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신심명, 그리고 일기일회

35), 노파가 암자를 불태우다

혜주 慧柱 2010. 5. 23. 07:42

노파가 암자를 불태우다

2004년 2월 5일 겨울안거 해제

 

해가 바뀌면 나이가 한 살씩 보태지는 사람도 있고 한 살씩 줄어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태지는 쪽인지 줄어드는 쪽인지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육신의 나이는 세월이 알아서 하니까 집착할 것 없습니다. 사람은 살아온 세월만큼 인간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성숙할수록 젊어집니다.

성숙해져야 모든 것이 제대로 보입니다. 전에는 결코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나이를 먹고 안으로 여물기 시작하면 새롭게 다가옵니다. 산마루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자기가 한 걸음 한 걸음 밟고 올라온 길이 한눈에 내다보입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의 역사서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재가신도인 보살이 한 스님을 지극히 받들어서 공양합니다. 그 스님도 점잖고 빈틈없는 분이었습니다. 20년을 두고 하루같이 섬겼습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암자에 모시고 보살폈는데, 보살은 열여섯 살 난 자기 딸에게 늘 스님에게 가져다줄 음식을 나르도록 시켰습니다. 20년 동안 날랐으니 그 집 딸도 서른여섯 살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딸에게 말합니다.

“오늘 공양을 가져다 드린 뒤 스님을 끌어안고서 이렇게 물어 보거라. ‘스님 이런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평범한 보살이 아니고 식견이 있는 보살입니다. 이것은 요즘 이야기가 아니라, 약 천 년 전의 오래된 일입니다.

딸이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스님을 껴안으며 묻자, 스님이 대답합니다.

“마른나무가 차디찬 바위에 기대니 한겨울에 따뜻한 기운이 없다枯木依寒巖 三冬無暖氣.”

아주 빈틈없이 열심히 수행을 한 스님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자기 품에 안기는데도 차디찬 바위처럼, 고목처럼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경지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그 말을 전해 듣고 크게 분개합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20년 동안 겨우 속한俗漢을 공양했더란 말이냐.”

속한이라는 것은 속물, 사이비 중입니다. 보살은 당장 그 스님을 암자에서 쫓아냅니다. 그리고 암자를 불태워 버립니다.

20년 동안 제대로 수행을 했다면 마른나무가 되어서도 안 되고 차디찬 바위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20년 동안 수행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종교와 도덕의 차이가 있습니다. 종교와 도덕은 다 같이 선을 추구하면서도, 종교는 상식의 틀에서 벗어납니다. 극복하고 뛰어넘습니다. 그것이 종교의 세계입니다.

도덕은 인간의 윤리를 그대로 짊어집니다. 착한 일을 해야 하고, 남의 여인을 끌어안아서는 안 됩니다. 도덕적인 입장에서 보면 수행자가 여인을 차디찬 바위와 고목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종교적인 세계에서는 아닙니다. 그래서 보살이 그 스님에게 속았다며 당장 내쫓아 버리고 암자를 불태운 것입니다. 이 일화는 선의 역사에 ‘파자소암婆子燒庵’이라는 화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줏밥이란 이렇듯 무서운 것입니다. 스무 해 동안 수행했다는 사람이 겨우 마른나무와 차디찬 바위를 닮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이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각자 생각해 보십시오. 보살님들은 남자에게서 시봉을 받았다고 가정하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럴 때 나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

저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딸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거려 주면서 이렇게 칭찬하겠습니다.

“그래, 20년 동안 나를 위해서 참 수고 많이 했다.”

오늘이 겨울안거 해제일입니다. 맺은 것을 푸는 날입니다. 살다보면 사람끼리 맺힐 일이 있습니다. 맺힌 것도 나로 인해서 맺혔고, 맺힌 것을 푸는 것도 내가 나서서 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인의 자세입니다. 자신이 주체입니다.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그때그때 좋지 않은 것을 털어 버리는 일입니다. 묵혀 두어서 안 됩니다. 묵혀 두면 그것이 업의 그림자가 되어 내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해도 그 업력에 이끌려 잘되지 않습니다.

<반야심경>에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안팎으로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 걸림이 없어야 본질적인 자기가 드러납니다. 걸림이 있으면 어딘가에 묶어 버립니다. 더구나 인간관계에서 맺힌 것이 있으면 아주 부자유스럽습니다. 마음이 상쾌해야 부자유가 사라집니다. 다 풀고 쉬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마지막에 남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입니다. 남에게 따뜻한 내 마음을 열어 보인 일만 자신의 자산으로 남을 것입니다.

옛날 농경사회에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이웃이 없으면 살 수 없도록 사회가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시화되고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이웃이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작은 자기에 갇혀 큰 자기를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얼마든지 크게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늘을 넓게 드리울 수 있습니다. 타인과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음으로써 나 자신이 전체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성숙한 삶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살아온 세월만큼 성숙해져야 합니다. 인간은 성숙해질수록 젊어집니다. 세월에 찌들지 말고 더 젊어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