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기술+참선곡, 행불어록

경허스님 참선곡 6

혜주 慧柱 2009. 8. 7. 17:55

◈우리의 탐진치 삼독을 전환 시키는 겁니다◈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잡듯이

주린사람   밥찾듯이   목마른이   물찾듯이

육 칠 십   늙은과부    외자식을   잃은후에

자식생각  간절하듯    생각생각   잊지말고

깊이궁구  하여가되    일념만년   되게하여

폐침망찬  할지경에    대오하기   가깝도다

 

지난시간에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사람들을 대해서 말하고 일체처와 일체시에 또렷또렷하고 신령스럽게 알아차리는 이것이 어떤 것인가? 어떻게 분명한 나의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이렇게 참구를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앉고 눕고 하는 것이 몸뚱이로 하는 것이 아니고 몸뚱이는 매개체 역할을 할 뿐이고 진정으로 그런 것을 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래서 이 마음, 마음가운데서 본마음 이것이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 참구를 하도록 이렇게 경허선사께서 화두를 내리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화두에 대해서 의심하고 의심하되 어떤 식으로 의심을 하느냐?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 마른이 물 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가 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생각 간절하듯 이렇게 참구를 하라고 하신 거죠.

간화선에선 ‘화두를 간 한다.’ 해서 간(看)자를 씁니다. 이 간자는 간호사할 때 간자와 같은 간자죠. 그래서 볼간 자인데 간호사가 환자를 지켜보듯이 화두를 지켜봐야 한다는 소리가 되겠습니다. 지켜보라는 소리는 무엇이냐 하면간호사가 환자를 돌본다고 해서 한 환자만을 곁에서 뚫어지게 앉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자기할 일 여러 환자들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간호를 하되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주사도 놓아주고 때가 되면 혈압이나 체온 등 측정을 하고 이렇게 수시로 가서 들여다보고 이렇게 하는 것을 말하죠. 그래서 간호사할 때의 간자와 간화선할 때의 간자를 같은 볼 간(看)을 쓴다는 것을 힌트로 유념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화두를 간하는 방법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의심해 나가야 하는데 있어서 간화선의 삼요, 즉 세 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첫째가 대신심, 둘째가 대분심, 셋째가 대의심, 다시 말해 커다란 신심, 커다란 분발심, 커다란 의심을 가지고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심이 커야 깨달음이 크다. 고봉스님의 선요에는 많이 말씀이 자세히 나와 있지만,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탐, 진, 치 삼독을 전환시키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본래 사람을 세 가지로 분류를 합니다. 유난히 탐욕이 많은 사람을 탐행자, 유난히 성질을 잘 내는 사람을 진행자, 유난히 뜨문뜨문한 사람을 치행자,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 탐, 진, 치. 탐욕이 많거나, 성질을 잘 내거나, 좀 어리석거나 하는 것들은 저마다의 속성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탐, 진, 치 삼독이야 말로 전환시키면 수행의 요소로 쓸 수 있다 하여 삼요입니다.

탐욕심이 많은 사람이 마음을 전환하면 신심이 강한 사람 즉 대 신심자로 변환시키는데 이는 큰 욕심, 즉 부처를 보고자 하는 욕심, “내가 절에 다닌 지 이십년, 삼십년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부처님을 못 봤는데, 이제는 내가 한번 보겠어!” 이것이 바로 큰 욕심입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욕심, 나도 한번 깨달아 봐야지 내지 기도해서 가피를 한번 얻어 보자 하는 욕심, 경전의 뜻을 달통하고자 하는 욕심, 중생을 제도 하고자 하는 욕심 이런 것들이 바로 대신심입니다.

그러면 둘째는 대분심. 성질을 잘 내는 사람들은 본래 분별력이 강해서 성질을 잘 낸다고 하죠. 분별심이 많다는 것은 순간순간 상호판단을 잘 하는 겁니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따지길 좋아하고 성질을 잘 내는데 그런 것들을 자기에게 성질을 낸다하는 거죠. 남들은 한 소식 했다는데. 남들은 부처님을 친견 했다는데. 이런 식으로 자기에게 성질을 돌이켜 내는 것. 이것이 바로 대분심입니다. 분발심. 자기 스스로 “나도 한번 해 봐야겠다. 난들 못할 소냐?” 하고 이렇게 분발심을 일으키면 대분심이 되고.

