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
망상 번뇌 본공하고.
망상이나 번뇌니 하는 것은 본래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능엄경을 보면 칠처징심장(일곱 곳에서 마음을 묻다)이 있습니다. 아난존자는 본래 인물이 좋았다고 합니다. 인물도 좋고, 몸매도 좋았어요. 그래서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에서 가사를, 통 가사 입는 이는 아난존자 밖에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왼쪽 어깨만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어깨는 그대로 맨살을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아난존자는 몸매가 하도 아름다워 여인네들이 귀찮게 굴기 때문에 “너는 오른쪽 어깨도 가려야 된다.” 해서 특별히 허락받아 양쪽어깨를 모두 가린 분. 워낙 몸 짱이라 양쪽 어깨를 다 가린 분, 바로 아난존자입니다. 마등가녀의 딸이 아난존자가 탁발을 나왔을 때 아난존자를 보고 반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에게 “나, 아난존자하고 결혼 안 시켜주면 죽을 텨!” 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간 거예요. 어머니가 처음에는 달래보았지만 상사병에 꽉 잠겨서 도저히 말이 안 통하니깐 주문을 건 거예요. 마등가녀가 본래 주문의 대가였어요. 주술로써 아난존자를 홀리게 해서 마등가녀 자기 딸과 합방을 치르려고 할 때 부처님께서 이런 사실을 감지하시고 제자를 보내서 아난존자를 풀어오게 합니다. 그래서 아난존자와 마등가녀 다 불러서 대화를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능엄경에 시작이 되는 거죠. 너무나 능엄경이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경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아난존자가 문답을 하죠. 아난존자가 “제가 부처님께 처음 출가 했을 때 부처님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기뻐서 출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지금 마음이 기뻐서 출가 했다고 하는 게 그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 이렇게 여쭈어 봅니다. 그래서 아난존자가 처음에는 “네? 마음이요. 이 몸속에 있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우리들도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라는 건 내 몸 어딘가에 뭐 머릿속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가슴에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뭐 온몸에 펴져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결국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속에 마음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막연히~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몸 밖에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다.”, “그럼, 중간에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다.” 이렇게 해서 일곱 곳에서 마음을 찾아보았지만 결국은 마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결론은 무엇인가? 마음을 찾아보았지만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 나타났다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것이죠.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분별 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순경계에 의해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짝” 지금이 박수소리와 같습니다. 박수소리가 고정된 실체가 있습니까? “내 놓아 봐라” 내 놓을 수가 없어요. 왼손과 오른손을 부딪쳤을 때 났다가 왼손과 오른손이 떨어지면 사라지는 겁니다.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분별심이 아니고 천진면목 나의 부처, 타고난 면목, 면목이라는 것은 본래 이 얼굴이라는 뜻이죠. 얼굴과 눈 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얼굴과 눈, 본래의 안목, 본래의 얼굴, 본래의 마음 이것이 사실은 보고 듣고 앉고 눕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 한번 깜짝할 때 천리만리 다녀오고 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다하게 신통묘용이 가능한 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고 참구하는 것이 바로 경허스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참선의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죠. 이 본래 명목, 본마음, 참나, 이 마음이라는 것이 본마음이라는 것이 정말 어떻게 생겼는가? 이것을 참구하는 법.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가 보통 말하는 마음이라고 할 때 마음을 잘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 구별 없이 마음, 마음이라고 표현하여 쓰지만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분별심을 뜻합니다. 내 마음이 아프다, 내 마음이 즐겁다, 내 마음이 슬프다. 이런 마음은 사실은 분별심인 것이죠.
나다, 남이다, 옳다, 그르다, 선이다, 악이다, 이익이다, 손해다 하고 이렇게 가르는 마음이 분별심이죠. 이것이 할 줄 아는 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시비하고 분별하는 겁니다. 보고 듣고 앉고 눕고 하는 것은 사실은 본마음자리에서 하는 것이므로, 분별심과 본마음을 잘 알아야 되요.
그럼 본마음은 어떤 것이냐 하면 본마음은 바로 평상심인 것입니다. 저 유명한 마조도일선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마조록에 보면 나오죠. 마조스님이 살던 절 근처에 출가한지 사십년이 지났지마는 경론을 강의만 했을 뿐 직접적인 수행을 안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화엄경에 보면 그런 말이 있습니다. “종일수타보(終日數他寶)에 자무반전분(自無返錢分)이니라”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는데 자신의 것은 반전의 몫도 없다. 여러분들 지금 은행에 가면 창구직원들이 있죠. 그들은 하루에도 수십억, 수백억씩 셉니다. 그러나 그게 자기 돈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다 남의 돈입니다.
