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
2003년 6월 15일 6월 정기법회
비 오는 날, 절에 오시느라고 힘드셨겠습니다.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고 장소도 협소한데 이렇게 또 만났습니다. 올해는 장마가 일찍 오는가 봅니다. 그래서 저도 장마철에 땔 나무를 며칠 전 미리 나뭇간에 들여놓았습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장마이기 때문에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와 같은 대중법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추상적이고 의례적인 모임에 나와서 어쩔 수 없이 떠들고 있지만 제 성에는 차지 않습니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한 사람 한 사람 마주 바라보면서 묻고 대답하는 그런 과정에서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 그립습니다. 길상사는 형편상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비 오는 날 이렇게 천막 속에 앉혀 놓고 저 혼자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좋은 법화라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주고받아야 합니다.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찾아야 하는데, 지금 형식으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뜻있는 만남과 모임은 결코 좋은 말을 많아 늘어놓는 데 있지 않습니다. 침묵 속에서 마주 바라보고, 서로 귀 기울이고, 같이 느끼면서 존재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 진정한 만남과 모임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500년 전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모여서 주고받은 이야기가 경전으로 결집되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경전을 보아도 부처님 혼자서 말한 집회는 없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대중과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갔습니다.
오늘 제가 법회에 나오면서 이 법회의 형식에 대해 생각되는 바가 있어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언젠가 시절인연이 오면 그런 모임을 갖고 싶습니다.
지난 하안거 결젯날 황벽 선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황벽 선사와 배휴裴休 거사가 주고받은 문답이 <전심법요傳心法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 한 사람의 무심도인無心道人에게 올리는 공양만 못하다. 왜냐하면 무심자에게는 온갖 분별과 망상이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법문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도 나옵니다. 아마 황벽 선사가 이 법문을 했을 때 <사십이장졍>에서 참고했을 것입니다. 무심도인이 부처님보다 뛰어난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무심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비유를 쓴 것입니다. 무심도인이나 부처님이나 그 경계는 다르지 않습니다.
황벽 선사는 같은 법문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며 갠지스 강의 모래를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갠지스 강을 한문 경전에서는 항하라고도 합니다. 현지에서는 강가라고 합니다.
“항하의 모래는 부처와 보살과 제석천帝釋天이 밟고 지나갈지라도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다. 소나 양, 벌레들이 밟고 지나갈지라도 조금도 화내지 않는다. 진기한 보배와 향료가 쌓여 있을지라도 탐내지 않으며, 똥오줌의 악취에도 모래는 싫어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이 무심을 통달한 마음이다.”
모든 분별을 다 내려놓은 것입니다. 황벽 선사는 또 말합니다.
“불도를 구하는 사람들이 지금 당장,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무심하지 않는다면 무량겁이 지나도록 수행할지라도 끝내 도를 이룰 수 없다.”
도를 이루려면 무심해야 됩니다.
“어떻게 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누군가 묻자 달마 스님은 답합니다.
“밖으로는 모든 반연 반연을 쉬고 안으로는 헐떡거리는 생각이 없어서 마음이 벽과 같아야 비로소 도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역시 마음이 모든 분별을 떠나 무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로 도에 들어갈 것 없이 무심한 그 마음이 바로 도입니다. 그것이 곧 부처의 마음입니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입니다. 중생의 마음이나 부처님의 마음이 다르지 않습니다. 분별을 두면 중생이 되는 것이고, 분별을 거두고 본래 조용한 마음으로 돌아가면 그것이 바로 부처의 마음입니다.
무심이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아무것도 담아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텅 빈 항아리와 같습니다. 관찰해 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에 담아 둔 것이 있는가? 항아리처럼 텅 비었는가? 아니면 무엇으로 가득 채웠는가?
마음속에 있는 욕망, 미움, 질투, 번뇌와 같은 분별 망상 때문에 우리 마음이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비울 때 본래의 자기로 돌아갑니다. 본래의 내 마음이 곧 무심입니다. 황벽 선사는 그것을 본원청정심本源淸淨心, 본원청정불本源淸淨佛이라고 부릅니다. 근원적인, 더없이 청정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분별에서 떠난, 때 묻지 않은 맑고 투명한 마음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래 마음입니다.
분명하게 보려면 어디에든지 얽매임 없이 텅 비어야 됩니다. 가령 우리가 어떤 그림을 볼 때, 가구를 볼 때, 아무런 선입관념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구나 그림이 지닌 실체, 아름다움을 우리가 바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누가 만들었고 어떤 재료를 썼고 값은 얼마 나가겠고 이렇게 따지게 되면 그 물건이 지니고 있는 본래 모습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직관력이란 것은 선뜻 보는, 첫눈에 보는 그것입니다. 첫눈에 반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 분별없이 첫눈에 선뜻 받아들일 때 그것이 바른 것입니다. 첫인상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마음을 텅 비운 상태에서 보는 첫인상이 되어야지, 무언가 거기에 끼어들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에 속지 마십시오, 첫인상 때문에 한세상 신세망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눈 바짝 떠야 합니다. 자기 안을 늘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발 뿌리를 살펴야 합니다.
