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기술+참선곡, 행불어록

경허스님 참선곡 10

혜주 慧柱 2009. 8. 7. 17:59
◈공부의 경계가 열리면 선지식으로 부터 정검을 받아라.◈
  
선지식을   찾아가서   요 연 히   인가마쳐   다시의심
없앤후에   세상만사   망각하고   수연방광   지내가되
빈배같이   떠놀면서   유연중생   제도하면   보불은덕
이아닌가
  
선지식을 찾아가서 요연히 ‘요연히 하라’는 ‘분명하게’라는 소리죠. 분명하게 인가를 받아서 다시 의심을 없앤 후, 즉 화두에 대한 의심 또 자신의 공부에 대한 의심을 없앤 후, 세상만사를 망각하고 다 잊어버리고, 수연방광 수연이라는 것은 연 따라 또는 인연 따라, 방광 여기서 방광이라고 하는 것은 허널리. 옛날엔 이렇게 번역을 했어요. 놓아서 넓게 지낸다. 호호탕탕한 모습 그런 모습을 생각하면 됩니다. 넓은 호수에 배가 그저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하는 그런 모습. 그것이 바로 이 방광 허널리 지내는 모습이죠. 지나가되 빈 배같이 떠 놀면서 유연중생 제도하면,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해 주면, 보불은덕 이 아닌가? 부처님께 은덕을 갚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이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지난시간까지 열심히 공부해서 ‘패침 망찬의 할 지경에 대오하기 가깝도다’ 그리고 나서 ‘지옥천당 본공하고 생사윤회 본래 없다.’ 거기까지 했어요. 무아법에 통달하게 되면 그런 경계가 열린다고 하죠.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공부를 해서 어떤 경계가 열리거나 어떤 정신적 체험을 하게 되면 나 혼자서 그냥 “내가 공부가 됐나보다. 내가 깨달음을 얻었나보다.” 이렇게 막연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선지식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선지식이란 나보다 먼저 공부를 성취하신 분, 마음의 눈을 뜨신 분이 바로 선지식입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인정을 받는 선지식을 찾아가서 “저가 이러이러한 경계가 나타났는데 이것이 옳습니까?” 이런 식으로 “어떤 경계입니까?”하고 선지식으로 부터 점검을 받아야 되겠죠.
경허스님의 재미있는 일화가 많습니다만 그중에서 하나, 만공스님과 하루는 탁발하고 같이 길을 갔어요. 쌀자루에 쌀이 가득히 담겼습니다. 과거에 탁발을 하면 쌀로 많이 주셨죠. 한대박씩 주는 거 이리저리 모으니, 짐은 무겁고 길은 먼데 해는 점점 져가고~ 그래서 만공스님이 걱정을 했죠. “이거 아직 갈 길은 먼데 해는 뉘엿뉘엿 지고 짐은 무겁고~” 걱정을 하고 있으니깐 경허선사께서 “내 자네의 걱정을 해소 시켜주지.” 그러고서는 앞에서 물동이를 이고 오는 아낙이 있었는데, 물동이를 이고 있으니깐 손은 물동이를 잡고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 상황에서 아낙네 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시더니 갑자기 얼굴에다가 뽀뽀를 “팍”해 버린 거예요. 마침 아낙네는 새댁 이였는데, 거기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논밭에서 자기 남편하고 동네아저씨들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겁을 했죠.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니까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놀라 무두 달려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선 만공스님하고 경허스님은 도망을 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저기 걸렸다가는 맞아 죽게 생겼으니깐 죽어라고 도망을 치는 겁니다. 달려서 마침내 높은 산을 순식간에 넘은 거예요.
그러고 나서 경허스님이 만공스님을 돌아보면서 “어떤가? 우리가 금방 와 버렸지!” 하였다는 일화가 지금까지도 전해집니다. 그런 것처럼 선지식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우리들의 중생들로써는 감히 재단하기 힘든 그런 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선지식을 자신의 눈에 잣대만가지고 재단해서는 안 됩니다.
  
