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 곧 불법
*
불법은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를 둘로 보지 않습니다. 사바 즉 정토요, 번뇌 즉 보리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청정하면 이 세상이 그대로
불 국토인 것이며 번뇌와 보리를 둘로 보지 않고 그 실상을 직시하고 나면 번뇌가 본래 없는 영원한 실상에 안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상 세계에 이르지 못한 것은 스스로 제 마음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이 세상 탓도 아니고 이상 세계 탓도
아닙니다. 그래서 불법에서는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는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백만 대군을 이긴 사람보다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 더 위대하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열 가지 거룩한 명호 가운데 하나로 ‘스스로를 잘 제어하는 분’ 즉 조어장부라는 명호가 있습니다.
평상시 생활 속에 도가 있습니다. 평상 생활을 버리고서 도가 있는 게 아닙니다. 보고 듣고 겪는 가운데 산 진리, 산 교훈이 있습니다. 일상 생활이란 모르면 생존 경쟁이겠지만 알고 보면 공부입니다.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 바람 한 줄기도
모두 스승입니다. 그러니 어찌 삶의 고초를 고초라고만 하겠습니까?
생활을 떠나서 불법을 따로 구하지 마십시오. 생활을 잃고 따로 그 어떤 것이 있다고
결코 믿지 마십시오. 살아가는 모든 것이 곧 불법이니 내가 있는 것이 불교요, 내가 살아가는 것이 불교입니다. 생활을 불교식으로 바꾸는 것이
작은 일이라면 생활과 존재 그 자체가 불법 그것임을 깊이 깨닫는 것은 큰 일입니다. 불교를
생활화하기보다 생활이 진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의 집이 바로 여래의 집입니다. 가정과 일터가 바로 여래의 집입니다. 사찰만이 도량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절에 와서만 정성 드리고
깨끗이 쓸고 닦고 할 게 아니라 처처에서 정성 드리고 쓸고 닦아야 합니다.
어느 누가 내게 묻기를 ‘사람은 먹기 위해 삽니까?
살기 위해 먹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내가
되묻기를 ‘목이 말라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려는데 그때 내가 이걸 살려고 마십니까? 마시려고 삽니까? 어떤 생각으로 마십니까?”하니 ‘그건 생각할 여지가 어디 있나요, 목이 마르니 그냥 먹지요.’ 그럽디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 속에 불법이 있습니다. 거기에 불교가 있습니다.
풀 한 포기라도 불교 아닌 게 없고, 벌레 한 마리라도 불교 아닌 게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편리하자고 이 이름 저 이름 붙여 놓았지만 그런 이름과 아무런 관계 없이 바로 일체
만물이 불법이고 우리의 생활 하나하나가 불법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디에 한정된 그 무엇이라고
한다면 진리가 아니겠지요. 불교니, 가톨릭이니 나누는 그
이름은 그냥 상표나 다름없습니다.
생명이 있기에 마음 있는 것을 알고, 마음이 있기에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 평상심으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을 그대로 불법이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집을 짓고자 할 때 생각을 하니까 설계가 나오고 집이
올라가게 되듯이 일상 생활 중에서 생각을 하니까 말하고 움직이고 하는데 그렇게 돌아가는 마음의 이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인 것입니다. 내가 날 알아보기 위한 것이 곧
불교입니다.
불법은 내가 행하고 살아가면서 한걸음 걷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고로
부처님 법이 법당에만 있는 게 아니라 안방에도 있고 부엌에도 있고 직장에도 있습니다. 대중이 살림하는
것이나 스님들이 중 노릇 하는 것이나 공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풀 한 포기라도 불법 아닌 게
없습니다. 이 세상 존재하는 것은 모두 불법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 전부 어느 바닥이라도 법상 아닌 곳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딛고 다니는 이 터전이 전부 한 법상이자 여래의 집입니다.
일체 만물 만생이 내 스승 아닌 게 없습니다. 우리가 분별심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니까
그렇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본다면 설사 미물이라도 스승 아닌 게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구더기는
구더기 살림이 있고 개구리는 개구리 살림이 있고 사람은 사람 대로의 살림이 있습니다. 다만 더하고
덜함의 차이 즉 수 억겁을 통해 진화해 온 과정이 지금 어디에 이르렀느냐, 또는 미혹의 정도가
어떠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공부하는 이는 하찮은 것을 보고 하찮다 하는 것이 아니라
미혹했을 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살림살이에도 부모 자식이 있고 먹고 잠자는 일도
있습니다. 만약 거기서 생명의 도리, 나툼의 이치, 불법의 도리를 배우게 된다면 스승이 따로 있다 할 것이 없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깨끗한 곳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높은 곳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질척질척한 곳에도 계시고 더러운 곳에도 계십니다. 저 냄새 나는 똥통 안에도 계십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부처님은 구더기를 건지려면 구더기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뱀을 건지려면 뱀의 몸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어디든 들어가고, 어디를
들어갔을 때를 내다, 부처다 할 수 없기에 부처인 것입니다.
종교는 결코 생활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평상심이 곧 법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를
보면 여기에 끄달리고, 저기를 보면 저기에 끄달리고, 보는
대로 끄달리기만 한다면, 지금 갈 길이 먼데 어떻게 여기 저기 보고 듣고 끄달리고 허우적거리며 갈
길을 가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 본래의 생각내기 이정 본래 면목 참 주인공을 믿으라고 하는데 그것을
왜 믿지 못하나요? 다른데 그림을 믿고, 이름을
믿고, 형상을 믿고, 그러면서도 실질적으로 보게
하고, 듣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자시를 움직이게 하는 진짜 자기 실상은 왜 믿지 못합니까?
이름에 끄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나올 때 본래부터 이름을 지어가지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이름과 형체에
끄달리고, 또 “석가모니”라는 이름에 끄달리니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름에 끄달린다면 결코
독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지구라는 독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자기 몸뚱아리
하나에서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니 그러고서도 어떻게 우주를 뛰어넘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우주 만물은 다 한마음의 나툼입니다. 마음으로 걸리지 않으면 몸으로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잘 되었든 잘못 되었든 다 놔야 합니다.
생활의 일거 일동을 자기가 한다는 생각 없이 주인공 자리에 놓고 걸림 없이 생활한다면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생활이 그대로 일상 삼매요 선인 것입니다.
인생이란 어머니 뱃속에서 “응아!”하고 울며
태어날 때 이미 예고 없는 사형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꿈 속의 일처럼 살다가 돌아가는
것이니 마치 어린 아이들이 땅뺏기 놀이 할 때, 서로 금을 그어 가지고 땅을 뺏고 놀다가 해가 서산에
지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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