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기술+참선곡, 행불어록

자유인의 길 11,

혜주 慧柱 2006. 6. 25. 17:22

* 예경과 타력 신앙 *

 

부처님만을 높이 볼 줄 알고 자기를 낮추기만 한다면 자기가 자기를 깔보는 것이니 이것을 중생상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깔보면 부처님을 깔보는 것이 되며, 일체중생을 깔보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자기를 내세운다면 남을 얕보는 것이 되고 부처님을 얕보는 것이 되니 이것을 아상이라고 합니다.

본래로 나의 자리는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그대로 평등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참나가 아닌 거짓의 나가 높다 낮다 을 분별하니 그 분별심을 따라 어느 때는 높다 하고 어느 때는 낮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의 병통입니다. 그러나 주인공 자리는 언제나 밝고 여여하며 평등합니다.

 

밖으로 부처님을 믿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근본 그 자체이니 내가 나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이름을 떠나서 근본을 찾아야 합니다. 부처님이다 미륵이다 천주님이다 하기 이전 자리, 그 근원에다 놓아야 합니다. 일체가 나온 그 자리가 이름하여 부처님이요 창조주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높다라니 올라 앉은 불상을 보고, 높이 매단 십자가를 보고, 또는 하늘을 쳐다보고 구원하여 주십시오.’하며 밖으로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것이 미신이요 우상숭배입니다.

 

삼보에 귀의한다고 할 때 그 삼보는 나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성 삼보에 귀의해야 합니다. 마음이 주인공과 더불어 하나일 때는 부처님께 경배하는 것이 구도가 됩니다. 마음이 주인공을 떠나 있을 때는 부처님께 드리는 경배가 기복이 되어 참 공덕이 없습니다. 마음이 주인공과 더불어 하나일 때는 부처님을 공경하는 것이 나를 공경하는 것이 되고, 마음이 주인공을 떠나 있을 때는 부처님을 공경하는 것이 나를 멸시하는 게 됩니다.

부처님 마음과 주인공 마음이 둘이 아니기에 경배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육신, ‘라는 의식이 항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배하는 마음은 항상 숙연하면서 겸손해야 하고 정성이 지극해야 합니다. 또 일체에 감사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우주 삼천 대천 세계가 내 자리 아닌 곳 없으니 법당에 앉아 있으나 변소에 앉아 있으나 내가 그곳에 있기에 참나가 같이 있고 부처님께서도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이곳저곳 영험하다는 장소 따지고 이 종교 저 종교를 가리지요? 장소 따지고 이름 붙이다가 아까운 세월 다 보내고 마니, 어느 때에나 전체가 둘 아닌 도리를 깨우치겠습니까?

절에 오는 많은 불자들의 경우 관세음 보살하고 염불하는 것을 보면, 하나도 자기 가슴에는 불을 켜지 않고 바깥으로만 불을 켜려고 하니 불이 밝아질 수 없습니다. 본래 밝은 것을 몰라서 그러니 어떻게 가정을 윤택하게 하고 자기가 자기를 제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중생을 자기가 거들지 못하고서는 해롭지 않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실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활과 불교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직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 따로, 생활 따로, 좌선 따로, 그리고 부처님 앞에 불공 드리는 것 따로, 부처님 따로, 관세음 보살 따로, 지장 보살 따로, 생활 따로 이러니 되겠습니까? 만약 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불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요, 그리고 배우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는 안됩니다.

 

내 안에 불보살이 있으니 바깥을 향해 해 다라고 하면 벌써 둘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리 빌어 본들 공덕이 없습니다. 수만 냥을 내고 불을 켜도 만약 그것이 기복이라면 공덕이 하나도 없고 불을 켠 일도 없습니다. 내가 농사짓고 부지런히 뛰어서 내 밥을 내가 지어 먹는 것이지 누가 나에게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을 계발하는데 역점을 두어야지 깡통 들고 다니면서 도와 달라고 해 보았자 채워지지 않습니다.

기복으로만 맹종하고 타력 신앙으로만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광대 무변한 인간의 가능성을, 법신으로서의 부처 이룰 자격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더할 수 없는 고등 동물로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절에 가서 인등을 켜는데 온통 남편 것, 자식 것, 조상 것을 죽 켜 놓아야 안심이 된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정성스런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바깥 정성 말고 진짜 마음으로 불을 켜는 그런 정성이 되어야 합니다. 밖으로 인등을 켜 놓는데 가령 열흘을 켠다, 한 달을 켠다고 하면 이 세상이 열흘, 한 달만 돌아가고 맙니까? 이 지구, 이 우주가 열흘만 돌고 그 다음엔 안 돌아가나요? 또 나는 열흘만 살고 말 겁니까?