  
◈계정혜 삼악 중에 하나라도 갖추면 선지식이다.◈
  
간혹 보면 선지식이 있네, 없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식은 도처에 있습니다. 다만, 내가 마음의 눈이 얼마나 뜨여 있고, 내가 얼마나 선지식을 볼 줄 아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죠. 그러니 선지식을 쉽게 재단해선 안 되는 겁니다. 항간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스님들을 평가를 합니다.
간혹 백고자 법회에서 “이 스님은 어떻고 저 스님은 어떠하며, 뭐는 좋은데 뭐가 나쁘고, 아무게 스님은 뭘 잘하는데 뭐를 못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전부 재단을 해 버려요. 그건 정말 자기에게 맞는 자기가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선지식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 그 사람 기준에서 보면 정말 계율에도 철저하고, 선정도 많이 닦고, 지혜도 훌륭한 이런 스님을 구하는 거예요.
‘계 정 혜’ 삼학을 완벽하게 통달한 사람이 ‘진정한 선지식’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어디 그럼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부처님이 다시 태어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자기마음속으로 그리는 그런 계율도 철저하고 선정도 엄청 닦아서 마음도 푹 쉬고 지혜도 엄청 밝아 누구든지 통쾌하게 지도해 줄 수 있는 선지식, 이런 분을 찾다보니깐 없는 거죠. 이런 사람은 평생 자기공부를 못합니다.
그러면 안 되고 계정혜 삼학 중, 하나라도 갖추었으면 선지식이라 믿으며, 이분은 계율에 철저한 분이니 철저한 계율의 면을 배우고, 이분은 참선을 하여 마음이 쉬신 분이니 마음을 쉬게 하는 공부를 하고, 또 이분은 지혜가 밝아 불법을 명쾌하게 풀어 주시니 이분에게는 밝은 지혜로서 명쾌하게 불법을 배우면 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자기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으면, 한 가지라도 그 분야에서는 나에게 선지식인 것이죠.
  
  
◈연따라 산다는 것은 지혜로운 삶이다.◈
  
요즘 세상은 전문화시대입니다. 옛날 사회에서는 모두 다 잘 하는 사람들을 참 훌륭한 사람이라 한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다 잘하는 사람은 결국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분야에 잘 하는 사람. Pro, 즉 작가면 작가 이렇게 하나. MC면 MC, PD면 PD, 한 분야에 완전지존으로 그 분야를 잘 해야 하는 것이죠. 조금의 기본은 있어 경우에 따라 작가가 MC도 하고 PD도 하여 겸사해서 잠시 할 수는 있겠지만 전문적으로 다 잘 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 한 분야에 뛰어난 면이 있는 분을 보면 그분 따라 그 분야에 나의 선지식이라 하고 고개 숙여 삼배하고 진실하게 배우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엉뚱한 면을 보고, 단점을 보고 찾다 보면 장점마저도 취할 수가 없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을 만한 선지식을 보았다면 찾아가서 분명하게 자기마음 상태, 공부의 경계, 이런 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그리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잘 받아들여야 됩니다.
몇 년 전에도 어떤 거사님 한분이 저에게 찾아온 적이 있어요. 자기 나름대로의 공부를 했다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경계냐고 물었더니 텅 비었고 아무것도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자기가 공부를 하던 도중에 체험을 했다는 겁니다. ‘텅 비고, 우주가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죠. 본래 공한 것, 즉 본공이죠. 그러나 텅 비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 만가지고는 진정한 경계에는 이르지는 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텅 비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공에 떨어진 경계입니다. 공에 떨어져서는 안 되고 눈앞의 세계가 텅 비어 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도리를 찾아내는 것이 진공묘유의 세계를 터득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신묘한 이치를 얘기해 주면 공부가 덜 됐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자신의 말을 안 믿어 준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 여러 가지를 보면서 사람은 역시 자기의 경험을 충실히 따른다는 느낌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다시의심 없앤후에 세상만사 망각하고’ 그래서 선지식에게서 인가를 분명히 받고 믿어서 확실해지면 선지식에 대한 의심은 다 사라지게 되는 거죠. 세상만사에 대한 애착을 다 쉬는 것입니다.
‘수연방광’ 연 따라서 허널리 지낸다. 우리가 이 세상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이런 질문을 많이 하게 되죠.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갑니까? 촛불을 예로 들어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성냥을 켜서 초에 불을 붙이면 켜지고 이를 촛불이라 합니다. 그 다음 입으로 후하고 불면 불은 꺼집니다. 그러면 촛불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사람이나 촛불이나 똑같습니다. 실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느냐 하는 질문이 어불성설입니다. 즉 연 따라 왔다 연 따라 가는 겁니다. 초의 인에 성냥불의 연이 닿아서 불꽃이 붙으면 촛불이라는 과가 발생한 것이지요. 이것을 인연소기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지와 성냥불이 만나서 촛불이 생겨났다가 후하고 불어서 꺼버리면 꺼버리는 연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연 따라 왔다 연 따라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 따라 산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연이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고, 연이 있는 것을 안 하려고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겁니다.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고, 할 수 없는 일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안 하면서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래서 연 따라 산다는 것은 지혜로운 삶이 되겠습니다.
  