옛날 어떤 스님이 천수주력千手呪力을 해서 신통력이 났습니다. 점쟁이한테 가지 않아도 어떤 일들을 잘 알아맞혔습니다. 그런데 곁에서 경전을 잘 아는 이가 들으니 이 스님이 <천수경>을 앞뒤가 맞지 않게 뒤바꿔서 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지적을 해 주었는데, 그 뒤로 신통력이 없어졌습니다.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믿고 삼매에 빠진 상태로 경을 암송해 자기도 모르게 의식이 투명해져서 어떤 사물을 알아차렸는데, 이제는 분별이 생겨 순수하게 몰입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많습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아이들이 흙장난하듯 무심히 할 때는 아주 잘됩니다. 그런데 전시회에 내거나 누구한테 주거나 하는 목적이 있을 때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심의 경지에서 하는 것은 바른 것입니다. 무심하지 않고 분별이 개입하면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 분별없는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 일에 온 마음을 기울여 순수하게 몰입하면 그 자체가 환희의 상태입니다. 많이 아는 것은 더 구할 것이 없는 상태보다 못합니다. 달마 스님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무소구행無所求行’이란 말이 있습니다. 더 구할 것이 없는 행, 더 구할 것이 있으면 채워야 하니까 더 보태고 덜어 낼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완전하다는 말입니다.
도인이란 일 없는 사람을 말입니다. 이것을 무사인無事人이라고 합니다. 일이 없다고 해서 빈둥거리며 노는 존재가 아닙니다. 일을 하면서 그 일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일이 나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아무 분별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 일 자체를 삶의 내용으로 알고 기쁨으로 알기 때문에 무심히 할 뿐입니다.
배휴 장관이 황벽 선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자재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자재인이란 자유인이라는 뜻입니다. 관세음보살을 관자재보살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황벽 선사가 답합니다.
“하루 종일 밥을 먹더라도 한 톨의 밥알을 씹지 않으며, 하루 종일 걷더라도 한 걸음도 옮기지 않는다. 이와 같은 때 너니 나니하는 상이 없으며, 하루 종일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도 그 경계에 팔리지 않아야 비로소 자재인이라고 할 수 있다.”
황벽 선사의 제자가 임제 스님입니다. 임제 스님에 이르면 같은 내용을 가지고도 아주 과격한 표현으로 자유인을 이야기합니다. 무의진인無依眞人,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진짜 사람, 어떤 계층에도 속하지 않는 참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스승 황벽은 마음을 문제 삼고 있지만 제자인 임제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임제록>에 보면 ‘사람’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무려 1,200년 전에 ‘자유’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대가 바른 견해를 얻고 싶거든 사람으로부터 미혹을 받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족족 죽이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阿羅漢을 만나며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줄이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을 얻어 자유자재하리라.”
죽이라는 말은 극복하라는 뜻입니다. 부처나 조사나 아라한이라면 불교에서는 가장 귀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렇다고 거기에 매달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모나 친척을 섬기는 것은 유교윤리의 기본입니다. 그런 기존의 틀에 갇히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안에서 극복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내 안에서 부처를 개발하고 내 안에서 조사를 일깨우고 내 안에서 아라한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존재라 하더라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미 굳어 버린 존재는 부처나 조사라 하더라도 생명력이 없습니다.
부처나 조사도 현재 살아 있는 자기 자신 안에서 일깨우라는 것입니다. 부처나 조사라 하더라도 너무 그에 의존하게 되면 그의 노예, 복사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부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나아가 임제 스님은 어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는 내 말에도 얽매이지 말라.”
여기에 불교의 묘미가 있습니다. 어떤 종교에서 만일 자기네 교주를 죽이라든가 한다면 당장 화형감입니다. 불교의 독특한 모습입니다. 이를 잘못 받아들이면 무례한 언동이 되지만, 진짜 알고 무심한 상태에서 얘기한다면 조금도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부처님의 뜻을 이어받는 일이 됩니다.
말에 팔리지 말고 말 뒤에 숨은 뜻을 안다면 이 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재미로 사는 가 각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비도 오니까 얘기해 보겠습니다.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 살지 않습니까? 저도 가끔 질문을 받습니다.
“스님, 무슨 재미로 그 산중에서 혼자 지내십니까?”
저는 그때마다 선뜻 답을 합니다.
“시냇물 길어다가 차 달여 마시는 재미로 삽니다.”
엉뚱한 소리가 아닙니다. 내가 혼자 산중에 살면서 차를 마시는 일이 없다면 얼마나 빡빡하겠습니까? 한 잔의 차를 통해서 늘 삶에 대한 고마움, 이 세상에 대한 고마움, 출가 수행승이 된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최근에는 또 하나의 재미가 생겼습니다. 한밤중에 깨어나서 조용히 벽에 기대어 밤 시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낮에 듣는 물소리와는 다릅니다.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그 시간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조용히 귀를 맡겨 두고 있으면 더없이 마음이 평화롭고 정신이 투명해집니다. 전에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그것을 재미로서 누리고 있습니다.
자는 시간을 줄이십시오. 우리가 60년을 산다면 20년은 잠으로 보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잔고는 많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시간의 부피입니다. 시간의 알맹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남보다 몇 곱을 살 수 있고 형편없이 잘못 살 수도 있습니다.
시간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잠자는 시간은 휴식이기도 하지만 한도를 넘으면 죽은 시간입니다. 깨어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자다가 깨면 다시 잠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깨어 있는 그 상태를 즐겨야 합니다. 한밤중의 그 고요와 적막을, 맑고 투명한 그 의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것은 그 인생이 그만큼 알찬 삶을 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일상에서 재미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세상은 살아갈 만한 곳이 됩니다.
우중에 제 얘기 듣느라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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