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쓰는 도리
*
이 세상이 아무리 넓고 태양이 아무리 뜨겁고, 우주가 아무리 크고, 위대하다고 해도 이 작은 내 마음만은 못할 것입니다. 또 내
마음의 향기와 빛은 어떤 힘으로도 분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체의 신이 다 덤빈다 해도 꺾지 못할
것이요 부처님이 예 계시다 해도 내 마음의 근본은 파괴시킬 수 없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강이 깊어서 못 가지도 않고, 산이 높아서 못 오르지도
않습니다. 설사 은산 철벽이 가로 놓여 있다 할지라도 못 뚫을 리 없습니다. 자유 자재하고 무궁 무진한 게 마음도리입니다. 너무나 광대무변하여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법신이 내 마음이요, 일체 중생의 마음도 역시 내 마음입니다. 마음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그 자체 속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그 마음의 능력이 무궁 무진하여서 온 우주를 자유 자재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마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있기 때문에 아무리 합쳐도 합친 사이가 없고, 표시나 무게
또한 없으니 아무리 빼내도 줄지 않고 더해도 늘지 않습니다. 일체 중생의 마음을 합하여 부처님의
마음이 된다 해도 하나인 것이니 그 작용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천백억 화신, 그것이 다 주인공 한 마음의 묘용입니다.
마음의 도리를 모르면 백 보를 뛰어도 종종걸음에 불과하고, 이 도리를 알면 앉은
자리에서 한 생각에 천만리 드나들 수 있습니다. 마음이 주인이자 부처이므로 한 생각 일으키면
문수요, 움직이면 보현인 것이니, 주인공 한마음 자리에는
부처ㆍ문수ㆍ보현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한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한 생각에 오장육부의 생명의 씨가 형성되기도 하고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금이냐? 넝마냐? 그것은 오직 생각의 차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금처럼, 어떤
사람은 넝마처럼 과보를 받습니다. 그리고 금은 금방에,
넝마는 넝마전에 모이듯이 차원 따라 모여 사는 게 바로 인간의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한 생각 일으키는 것은 마치 중계 역할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생각은 이
육신에게도 중계자가 되고 나의 본래 면목한테도 중계자의 역할을 합니다. 이에 한 생각 일으킨 것이
본래 면목이란 것을 알고 들어가면 무엇을 맡기고 알고 할 것도 없지만 사람들이 그걸 모르니까 오직 자기의 본래 면목 자리에 다
일임시켜라, 믿어라, 놓아라, 하는 것입니다.
나라엔 대통령이 있고 장관이 있고 말단에 이르기 까지 단계마다 담당이 있고 경찰,
법원도 있습니다. 모두가 대통령이 있음으로써 제 역할을 하게 되는데 가령 무슨 문제가
생겨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할 때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하기보다 대통령에게 직접 하소연할 수 있다면 한번에 처리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 한 생각이면 모든 게 내게로 따라오게 만들어야지 일일이 내가 쫓아다녀서야 그처럼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마음으로 한 생각에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유유히 움직이면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고, 사랑할
것은 사랑하면서도 이름이나 형상에 매이지 않고 함이 없이 하는 도리를 따르는 게 됩니다.
누구나 자가 발전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발전소를 쓰지 못하고 온갖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자기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본래의 모습은 온갖 고통을 떠나 청정할 뿐 아니라 무한한 능력이 샘 솟는 자가 발전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자기 본래 모습, 자가
발전소를 믿고 모든 경계를 되돌려 그곳에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놓는 거기에 자가 발전의 힘이
솟구칩니다. 전 우주의 발전소와 가설이 되어 있는 자가 발전소,
그래서 무궁 무진한 힘이 나옵니다.
주인공에 놓고 쉰다는 것은 나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만법이 그 자리에
출현하였으므로 그 자리로 돌아가서 한 생각을 내면 그것이 그대로 법이 됩니다. 그때의 한 생각은 곧
자동 작동 기계의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아서 모든 것이 다 생각대로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일체법의
근본 자리에서 일으킨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한 생각이 곧 법이라 마음의 중심을 쥐고 한 생각 낼 때 우주 법계가 들썩들썩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마음 도리를 알면 우주 방방곡곡이 앉은 방석이라 손발이 두루 하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눈 한번 치켜 뜨고 내려 뜨는 그 사이 한 생각에 삼천 대천 세계의 소용돌이 얼음이 한 번에 녹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수 억겁을 끄달리며 돌아가는 수도 있으니 한 생각에 자기를 구덩이에 넣기도 하고 한 생각에 자기를
건져낼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의 도리, 한 생각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생명이든, 벌레 하나라도 다 한 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의 주처만
잡았다 하면 한 생각에 어떠한 문제라도 송수신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바람이 안 불어야 할 텐데.’하는 생각이 들면 찰나에 말
없이, 발 없이도 전체가 전하고 받게 됩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뿐만 아니라 생명간에, 법계간에 어떠한 문제라도 다 송수신이 가능하므로 개별적인 나
하나로서 마음을 내는 것이라면 힘이 없지만 포괄적인 하나로서 마음을 내는 것은 무궁무진 광대무변합니다.
그래서 마음 내는 게 그대로 법이 되는 이치가 있습니다.
한 생각에 의사가 될 수도 있고 산신이 될 수도 있고 보살이 될 수도 있고 무엇이든 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 한 생각에 무슨 그림이든 그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생각으로 동방에 아촉을 세워 놓으셨고 서방에 아미타를 세워 놓으셨고,
사바 세계엔 관세음보살을, 지천국에 지장보살을 이름으로 세워 놓으셨습니다.
활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용이란 어느 것 하나를 세워 놓고 하는 말이
아니고, 그릇으로 비유하자면 완전히 빈 그릇으로서 그 어떤 언어도 붙지 않는 나ㆍ너도 세울 게 없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마음내지 않으면 송장이고 한 생각 일으키는 것은 발전합니다. 근본 마음에 놓아진
상태에서 그대로 하면 바로 용인 것입니다. 용이란 일상 생활에서 할 것 다 하면서도 놓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릇이 비었다면 주인공이다, 아니 다를 떠나서
그대로 활용이고 그대로 참선이요, 그릇이 비었다는 말조차 붙지 않은 그 자리에서 한 생각 일어나면
전체가 같이 돌아가기에 그대로 묘법의 활용인 것입니다.
나에게 열 사람의 일꾼이 있든, 백 사람의 일꾼이 있든,
쓰지 않는다면 있으나마나 입니다. 그와 같이 나의 근본에는 무한량의 능력이 있지만 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능력을 믿고 쓴 사람은 부처가 되고 능력을 믿지 않아서 못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중생인 것입니다.
아무 집착 없이 한 생각 일으키면 온 우주의 마음이 함께하게 됩니다. 구태어
말을 지어서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 이전에 참 나가 먼저 알고 있으니 진실한 마음에서 한 생각 일어났다면 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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