  
◈행불행자의 서원 “법륜을 굴리겠습니다.◈
  
‘방광 허널리’ 
확실히 비우고 떠 놀면서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어떤 애착도 쉬게 되면 머무름이 없게 되죠. 머무르지 않는 삶. 이거야 말로 지혜로운 삶이죠. 과거에 머무르고 저 사람에 머무르고 미래에 머무르고 이렇게 머무르다 보니 바로 지금 여기에서 완전 연소하는 삶을 못 살게 되는 거예요. 몸뚱이는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과거에도 갔다가, 미래로도 갔다가, 저기로도 갔다가, 여기로도 갔다가 이럽니다. 그래서 참선공부를 처음 하는 분들에게 좌선연습하면서 그 마음을 연습하게 합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게 하라”
우리가 과연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지 알아봐야 합니다. 몸뚱이와 마음이 따로따로 놀고 있는지도 참구해 봐야합니다. 이걸 잘 생각해 봐야 되요.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도록 연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완전연소에 지름길입니다. 내 몸이 있는 이곳에서, 바로 지금 여기서, 나에게 대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충실할 때 나의 인생이 충실해지는 거예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대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실하게 대하면서 과거에 대해서 후회를 하고, 미래를 앞당겨서 걱정하고, 이것이 부실한 삶인 것입니다. 불완전 연소하는 삶이지요. 불완전 연소하면 연기만 나고, 눈물, 매캐한 냄새 맡아야 되고 콧물을 막 흘려야 됩니다.
완전연소하게 되면 연기가 없죠. 타 버려서 찌꺼기가 남지 않으니 후회가 남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 연소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완전 연소하는 삶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항상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게 하라.’ 이것은 아주 중요한 하나의 연습이 되겠습니다.
  
‘유연중생 제도하면 보불은덕 이아닌가’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한다. 인연이 있는 중생부터 제도해 나가는 겁니다. 기름진 밭부터 먼저 갈고 중간 밭 갈고 그리고 또 여력이 남으면 자갈밭까지 갈면 되는 거예요. 내 주변에 기름진 밭은 나두고 자갈밭부터 갈겠다고 막 들이대는 것도 사실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자갈밭부터 갈다가 지쳐나가 떨어지다 보면 정작으로, 조금만 공덕을 들여도 갈아지는 기름진 밭을 파종할 시기 다 놓치는 격이 됩니다. 중간 밭도 마저도 다 놓치게 되니 내 주변의 기름진 밭부터 갈고, 여력이 있으면 중간 밭 갈고, 그러고 여력이 남으면 자갈밭까지 가는 그런 것이 바로 유연중생을 제도하는 거죠.
부처님께서는 탁발을 하셨어요. 부처님같이 덕 높고 복 많으신 분이 왜 걸식을 하셨을까? 의심하겠지만 사실은 부처님께서 탁발하신 것은 걸식 그 자체가 중생들과의 연을 짓기 위하는 것입니다.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중생들에게 연을 지어 주시는 거예요. 이래서 연이라는 것도 사실은 만들어 나간다고 하는 것이죠.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좀 소극적인 표현이고 인연이 없으면 인연을 만들어 가면서 제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법륜을 굴리겠다는 행불행자의 서원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도 부처님처럼 인연을 일부러라도 지어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제도하면서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불자로써의 부처님은혜를 갚는 것이죠. 우리가 스스로 대장부가 되고 주인이 되는 가르침, 이걸 만났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부처님께 이런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름 아니라 중생들에게 법륜을 굴리는 것, 이것이야 말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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