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기술+참선곡, 행불어록

자유인의 길 13,

혜주 慧柱 2006. 6. 25. 17:24

* 적극적인 삶의 지혜 *

 

마음이 넓으면 이 세상을 다 안고도 남음이 있지만 좁으면 바늘 끝도 안 들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고집을 부리는데 그것은 제 생각이요 제 마음 자리이지 세상 여러 사람들의 마음은 아닙니다. 제 고집을 앞세워 남을 원망하고 탓하고 미워하기 보다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낮춰 보십시오. 겸손과 하심만이 인간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저 넓은 들판을 생각해 보십시오. 울타리가 없는 들판에 온갖 생물이 자유롭게 오가며 살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그렇게 넓다면 나의 삶은 얼마나 넉넉하고 풍요로울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차원대로 살고 이 세상은 그 차원을 따라 돌아가고 있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 마침내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알고 있다면 한 때의 고통이나 불운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은 바다에 이르기 된다는 확신이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전체를 보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쳐오면 당장 세상이 어떻게 되는 줄로 알고 전전긍긍합니다. 모두 지혜가 부족하여 마음이 동요하는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려움 뒤에는 화평이 있고 이익 뒤에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장마철이라도 해가 들 때가 있고 비 그칠 날도 있습니다. 청명한 일기를 보이다가 먹장구름이 낄 때도 있습니다. 행과 불행, 순탄함과 어려움은 늘 그렇게 갈아듭니다. 그것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은 따라서 말려 들지도 않고 사태를 관조할 줄도 알고, 그 사태를 세밀히 관찰할 줄도 압니다. 그런 지혜로운 사람이 됩시다.

높다고 높게 생각하지 말고 낮다고 업신여기지 말고 항상 자비스럽게, 항상 같이할 수 있는 넓은 마음,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 같이 피를 나눌 수 있는 그 마음, 같이 먹을 수 있는 그 마음, 그 마음이야 말로 이 세상을 통치하고 이 세상을 덮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집 아만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집착하는 마음을 쉬고, 투기를 하지 말고, 모든 악한 것을 마음으로 안아서 내 물그릇에 넣어 한 그릇으로 만드는 것이 보살의 사랑이요 행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요 집착이요 망상에 불과합니다.

팔자 운명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의 집착을 떼지 못하니까 업이 되고 응보가 있고 유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기의 마음이 짓고 받는 것이니 행복과 불행의 열쇠는 바로 자기 마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에는 팔자 운명이란 게 없습니다. 삼재니, 팔난이니 하는 것도 없습니다. 생이 밝으면 밝은 것일 뿐 운명이 아니며 생이 어두우면 어두운 것일 뿐 팔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은 시원한 법입니다.

팔자 운명도 다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받는 것이니 남에게 팔자 운명을 물어서 풀려고 하지 말고, 자기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이 지어졌음을 알고 오로지 자기의 근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풀릴 것입니다. 뿌리가 싱싱하면 잎이나 가지는 물론 모든 것이 다 싱싱하게 될 것을, 새삼스레 가지가 썩었네 잎이 썩었네 하고 개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인연 따라 금생에 잠시 잠깐 모여서 가정과 이웃을 이루는 것이므로, 우리는 누구나가 다 얼마 살지 못하고 곧 헤어질 것이기에 서로가 잘 지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또 다음에 다시 서로 인연 따라 만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때 정말 서로가 잘 지내기 위해서도 지금 잘 지내야 되는 것입니다.

부처 속에서 중생이 나오고 중생 속에서 부처가 나왔으니 모두가 한 마음입니다. 남을 원망치도 말고 남의 것을 탐하지 말며, 아집을 버리고 항상 겸손하면서 뜻 보시와 법 보시, 부드러운 말 보시를 하십시오. 말로든 마음으로든 항시 자비롭고 인 의롭게 남을 대하세요. 우리 모두는 언제나 상대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회사로 치면 사장이 있어야 직원이 있고, 직원이 있어야 사장이 있습니다. 고로 서로가 서로를 아껴 폭 넓게 살아감으로써 자신도 아낄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분으로 살지 말고 전체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얼굴의 눈ㆍ귀ㆍ코ㆍ입 따위가 각각 자기 주장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혼란이고 번뇌일 것이다. 그것들은 다행하게도 얼굴 전체의 입장에서 같은 마음으로 움직입니다. 그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그러면서도 움직일 때는 눈은 눈으로서 움직이고, 귀ㆍ코ㆍ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또한 그래야 합니다. 나는 본래 관세음 보살의 천수 중의 한 손이요, 천안 중의 한 눈이므로 관세음 보살의 한 손이요, 한 눈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관세음 보살은 곧 법이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의 일부인 것입니다. 각자는 개별적으로는 나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진리입니다. 개별적인 나로서가 아니라 진리인 나로서 살아가야 그것이 귀의의 참뜻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탐ㆍ진ㆍ치 삼독심이 제 육신을 살찌우니까 행복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욕심이 정작 중요한 주인을 해칩니다. 비유하자면 자기 집을 짓는 사람이 집을 제법 멋지게 짓긴 했으나, 거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몸을 상하여 낙성식 날 죽었다고 할 때, 그 아름다운 집은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집은 주인의 것으로 편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집이 주인에게 봉사한 것이 아니라 주인이 집의 노예가 된 꼴이 아니겠는지 요. 그러니까 육신을 위하는 탐욕으로 마음을 타락시키는 사람은 종살이를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찬란한 성공을 거둔다 해도 그것은 그럴듯해진 것일 뿐 정작 집주인은 그 사이에 다 늙어버린 꼴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일단 모든 것을 다 버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앞에 놓인 의무까지도 다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버리지 않고 버려야 하고, 버리되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애착은 버리되 인연을 저버리지 않는다. 애착을 버리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인연을 거두게 될 때 그것이 곧 보살 행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사에 그래야 합니다.

