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신심명, 그리고 일기일회

37), 언젠가 세상에 없을 그대에게

혜주 慧柱 2010. 5. 23. 07:45

언젠가 세상에 없을 그대에게

2003년 11월 8일 겨울안거 결제

 

요즘 남쪽 차 고장에는 차 꽃이 핍니다. 제가 몇 해 전 겨울 한 철을 동해안 쪽에서 지내며 차 씨를 얻어다 심었는데 작년부터 차 꽃이 피었습니다. 차 꽃은 모든 꽃이 다 지고 난 늦가을에서 초겨울까지 핍니다. 차 꽃은 겸손해서 아래를 향해 핍니다.

차 꽃에는 베이지색 노란 꽃술이 달립니다. 꽃을 따서 향기를 맡으니 찔레꽃 향기와 같습니다. 따서 찻잔에 올려 차 한 잔을 마시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행복을 거창한 곳에서 찾지 마십시오. 내 둘레의 사소한 것으로 더없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비가 촉촉이 와서 단풍 빛깔이 선명해졌습니다. 성질이 급한 잎사귀들은 벌써 지고 있습니다. 따서 가져가도 되니까 집에 돌아가실 때 단풍잎 몇 장 따다가 수반 같은 곳에 한두 장 띄워 보십시오, 집 안 분위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꽃시장에 갈 필요 없이 가을의 정취가 집 안까지 들어옵니다.

사는 일이 그렇습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삶이 팍팍해집니다. 그것이 하나의 삶의 운치이고 물기입니다. 그저 경제 타령만 하고 걱정에만 휩싸여 있으면 우리 가장 가까이에 있는 행복의 소재들을 모른 체하고 지나치게 됩니다. 메마른 감성에 촉촉하게 물기를 적셔 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세상이 변해 가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인식은 살아가는 데 근원적인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너무 삭막한 나머지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보면 어디에든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우리 집에도 있습니다.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가꾸어야 합니다. 자기 삶을 가꾸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습관이 안 되어서 그렇지만, 집 안에 가끔 꽃을 두십시오.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고기 몇 근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런 사소한 데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까 집 식구들이 살벌해지고 정서가 메말라서 걸핏하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가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사소한 것이지만 둘레에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삶을 꽃피어나게 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생활의 꽃은 마치 모든 꽃이 지고 난 다음에 피는 차 꽃 같은 것입니다. 남들이 시시하게 여기고 돌아보지 않는 상황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입동立冬, 겨울이 시작되는 날이고 음력10월 보름 겨울안거 결제일입니다. 안거는 내일부터 시작됩니다. 세월에 달리 결제가 있고 해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세월에 금을 그어서 결제니 해제니 하지만, 사실은 맺을 것도 풀 것도 없습니다. 맺고 푸는 것은 어디까지나 범부의 일입니다. 장부에게는 본래 맺을 것도 풀 것도 없습니다. 그럼 오늘 이 결제일이 누구를 위한 결제일인지, 어떤 사람을 위한 맺음인지 각자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남은 목숨이 앞으로 3년밖에 없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의사로부터 선고를 받았든 혹은 염라대왕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든 앞으로 나 자신이 3년밖에 못 살 거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런 선고를 받으면 정신이 번쩍 들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하나의 과제로 떠오릅니다. 동시에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과연 바람직하게 소모해 왔는가, 아니면 부질없는 일에 쏟아 버렸는가, 돌아보게 됩니다. 삶에서 어떤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고 중요한 일인지 스스로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다면 그런 것들을 챙길 여유가 생기지 않지만, 앞으로 주어진 시간이 단 3년뿐이라고 못을 박으면 그 3년이라는 세월을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것이 진정으로 사는 일이고 부질없는 일인지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선순위를 헤아려 봐야 합니다. 우리들의 남은 목숨이 일 년이 될지, 한 달이 될지, 일주일이 될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생사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순간순간을 소홀히 지낼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나이를 먹은 탓인지, 그동안 육신의 나이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살아왔는데 최근에 와서야 이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올해 몇 살이지? 몇 년을 살았지? 나한테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될까?’ 2,30년 전 제가 불일암에 처음 갔을 때가 섣달 그믐날이었습니다. 누워서 자다가 ‘내가 설 쇠면 몇 살이지?’ 하며 헤아려 보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머지않아 50살? 60살?’ 셈이 여기에 까지 미치자 순간 아득해졌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돌이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보다 먼저 간 사람들, 태어나자마자 간 사람도 있고 10년쯤 살다 간 사람도 있고, 20대에 데모하다 총 맞아서 간 사람도 있고, 교통사고로 간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내가 이 나이만큼 살았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러자 마음의 위로가 되고 ‘남은 세월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더욱 깨어 있게 되었습니다. 절에 들어와 중이 되어서 시주의 은혜만 입고 그 은혜를 갚지 못하면 빚만 잔뜩 지고 가는 생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끔 내 남은 세월의 잔고를 헤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자기 생의 섣달 그믐날을 맞이할지 알 수 없다는 자각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하루를 자기 생에 최후의 날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미루면 후회가 남습니다. 그날 할 일은 그날 하면서, 마치 내일이면 이 세상에 없을 것처럼 후회 없이 살라는 것이 앞서 간 모든 사람들의 교훈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때를 아무렇게나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 한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번 겨울철 안거 기간에는 먼저 무의미한 걱정 근심에서 벗어나십시오. 현재를 충만하게 살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가지고 불행해하거나 오지도 않은 불확실한 미래를 가지고 미리 걱정 근심을 앞당기니까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순간순간의 연장이 한 생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즐거움만으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기에 나 자신만이라도 즐거움을 만들며 살아야 합니다. 즐겁게 살되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됩니다. 각자 자기 삶의 질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이 자리에서 헤아리십시오.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그 일을 찾아서 거기에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인욕정진이라는 말이 있듯이, 수행에는 반드시 인욕, 참고 견디는 것이 따릅니다. 과연 이 나이, 이 상황에서 내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으십시오, 그 일이 바로 결제이며, 이를 통해서 90일 안거를 하루하루 정진하며 살아 아갈 수 있습니다.

끝으로 <법구경>의 한 구절을 독송하며 제 말을 마치겠습니다.

 

젊었을 때 수행하지 않고

정신적인 보배를 모아 두지 못한 사람은

부러진 활처럼 쓰러져 누워

부질없이 지난날을 탄식하리라.

 

 

어리석어 지혜가 없는 사람은

게으름과 방종에 빠지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부지런을 가보처럼 지킨다.

 

부처님이 여든 살에 이르러 생을 마치면서 다른 할 말도 많았을텐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것입니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게으름은 어떻게 해 볼 재간이 없습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다시 <법구경>의 구절입니다.

 

게으름에 빠지지 말라.

육채의 즐거움을 가까이하지 말라.

게으르지 않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큰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