“종일수타보 자무반전분” 그것과 똑같이 맨 날 경론을 강하고 이런저런 말을 하는데 자기 몫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그것처럼 이 스님도 올바른 수행을 제대로 못해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저승사자가 둘이 들이 닥친 겁니다. 저승사자가 들이 닥쳐서 “가자” 이러는데 “아~ 이게 무슨 지금 내가 벌써 갈 때가 됐나! 난 아직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애걸복걸해서 겨우 하루의 말미를 얻었어요.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어떤 수행을 해야 할 것인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승사자가 언제 들이 닥칠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맨 날 TV에 나오는 사건사고 강 건너 불로 보고 있죠? 실제로 사건사고를 당한 사람들과 당한 사람들의 가족들도 다 강 건너 불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그때서야 “이게 어쩐 일이야. 도대체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이렇게 해봐야 이미 늦었습니다. 이미 사전에 준비를 하셔야 되요. 그래서 겨우 하루 동안의 말미를 얻었지마는 그러나 그 하루 사이에 갑자기 뭐 수행방법이 생각이 날수가 없죠. 그래서 도일 마조스님께 스승님께 가서 의탁을 하고 있었어요. 마조스님 있는 데 까지 저승사자가 둘이 찾아왔죠. 그 다음날.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저승사자를 볼 수가 있었지만 저승사자는 두 스님을 보지 못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보질 못했으니깐 데려갈 수가 없죠. 저승사자가 데려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몸뚱이를 데려갑니까? 아니죠. 우리 몸뚱이를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죽었다 가보면 몸뚱이는 그대로 있죠. 그러면 무엇을 데려 갈까요?바로 우리의 분별심, 예, 분별심을 체 가는 거예요. 분별하지 않는 마음, 평상심, 우리가 평상심은 무분별심입니다. 평상심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 체 갈 수가 없다고 하는 거죠.
움직이지 않고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알아차릴 수가 없어요. 분별할 때 움직이기 때문에 고요한 바다 고요한 호수는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안갑니다. 유리창 너무 깨끗하게 닦아 놓으면 유리가 없는지 있는지 구분이 안가죠. 예,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평상심의 세계는 무분별심의 세계고 그것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고요하기 때문에. 근데 거기에 퐁당 돌 하나 던지면 파동이 일어나게 되고 잘 보이게 되죠. 그래서 딱 체가는 거예요. 그래서 참선이라는 것은 우리가 본래 지니고 있는 평상심, 무분별심, 본마음자리 바로 이것을 알아차리고 지켜 나가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아차리고 보는 것 그것을 선이라고 하는 것이죠!
성품자리를 제대로 보아야 그것을 지켜 나갈 수가 있고 또 한 생각 일어났을 때 그것을 쉬어나가기만 하면 되는 공부라고 하는 거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참선공부는 쉬어가는 공부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고 공를 향해서 가는 공부가 아니라 공으로부터 출발하는 공부다.
이런 점에서 다른 관법이나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법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죠. 일반적인 명상법이나 관법은 몸을 닦거나 마음을 닦거나 이런 것입니다. 요새 유행하는 기수련법 이런 것은 몸과 마음에 중간정도 수행법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참선은 몸을 닦거나 마음을 닦는데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고 본마음자리 본성을 보는데 초점이 맞추데 바로 이런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죠. 몸과 마음과 본마음자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본마음을 보는데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참선 수행법이다. 이것을 우리가 유념하면서 우리의 이 본마음자리 “과연 이것이 어떤 건가? 어떻게 생겼을까?”하고 챙겨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화두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은 자신과의 만남의 시간이죠. 자신의 본마음자리를 돌이켜 보고 그것을 그대로 지켜나가는 공부입니다. 참선을 통한 마음공부로 자비와 광명을 실천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미덕을 갖추지 못했으면 가진 척이라도 하라.” 셰익스피어의 말입니다. 미덕을 갖춘 자신의 모습을 이미지로 그리고 그것을 마음속으로 항상 가진 직한다면 미덕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의미겠죠. 밑그림이 좋아야 진짜 그림도 좋아집니다. 머릿속에 훌륭한 사람을 그려 놓는 것과 그냥 저냥 대충 그려 놓는 것과는 차이가 벌어지게 마련이죠! 자신의 이미지를 늘 멋있게 아름답게 또 당당하게 그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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