 불자의 출발은 바로 믿음(신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론에 앞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표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일반적으로 부처는 깨달은 이를 통칭하는 의미인데,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표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말입니다.

앞에서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갖게 되는 이유는 목적이 있어야 됩니다. 어디를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고, 그곳을 갈 수 있는 방법이 올바르고 그 방법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목적지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목적은 바로 중생의 틀에서 벗어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확신만 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목적을 이루는)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방법을 알아야 하고, 또 그 방법대로 실지로 행동을 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믿음 다음으로 해(解)와 행(行)이 필요합니다. 해는 방법을 아는 것이고, 행은 그 방법대로 실제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신행 체계는 이와 같이 신 → 해 → 행입니다. 정리 하자면, 확신을 갖고 올바른 방법을 터득하고, 또 방법대로 행동을 하면 목적을 이루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증(證), 즉 증득하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눈치 챘을 것입니다. 왜 신(信)이 중요한가를요. 바로 확신이 없으면 방법과 행동도 별로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목적에 대한 확신(부처님의 가르침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비로소 방법을 습득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방법대로 하려고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목적을 이루는(증)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죠?

이와 같이 불교의 교리체계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과연 인간의 고통을 여의게 하는 올바른 길인지를 확신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강조를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나와 인연이 없으면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얘기는 부처님께서 무책임한 것이 아니고, 자기 가르침에 대한 확고함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리 섞어서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애써 감추고 그 문제에 침잠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고 위안 받기 위하여 신(神)을 내세웁니다.(여기에서의 신은 창조신 또는 유일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신성한 것을 내세운다는 뜻 임)그러나 부처님은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깨우치시고 우리에게도 제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전에 신행의 단계를 믿음(信) → 이해(解) → 수행(行) → 깨달음을 증득 함(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출발선인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어야 이해하려고 하고, 이해한대로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부지불식간에 그냥 "그래, 맞아, 부처님말씀이 다 맞는 거야, 해야지"라는 마음이 금방 들까요? 만일 금방 든다면(믿음이 즉석에서 바로 확고하여진다면),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그게 안 되니 문제죠. 그래서 체계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만 부디 부처님가르침을 이해하고 수행하여 보다 굳건한 신심을 가져 보십시오. 부처님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수행하다 보면 순간순간 느끼는 그 맛을 너무나 환희로우며 신심도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 해, 행은 따로 구분되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요새 말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는데, 같은 부처님가르침을 듣더라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강도나 깊이에 있어서 제각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근기(根機)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또한 처해진 삶의 위치에 따라 우리는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 위치에 따라 다르게 받아 들여 집니다. 그러나 부처님가르침을 소중히 받아들여 신심이 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성찰입니다. 먼저도 말했듯이, 병이 든 사람이 그 병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치료를 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과연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왜 이리 번뇌를 느끼고 나를 내 마음대로 하지를 못할까?"하는 자기 성찰이 있을 때, 그 성찰이 간절하면 해답을 찾으려는 마음이 들것입니다. 그것이 발심(發心)입니다. 아무리 옆에서 뭐라고 해도 자기 성찰 없이는 부처님가르침을 귀기우려는 마음이 나기 만무하겠죠. 병이 있다는 것을 자각 못하는 사람이 병원에 갈 마음을 갖지 않는 것과 같이 그래서 불교에서는 신심과 더불어 발심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합니다.

정리를 해 보면, 병이 들었다고 인정하고(자기 성찰) → 병을 고쳐야겠다는 마음을 일으키고(발심) →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부처님이 제시해 준 것이 진리라는 확신(신)을 갖고 → 병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해) → 실제로 치료받는 자기 노력과 행위(행) → 치료가 끝나면 병이 다 낫는 것은 당연지사죠(증), 그러나 솔직히 범부중생은 아직 가 본 길은 아닙니다. 단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럴 것이다. 라고 추측하는 것은 가능하겠죠. 그래서 만일 하라는 대로 다 하고 나서 얻어 보니 아니더라고 한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책임인 것입니다. 하라는 대로 다 하였다지만 실은 다 하지 못하였거든요. 왜냐하면 증에서 보장을 받지 못하였으니까요.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부처님가르침에 대한 신뢰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는 철저히 자기 책임을 강조한다는 것을 일깨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번뇌를 느끼는 것도 자기 책임이고, 지금 살고 있는 삶의 척도도 다 자기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근기가 높게 태어나고 어떤 조건에서 태어났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고 등등은 모두 자기가 만든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해결을 하라는 것입니다.  처님은 단지 우리에게 해결의 길을 제시하시고, 격려도 하시는 것뿐입니다. 먼저도 얘기했지만, 부처님이 아무리 옆에서 뭐라고 해도 본인이 움직이지(발심) 않으면 그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답이 좀 보이죠. 발심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은 앞에서 얘기했으니까 이미 해본 분들도 계시겠고, 순간순간의 번뇌를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다시 한번자신에 대한 성찰을 한번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이때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발가벗고 들여다봐야 합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조건도 부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족, 친지, 등등 모든 조건과 관계를 떨어뜨리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나'에 대한 성찰이 관념적이 아니고 냉전적이고 객관적으로 느껴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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