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신심명, 그리고 일기일회

40), 영혼의 밭을 가는 사람

혜주 慧柱 2010. 5. 23. 07:50

영혼의 밭을 가는 사람

2003년 9월 27일 광주 맑고 향기롭게 초청 특별강연

 

 

일찍이 근대과학의 좌우명은 속도였습니다. 빠르게, 더 빠르게.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가 합작해 콩코드라는 초음속 여객기를 만들었습니다. 이 비행기는 한동안 대서양을 횡단하는 등 많이 날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종말이 어떠했습니까? 결국 소리보다 더 빠르다던 그 비행기는 공중폭발 하고 맙니다. 이는 빠름에 대한 하나의 상징입니다. 세상을 살아 나가는 데는 어느 정도의 속도가 필요하지만, 지나친 속도는 오히려 해로운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빠르게, 더 빠르게, 좀 더 빠르게 해야만 합니까?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 앞선다고 해서 더 행복합니까? 경쟁 심리에는 매우 비인간적이고 냉혹한 이기심이 작용합니다. 기업들은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전혀 옳지 않은 소리입니다. 이류, 삼류도 필요하며 또 얼마든지 살아남습니다. 일류란 불행한 것입니다. 더 올라갈 자리가 없습니다. 일류인 사람들 중에 정신질환의 잠재성을 지닌 사람들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얼마나 초조하겠습니까? 최고라는 것, 일류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빠르게 더 멀리 뛰어 보았자 결국 제자리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갈 때면 저도 가끔 그런 실수를 범합니다. 흔히 도착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몇 시까지 어디에 도착하겠다는 집념 때문에 그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목적만을 위해서 수단을 무시하게 됩니다. 교통사고도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의 인간으로 성정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씨앗이 땅에 묻혀서 꽃피고 열매 맺기까지는 사계절의 순환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기다림과 그리움이 동반됩니다. 삶을 살줄 아는 사람은 당장 움켜쥐기보다는 쓰다듬기를 좋아합니다. 목표를 향해 곧장 달려가기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직선이 아닌 곡선의 묘미를 압니다. 여기에 삶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행해하지 마십시오. 그 나름의 의미가 다 있습니다.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기도 하고, 가다가 쉬기도 하고, 또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어야 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국도나 지방도로를 달리면 훨씬 여유가 있습니다. 둘레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은 한마디로 죽으러 가는 사람입니다. 출퇴근 시간 바쁠 때 보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가 앞서려고 합니다. 만약 화장터나 묘지,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면 서로 뒤처지려고 할 것입니다.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영혼의 밭을 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일을 자기 삶의 소재로 생각하고 모든 과정을 즐길 줄 압니다.

모든 일을 삶의 소재로 삼으십시오. 그래야 일을 하되 그 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중생을 가르치는 것을 ‘유희삼매遊戱三昧’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소꿉장난할 때 아무 잡념이 없습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어머니가 기다리는 것도 잊고 그 자체가 즐거워서 몰입합니다. 이것이 유희삼매입니다. 세상을 살 때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입니다. 일에 갇히면 그 일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업’입니다. 제가 나와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업이고, 또 여러분들이 바쁜 시간에 오셔서 제 이야기를 듣는 곳도 업이 됩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모두가 업이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들이 나를 형성합니다.

제가 잘 아는 화가로부터 이런 애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최근 100년 동안의 세계 미술사에서 인간의 형상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림에서 자연현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과 자연이 20세기 그림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미처 생각 못했었는데 그 화가가 이것저것 자료를 제시하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자코메티나 루오 등의 극소수 예술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작품에서 인간과 자연을 제외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상치 않은 하나의 암시입니다. 거리의 풍경을 그리는 한 화가는 집과 거리를 그릴 뿐 전혀 사람을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지난 시대들의 그림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이 없는 삭막한 거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사라지고 자연이 말할 수 없이 짓밟힌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예술 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충격입니다. 인체를 하나의 도구처럼 다루면서도 인간은 다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 부재의 예술이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저희 같은 중들이 산속 오두막에서 혼자 산다고 해서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완전히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관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홀로 있지 않고 많은 것에 의지해서 삽니다. 흙과 물과 바람과 나무와 새와 수많은 생물들과 한께 어울려서 삽니다. 그러면서 커다란 생명의 흐름을 이룹니다. 생태계란 무엇입니까? 모든 생명으로 이루어진 세계인데, 인간 위주로 접근하기 때문에 자연을 훼손시켰고, 또 그 결과 인간 스스로가 왜소해졌습니다. 부분에 집착해 전체를 내다보지 못한 까닭에 공생 공존의 틀이 무너졌습니다.