이왕 불을 켜 놓으려면 자나 깨나 불을 켜야 하겠지요. 우리 마음의 불은 자나 깨나 켜져 있어 꺼질 줄 모르는 불이요 우주의 근본인 진짜 불인 것입니다. 그 불은 항상 켜져 있고 이 세상 우주 법계와도 온통 가설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불이 있는데도 켰다가 꺼지는 불로 정성을 드린다고 해야 옳겠습니까?

 

진리는 정해진 바나 고정된 바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체는 공하여 오직 나툼일 뿐이니 고정된 무엇을 말하면 그것은 진리와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고로 예언이란 소인배나 할 짓입니다. 찰나로 변하여 돌아가는 실상을 고정되게 정의 내린다면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하겠지요. 진실로 예언을 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오직 부처님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언한 대로 이룰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짓고 자기가 먹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남에게 의지만 한다면 남의 종이나 거지밖에는 되질 못 합니다. 그래서 늘 남에게 차이고 탄압이나 받는 곳에 태어나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절대적인 대상을 관념화하여 자기 마음속에 만들어 놓고, 거기에 대해 자기는 종이라고 스스로 만들어 놓고 보면, 자기는 종이라는 그 고정 관념에 묶여 그로부터 자기 마음의 차원이 벗어나질 못하게 되므로 결국에는 종이나 노예로 탄압받는 곳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유일신이나 절대자를 믿는 곳에서 항상 싸움과 전쟁이 끊이지 않으며, 서로 죽이고 죽여 마침내는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피의 역사가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신이라고 밖으로 향해 찾든가, 부처님을 또한 밖에서 구하느라 떡이나 해 놓고 빌기만 한다면 그러한 신세를 면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귀신 노릇을 하기 때문에 귀신이 있는 것입니다. 귀신 노릇이 유별난 일이 아닙니다. 중생들이 스스로 귀신을 지어 놓고 스스로 얽매이는 관념, 그리고 그것에 의지하며 짓는 어리석은 행위들이 바로 귀신의 짓인 것입니다. 사실 중생들의 거의 모든 행위는 가혹하게 말하면 모두 다 그와 같은 귀신 노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적이란 것은 없습니다. 모든 중생이 본래 전지 전능한 능력을 다 갖추고 있는데 그것을 몰라서 못하고 못쓸 뿐이지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이나 고치고 안되던 일이 좀 이루어졌다 해서 기적을 낳았다 능력을 받았다 하는 것은 참으로 좁은 소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세주에게 업혀서 단번에 천국에 간다는 교리가 세상에 있는가 본데 그건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가르침은 대가를 치르지도 않고 물건을 가져오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위대한 구세주도 내 안에 있는 마음의 구세주만 못하고, 그 어떤 성스러운 스승도 내 안에 있는 마음의 스승만 못합니다.

 

믿지 못하니까 혼란에 빠집니다. 자기가 자기를 진실하게 믿는다면 어찌 혼란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급해지면 자기를 믿지 못하는 수가 있으므로 인도할 스승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처음에 마음 먹었던 것을 잊지 말고 딱 쥐고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떠들지만, 심판이란 자기가 자기의 심판을 받는 것일 뿐이지 결코 남이 주는 것도 아니고, 또 누군가가 자기의 권리를 빼앗아 가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 생각이 전 우주를 덮을 수도 있고, 들 수도 굴릴 수도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주와 내가 더불어 동심, 동근, 동체인데 어찌 심판이 온다 안 온다 떠들 수 있겠습니까? 모든 종교의 근본은 하나입니다. 진리는 둘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종교를 주장하는 것은 사람들의 일이지 진리의 일은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가 어떠한 시대입니까? 10년 전과 오늘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그런 시대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이 얼마나 변했습니까? 그러니 몇 백 년 전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마음이 바뀔 줄 모른다면 이건 아구가 맞지 않는 일입니다. 아직도 복을 받게 해 주십사 하고 딱 해 놓고 밥 해 놓고 나무에 빌고 돌에 빌고 그래서야 될까요. 자기 자신한테 빌어야 됩니다. 참 자기의 위력은 무한합니다. 그런 자기를 외면하다니요. 빠르기로 말하면 빛보다 더 빠르지요. 빛이 태양에서 지구까지 오는 데는 8 20초가 걸린다고 하는데 우리 마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오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 자리, 그 위력을 안다면 더 이상 밖에다 대고 빌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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