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신심명, 그리고 일기일회

39), 문명은 서서히 퍼지는 독

혜주 慧柱 2010. 5. 23. 07:48

문명은 서서히 퍼지는 독

2003년 10월 4일 대구 맑고 향기롭게 초청 특별강연

 

대구는 제가 1957년 해인사 선원에서 지낼 적에 인연을 맺었던 도시입니다. 그때는 해인사에서 대구까지 비포장도로로 4시간 반 남짓 걸렸습니다. 파출소마다 버스 차장이 내려서 신고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일이 있어 대구에 나왔다가 돌아갈 때면 남은 차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역전에 있는 음악 감상실 ‘하이마트’에 들르곤 했습니다. 그 무렵 주로 듣던 음악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이었습니다. 내 20대의 풋풋한 시절이었습니다.

또 <녹색평론>이라는 격월간지가 있는데, 이 책이 대구에서 발행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녹색평론>은 생태 환경 운동 순수지입니다. 창간호부터 구독하고 있는데, 저는 생태에 관련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여기서 얻어듣습니다. 이런 잡지가 널리 읽힌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의 주제를 생태윤리로 잡았습니다.

지금 세계 곳곳이 물난리와 가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흔히 기상이변이라고들 하는데, 그럼 기상이변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더 물을 필요도 없이 사람들의 생활 형태가 기상이변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여기저기 함부로 버려 놓은 쓰레기를 집중호우가 아니면 누가 치우겠습니까? 강물에 떠내려가는 온갖 쓰레기를 보고 어떤 생각들을 하십니까? 이것이 현재 우리들의 속 얼굴이고, 우리 한국인의 현주소입니다. 아무리 ‘대-한민국’을 외쳐 봐야 쓰레기 하나 치우지 못한다면, 4강 아니라 우승을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기상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배기가스와 재와 산 등 여러 가지 오염물질이 뒤섞여 만들어 낸 구름층이 햇볕을 가려 대지와 해수면을 비정상적으로 냉각시킵니다. 자연히 그 공기는 더워집니다. 이것들이 그 지역의 비구름을 만들어 소위 게릴라성 집중호우를, 다시 말하면 신경질적으로 비를 쏟아 붓습니다. 이런 구름층의 부조화로 일부 지역에서는 홍수가, 다른 지역에서는 극심한 가뭄이 생깁니다. 이런 기상이변은 갈수록 심해질 것입니다.

휴가철 고속도로와 국도를 가릴 것 없이 꽉 메운 자동차들 때문에 평소 두세 시간이면 갈 거리를 열 시간이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차들이 내뿜는 배기가스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게 결국 집중호우가 됩니다.

커다란 생명체인 우리 강산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어느 한 곳 빤한 곳이 없습니다. 산이고 들녘이고 강이고 상처투성이입니다. 흐름과 맥을 죄다 끊어 놓았습니다. 그러니 공기와 물의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경제 논리와 개발 논리로 인해 자연이 말할 수 없이 파괴되고 소멸되어 갑니다. 자연이란 무엇입니까? 대지는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입니다. 누구도 대지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대지는 모든 생명체의 뿌리요, 어머니입니다. 이런 어머니를 그 자식들인 인간이 마구잡이로 허물고 더럽히고 있습니다. 지구는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의지를 지닌 보다 높은 차원의 커다란 생명체입니다. 그런 까닭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할 때가 있고 병들 때가 있습니다.

이 대지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곧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임을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국의 병원마다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데 그 까닭을 알고 계십니까? 이런 현상은 우리들 자신이 어머니인 대지를 병들게 한 그 보상입니다. 인간은 대지에서 나누어진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모체가 앓고 있는데, 그 지체가 어찌 성하겠습니까?

현대인의 삶은 남을 희생시켜 가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삶의 기본적인 진리는 남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존재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자신의 방법으로 살아감으로써 우주적인 건전한 조화를 이룹니다. 살아 있는 존재들은 서로 연결되어 주고받으면서 함께 생명의 강을 이룹니다.

자연은 그 나름의 질서를 지니면서 스스로 정화하는 자정 능력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술문명이 이 질서와 능력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문명은 독약입니다. 점진적인 독약입니다.

현대 과학 기술 문명의 문제점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로 집약됩니다. 그리고 정보 과학 기술의 발전은 전통적인 세계관을 허물고 문화의 혼란을 가져옵니다. 돈과 권력, 육체적 향락과 경제적 부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는 바로 이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세상을 끝없이 시끄럽게 하고 짜증스럽게 하는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계에 의존하는 습관을 들이면서부터 결국은 기계가 내리는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컴퓨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형 인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계는 만능이 아닙니다. 불시에 고장을 일으킵니다. 이때 사람들은 당황하며 일손을 놓습니다. 이것이 기술문명 사회의 한계이며 실상입니다. 전기, 전화, 수도, 가스가 고장 나면 그 도시는 마비됩니다.