지금 환경위기시계는 9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사히 글라스(일본의 유리 제조업체)재단에서는 세계 각국의 황경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매년 환경위기시간을 발표합니다. 환경위기시계에서 6시부터 9시 사이는 ‘상당히 불안한’시간이고, 9시부터 12시는 ‘매우 불안한’시간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매우 불안한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올해 환경위기시계가 가리킨 9시 15분은 사상 최악이라고 합니다. 지구환경 파멸의 시간은 12시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2시간 45분 전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 지구를, 우리 삶의 터전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말은 기상이변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불러들인 위기입니다. 미국은 지금 화석연료 소비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세계의 26퍼센트에 이르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이 공해와 대기오염을 스스로 억제하기 위해 만든 교토의정서에서도, 미국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탈퇴합니다. 지구를 병들게 만든 것은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지만 특히 선진국들의 허물이 큽니다. 현대 과학 기술의 과오입니다.

균형의 조화로 이루어진 생명의 흐름을 무너뜨린 결과는 거친 폭력으로 드러납니다. 저마다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서 남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던, 아이도 아닌 어른이 게임에 번번이 패하자 상대방을 찾아가 폭력을 휘두릅니다. 또 한 고등학생은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같은 반 친구를 수업 중에 살해합니다. 인터넷을 통해 폭력 영화를 40번이나 반복해 보면서 폭력의 불을 지펴 온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폭력의 업을 익혀 온 것입니다.

가상 세계이든 현실 세계이든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업이 됩니다. 업 자체가 관성의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통의 의지로는 그것을 막아 낼 수 없습니다. 업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조차 이성적으로 그것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극장가에서는 국산 영화라는 이름 아래 매년 폭력물이 등장합니다. 흥행에 성공했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런 폭력물이 관객에게 정서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치고받고 쓰러뜨리고 짓밟고 죽고 죽이는 장면을 즐기면 우리 기억의 필름 속에 찍혀서 잠재의식을 이룹니다. 마음 밭에 그와 같은 씨앗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 움트고 싹이 나고 줄기가 펼쳐지고, 그렇게 해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것이 업의 파장이거 흐름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일들은 인관관계의 고리로 이어져 있습니다. 미국에 대한 테러도 보십시오. 미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감히 누가 도전할 수 없는 막강한 초강대국인데, 그 본토에서 세계적으로 자랑하던 쌍둥이 빌딩이 공격을 당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됩니다. 이것이 21세기의 전쟁 양상입니다. 아마도 이런 일은 두고두고 되풀이될 것입니다. 컴퓨터 게임이나 폭력 영화를 통해, 가상 세계에서 공격하는 업을 우리가 익혀 온 것입니다. 일찍이 그렇게 상상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도달했을 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업이란 그런 것입니다.

폭력과 인간 부재의 시대에서 우리가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이와 같은 인과의 고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넘치는 정보사회에서는 저마다 자기 삶의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불필요한 것들에 대해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보지 말고, 듣지 않아도 될 소리는 듣지 말고, 먹지 않아도 될 것은 먹지 말고, 읽지 않아도 될 글은 읽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텔레비전도 없어서 그런 피해를 입지 않지만, 가끔 세상에 나와서 텔레비전을 볼 기회가 있을 때면, 국민들한테 불쾌감만 주는 정치꾼들 이야기 때문에 금방 꺼 버립니다. 그러고는 아예 접근을 하지 않습니다. 내 삶에 아무 도움이 안 될뿐더러, 내 존재를 그런 지저분한 것들로 채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될 수 있는 한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갖고, 적게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볼 것, 들을 소리, 또 살아야 할 삶을 챙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업의 덫에 걸려들 확률이 줄어듭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은 우리 정신에 깊은 자국을 남깁니다. 그것은 마음 밭에 뿌리는 씨앗과 같아서 이다음에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순간순간 우리들이 갖는 생각과 염원은 사라지지 않고 우주에서 진동을 한다고 명상가들은 말합니다. 남을 미워하면 그 자신이 미움의 진동이 되고, 남을 사랑하면 그 자신이 사랑으로 진동합니다. 우주의 진동과 파장은 같은 것끼리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처음 만났지만 오랜 친구처럼 정다운 사이가 있고, 또 섬뜩해서 자리를 같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발산하는 에너지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평소 어떤 업을 지녔는가가 민감한 사람에게는 그대로 와 닿는 것입니다.

위산 스님의 법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업만 남아 따라간다.”

우리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증권이든 예금통장이든 가구든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자기가 평소에 지은 업만 남아서 신원증명서처럼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끝없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를 만듭니다. 내가 내 삶을 살기 때문에 누가 대신해서 나를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어떤 나를 만들 것인가는 나 자신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업의 놀음에 이끌러 가지 말고 순간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드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