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
2004년 5월 26일 부처님오신 날
오늘 아침 산을 내려오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 부처님 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쯤 무엇이 되어 있을까? 카드빚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을까? 혹시 무료 급식소나 기웃거리지 않을까? 제가 한때 원했던 산지기나 등대지기의 자리에서도, 아마 지금쯤은 세월의 물결에 휩쓸려 밀려났을 것입니다.
한사람의 출생은 그 정신적 깊이만큼 주위의 파장을 일으킵니다. 부모와 친구, 스승의 영향도 적지 않지만 종교적인 성자의 경우에는 그 영향이 온 세상에 널리 파급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단순한 출생만으로는 존재의미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 삶의 모습과 자취가 온 세상에 빛을 발할 때, 세상의 어둠을 밝힙니다.
오늘을 ‘부처님오신 날’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일찍이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찾아서 만나야 할 존재입니다. 그럼 부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내가 부처님을 만난 적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부처님을 어느 특정인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2,500년 전 인도 석가족의 성자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처라는 말은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입니다.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를 한정된 틀에 가둘 수는 없습니다. 불자들이 현재 이해하고, 믿고, 행하고 있는 것만을 불교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비불교적인 것을 불교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부처나 불교를 어떤 틀에 고정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부처도, 그 가르침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살아 있는 부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특정한 인물만을 부처로 떠받들려고 하기 때문에 스치고 지나갑니다. 부처를 어떤 특정 인물로 고정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살아 있는 참 부처를 놓치게 됩니다.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부처님이 살아 계실 당시의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에게는 박카리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박카리가 중병이 들어 나을 기약 없이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 부처님을 꼭 한 번 뵙고 하직 인사를 드리는 것이 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간호해 주던 스님에게 부탁해서, 부처님을 마지막으로 한 번 뵙게 해 달라고 청을 드립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부처님이 앓고 있는 박카리를 찾아갑니다. 이때 박카리가 부처님에게 소원을 말합니다.
“죽기 전에 부처님을 꼭 한 번 뵙고 하직 인사를 드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부처님은 정색하며 말합니다.
“언젠가는 썩어질 이 몸뚱이를 보고 예배를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아야 하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모아야 한다. 진정한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라.”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진리, 혹은 도리입니다. 부처님을 본다는 것은 부처님의 육신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정신과 가르침, 세상의 도리를 보는 것입니다. <금강경>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若見諸相이 비상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니라.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한 것, 허망하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이 실상이 아닌 줄 안다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허상입니다. 그렇기에 현상이 실상이 아닌 줄 안다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어느 특정한 시대나 장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불타 석가모니는 육신의 나이 여든이 되어 생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법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등불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自燈明 法燈明.”
여기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성내고, 화내고, 삐뚤어진 자기가 아니라 본래적인 청정한 자기입니다. 이것이 불교가 타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설령 부처님 자신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타인입니다.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할 것은 본래적인 자기와 진리, 이것뿐입니다. 자신과 진리를 제쳐 두고 다른 데 의지하는 것은 일시적인 위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에 선 것에 불과합니다.
인생의 길은 저마다 자기 자신이 걸어가야 합니다. 누구도 대신 가 줄 수 없습니다. 살고 죽는 일도 각자의 몫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장경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가르침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그때 그곳에 그렇게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며,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바로 그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무엇에도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깨어 있으며 삶의 지혜와 사랑을 실천하는 그 자리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지혜와 사랑을 스스로 행하는 그때 그곳에 부처님은 오십니다.
여래如來라는이름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에 도달한 자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진리에서 온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말하러 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타타가타, 타타아가타, 이렇게 두 가지로 불립니다.
부처님 탄생게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태어나자마자 갓난아기가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세에 부처님을 신격화한 데서 온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깊은 불교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를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살아 있는 것은 다 존귀하다.”
이 세상에 귀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선언한 말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안락과 행복을 바랍니다. 폭력과 죽음을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이와 같은 도리를 안다면 남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해쳐서는 안 됩니다. 결국 그것은 크게 보면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고, 스스로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의 뿌리입니다. 생명의 무게를 다는 저울이 있다는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그런 저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하고 듣고 있는 것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 때 혼자만 죽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 그와 관계된 모든 세계가 함께 무너져 내립니다. 심지어 그가 평소에 지녔던 물건까지도 빛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인가를 명심해야 합니다.
어린 생명을 죽이는 동반 자살은 분명 살인 행위입니다. 왜 어린 싹들을 죽입니까? 돈 때문에 생명을 수단으로 여기는 일은 일반 동물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만의 소행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생명의 높고 귀함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식물이든 동물이든 다 존귀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동물의 사랑이 더 지극하고 원시적입니다.
오늘날 지구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우리가 각성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입니다. 우리가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 지구는 인간만의 독무대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것들 끼리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커다란 생명 공동체입니다. 이 지구는 무기물이 아닙니다. 그 커다란 생명체 가운데 하나가 우리 자신들이고 개체입니다. 부처 탄생의 노래인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하늘과 땅 사이에 살아 있는 것은 다 높고 귀하다.”
종교는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친절과 자비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절에 다니고, 교회에 다니는 것 그 자체는 대단할 것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배워 오는 가르침들을 일상의 삶 속에서 행할 때,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종교를 ale고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진짜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고, 신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행이 없고 종교적인 이론만 머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회색의 이론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어떤 가치도 없습니다.
오늘 부처님오신 날을 기리기 위해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 이 시대 이 공간에서 다 같이 부처와 보살이 되십시다. 자비심이 곧 부처이고 보살이라는 말을 깊이깊이 새겨 두십시오. 이와 같은 우리들의 결의가 곧 부처님을 이 땅에 오시게 하는 일이고, 우리 불교도들의 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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