<장자>외편 ‘천지天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노인이 밭을 경작하는데, 우물 속으로 내려가서 항아리에 물을 길어다 밭고랑에 붓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힘만 들고 물이 충분하지 못해 일에 진척이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 나그네가 말했습니다.

“노인장, 어째서 양수기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노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양수기를 이용하면 편리하다는 것을 난들 왜 모르겠소. 그러나 한번 기계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그 기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소. 기계가 있으면 그에 따라 기계의 일機事이 있고 또 기계의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기계의 마음機心이 있게 마련이오. 기계가 내 마음속에 들어오면 순박함을 잃게 되오. 순박하지 못하면 정신이 안정을 이루지 못하오. 불안정하면 사람의 도리를 제대로 지킬 수 없소. 그래서 나는 기계의 편리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 나 스스로 그것을 쓰지 않소.”

또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손을 더 이상 손으로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 가장 큰 비극이다. 손은 신이 우리에게 준 귀중한 선물이다. 기계에 대한 열광이 지속되면 결국 우리는 무능력하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고마운 그 생명의 손을 잊어버리게 된 것을 스스로 저주할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신이 준 고마운 선물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 어떻게 쓰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머리와 기계로만 사는 현대인들에게 울리는 엄숙한 경종입니다.

우리가 의지해 살아가는 이 대지는 단순한 흙더미다 아닙니다. 흙과 식물과 동물이 서로 조화로운 순환을 통해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렇기에 생태윤리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대지의 건강을 위해 자신의 의무를 깨닫고 실천하는 일이 절실합니다. 윤리는 말보다도 실천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순간순간의 작은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생태계 보전의 요점은 아주 단순합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재산이나 물건은 우리 조상들이 남겨 준 유산입니다. 그러므로 이다음 세대, 곧 우리의 미래의 필요도 생각해야 합니다. 앉은자리에서 싹쓸이를 한다면 우리에게는 내일도 희망도 없습니다. 지구로부터 얻은 물자를 소중히 다루는 것은 곧 지구환경을 돌보는 것입니다.

생태윤리를 위한 몇 가지 실천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색다른 물건을 보면 거기에 현혹되어 충동적으로 사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충동구매에는 반드시 후회가 따릅니다. 그 물건이 지금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만큼 꼭 필요한 것인가를 거듭거듭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편리하다고 해서 대형 할인매장에 가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장바구니가 아니라 커다란 손수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가 자동차를 원하는 이유는 그 자체를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장소에 쾌적하고 쉽게 가기 위해서입니다. 값비싼 자동차를 보고 그의 사회적린 신분이나 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것이 일으키는 대기오염과 환경 파과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배기량이 적은 차일수록 환경을 덜 오염시킵니다. 이것도 하나의 생태윤리입니다.

셋째, 광고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소비주의를 부추기는 광고는 생태적 위협입니다. 광고를 대할 때 거기에 말려들지 말고 제정신 차리고 멀리 내려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들여다보지 말고 내려다보아야 합니다. 들여다보면 거기에 빨려 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캐나다는 해마다 1만 7천 헥타르의 원시림을 엄청난 광고가 실리는 미국의 신문용지를 대기 위해 벌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 보는 신문용지가 어디서 온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비슷비슷한 소식을 전하는, 밤낮 물고 뜯고 죽이고 사기 치는 소식을 지겹게 전하는 그런 신문은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두세 개를 하나로 줄이는 것도 생태윤리의 실천입니다.

텔레비전 보는 시간도 줄여야 합니다. 귀중한 시간과 전력과 체력을 무가치한 일에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앞에서 정신을 빼앗겨 가며 등신처럼 앉아 있는 일상적인 자신을 냉엄하게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 꼭 필요한 것만을 갖고 불필요한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도 생태윤리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온 세상이 대량소비, 대량폐기를 하면서 그렇게들 사는데, 몇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한들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온 우주가 청정해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개개인이 자기 훈련과 자기 절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이런 문제에는 어떤 해결책도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건드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들의 삶은 그만큼 건강해집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궁극적인 존재입니다. 당장에 편리하다고 해서 문명의 연장에 너무 의존하면 그 문명의 연장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기 쉽습니다. 문명은 서서히 퍼지는 독약임을 거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문명에서 온 질병을 또 다른 문명으로는 결코 치유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연만이 그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문명의 해독제는 자연밖에 없습니다.

흙과 나무와 풀과 꽃, 새와 짐승들을 가까이하십시오. 구름과 별과 바람과 이슬을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자연스러움도 함께 일깨워야 합니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돌아가 의지할 곳이 어디인지 이따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