대의심. 어리석은 사람, 뜨문뜨문한 사람은 모르는 것이 많잖아요. 그러니깐 내가 한번 자자란, 쪼만쪼만한 의심. 이런 것을 뛰어올라 한번 큰 의심을 한번 내 보자. 큰 의심이 무엇이냐? 화두에 대한 의심입니다. “본마음, 참나 라는 것이 있다는데 도대체 어떤 건지? 어떻게 생긴 건지? 내가 한번 이것을 알아야 되겠다.”하고 의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대의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도 있습니다. “의심을 뭐 하러 냅니까? 그냥 신심만 내며 살면 되지.” 그러나 제가 그런 분들에게는 무쇠와 강철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무쇠는 약합니다. 대장장이가 무쇠를 용광로에 불로 달궈서 망치로 내려치고, 그래 가지고 단련을 시켜서 강철로 만듭니다. 강철로 되어야 비로소 깨지지도 않고 어느 용도에나 맞추어 쓸 수 있는 쓰임새를 갖게 되는 거죠!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론적으로만 본래 부처인데 뭐 의심될게 있냐! 일체중생이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데, 내가 부처라는데. 하고 이런 맘만 가지고는 힘이 안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내가 본래 부처다.”는 신심만 가지면 되지 거기다 의심을 새로 내서 다시 또 갈 필요가 있느냐! 라는 이치적으로 그냥 생각으로 신심만 가지고 알아서는 생사일대사에 직면해서 힘이 안 된다는 것이죠.

 

 

 

◈엄청난 끈기가 필요합니다.◈

 

심신을 단련하고 단련시켜 진정한 내 것으로 하려면 무쇠를 내려치고 내려쳐 강철로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고 또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는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쥐구멍 근처에서 계속 지키고 있다 마침내 쥐가 나오기만 하면 잡음으로 엄청난 끈기가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제가 사는 국사암 문 앞에 사천왕수라는 거목이 있어요. 하루는 아침공양을 하고 그쪽으로 포행을 갔는데 커다란 두꺼비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한 2m정도 거리가 떨어져서 마주보고 가만히 앉아 있더라고요. 두꺼비 보면 귀엽게 생겨가지고 구경할 만합니다. 나도 한쪽 켠 으로 가만히 앉아서 두꺼비들이 뭘 하나 지켜보았더니 두 두꺼비마리의 가운데에 왕개미들이 한 수백 마리가 왔다 갔다 하고 있더라고요. 그러고 보니깐 과자부스러기라도 떨어져 있는지 먹이를 찾으러 왕개미들이 모였던 거예요. 두꺼비 두 마리가 양쪽에 가만히 있다가 자기 앞으로 오는 놈들만 쏠랑쏠랑 잡아먹는데, 두꺼비가 평소에 보면 거동이 느려 보이는데 혓바닥이 나왔다 들어가는 것이 어찌나 빠른지 정말 빠릅디다. 가만히 앉아서 잡아먹으니깐 나중에는 왕개미 숫자가 반으로 줄어들 정도였는데 왕개미들은 동료들이 잡혀 먹는지 안 잡혀 먹는지 모르고 그냥 자기들 먹이에만 정신이 빠진 왕개미들을 보면서 자기가 하루하루 죽음의 길로 가까워 가는 것을 모르는 중생과 먹이에 정신 팔려 왔다 갔다 하는 왕개미나 그 모습이 유사하다는 것을 느꼈던 일이 지금 생각이 나네요.

그래서 고양이가 쥐 잡듯이 두꺼비가 왕개미 잡듯이 그저 꾸준하게 앉아서 기다린다. 그 다음은 주린 사람 밥 찾듯이, 사흘을 굶어서 담장 안 넘는 사람이 없다고 하죠. 밥을 굶게 되면 아무 생각이 없어집니다. 모든 것이 다 먹을 것으로 보이게 되죠. 길거리를 다녀도 음식만 눈에 띄게 되고 이렇게 주린 사람이 밥 찾듯이 화두를 챙겨야 된다. 또 목 마른이 물 찾듯이 화두를 챙겨야 된다. 목 마른이 물 찾듯이, 목이 마를 때는 아무생각이 없죠. 물만 생각나죠. 제가 몇 년 전에 인도에 배낭여행을 간적이 있었어요. 그때 인도 땅을 두루 돌았는데 한번은 사막 사파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막에서 며칠 동안 낙타를 타고 모래사장을 걸어 다니는데 처음에는 물론 시원한 물도 다 준비하고 갔는데 나중에는 뜨끈뜨끈해지고, 사막을 계속 다니니깐. 나중에는 어떻게 갈증이 나든지 아무생각 없고 그냥 물만 생각이 나데요. 시원한 물 좀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 인도에 가면 길거리에서 이거 사라. 저거 사라. 얘들이 와서 붙들고 심지어는 시원한 생수사라고 붙들고 귀찮게 하거든요. 근데 귀찮게 느껴졌던 아이들이 지금 내 옆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만나데요. 나 보고 얼음에 채운 시원한 생수를 좀 사먹으라 하면 좋겠는데 할 정도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물만 시원한 물만 그려지는 그런 경계 그거야말로 정말 아무생각 없이 오로지 물 물 물 하듯이 오로지 화두, 화두, 화두 이렇게 되어야 공부가 되어 간다고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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