일반 불자들은 평상시 돈을 벌면서 살되 그 돈에 착이 없이 산다면 바로 깨우침의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본래 나도 공하였으니 아무리 내게 돈이 많다 하여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마음의 주인의 것이니 나는 다만 관리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따로 있다고 알아서는 안됩니다. 주인이자 공이요, 공이자 주인인 것입니다.

재산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지 재산에 쓰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재산에 쓰이는 사람에게는 재산이 곧 짐이라 온갖 풍파의 원인이 되지만 재산을 쓰는 사람에게는 재산이 편리한 가축이 되어 자꾸 새끼를 치게 됩니다.

내 가정, 내 주변을 살리는 속에 부처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지금 내 앞에 닥친 일부터 녹여 나가십시오. 내 앞에 닥친 일을 놓아 두고 먼데 일을 이야기하고 걱정하는 것을 일컬어 욕심이라고 합니다. 가정과 생활에서 닥치는 문제를 이겨 내지 못한다면 불법을 말할 단계도 되지 못합니다.

요즘 세상은 물질 과학이 고도로 발달해서 마음 세계로 들어가지 않으면 가닥조차 잡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세월에 그 많고 많은 물질 세계를 다 포섭해서 일일이 감 놔라 배 놔라 하겠습니까?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자녀의 마음 뿌리에 거름도 주고 물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 그런 아버지가 되십시오.

내 전화통 있고 자녀의 전화통 있고, 내가 그 번호를 잘 알고 있는 이상은 말로, 몸으로 닥치고 욕하고 때리면서 가르치기보다는 둘 아니게 통신하면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밝히고 스스로 올바른 길을 가게 하는 것, 그것이 뿌리에다 물주는 이치요 에너지를 넣어 주는 것입니다. 색으로만 보고 안타까워하기보다 한 걸음 더 디뎌서 넓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가정에서 남편은 남편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빗나간다 해도 결코 입으로 몸으로 물질로 상대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맡기고 관하고, 오직 마음에 놓아 버리면 반드시 서로 통하게 마련입니다.

예로부터 불교에서는 세 가지 어려움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고 불법 만나더라도 제대로 수행해서 보리과를 얻기란 더욱 어렵다고 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부처 되는 길의 반을 이룬 셈이라 보아도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 복된 자리에 서게 해 주신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우리들의 조상님이시며 우리들의 부모님이십니다. 그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차례상 앞에서 머리 숙이는 것 이상으로 표시할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참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수행해서 보리과를 이룬다면 그것이야말로 조상님들의 묵은 빚까지 죄다 갚는 일이 됩니다. 몸을 받드는 효자가 있고 뜻을 받드는 효자가 있습니다.

남의 생명을 내 생명과 같이 생각한다면 살생할 일이 없고 남의 물건을 내 물건같이 생각한다면 도둑질할 일이 없습니다. 분수를 지키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면 내 몸 건강하고 내 가정 화목할 것이니 얼마나 좋은 일일까요? 생명은 다 같습니다. 개미 생명이나 사람 생명이나 마음 쓰기 차원이 다를 뿐이지 생명은 똑같습니다. 사람이 고통을 싫어하는 것이나 축생과 미물들이 고통을 싫어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사실 차원의 높고 낮음에 있어서는 사람과 축생, 미물이 서로 다를지언정 하나의 생명이 겪는 근본적인 아픔에 있어서는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미물이라지만 구태여 잔인하게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데도 그저 재미로 생명을 죽이기도 합니다. 종교를 떠나서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누구나 생명을 가진 존재는 자기의 생명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생명도 소중히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구태여 불법을 말하지 않아도 그렇습니다. 요즈음의 방생은 놀부 방생이 되고 있습니다. 예전의 물고기 방생은 큰 비가 올 때 마당에 떨어진 미꾸라지 따위를 살려주거나 사고를 만나 죽게 된 짐승을 건져주는 것, 말하자면 흥부 방생이었는데 요즈음엔 잘 살고 있는 물고기를 잡았다가 다시 놓아주고 있으니 제비 다리 부러뜨려서 고쳐준 놀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설사 그 물고기가 다시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제 살던 곳을 떠나 가족과 헤어져 타향살이하는 격이니 이산 가족을 만드는 방생이 되고 맙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방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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