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신심명, 그리고 일기일회

43), 부분적인 자기에서 전체적인 자기로

혜주 慧柱 2010. 5. 23. 07:59

부분적인 자기에서 전체적인 자기로

2003년 5월 8일 부처님오신날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부처님이 어디서 오셨는지, 무엇하러 오셨는지, 오늘은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자기 앞 챙기기에 급급합니다.

어떤 기업에서는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비정한 광고까지 하지 않습니까?

일류가 아닌 사람도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고, 또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매우 첨예한 경쟁의식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널드 토인비의 <저서>에 보면, 그가 자신의 아들과 일본의 한 학자와 나눈 대화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토인비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자기중심성으로부터 해방된 첫 번째 사람으로 불타 석가모니를 꼽습니다.

대개 우리들 고뇌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 얽매이는 데 있습니다. 모든 괴로움과 갈등의 원인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은 자기 집착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집착이 생사윤회의 근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와 같은 중심성은 이기주의나 다름없습니다.

동시에 반사회적인 행동의 원인이 됩니다. 자기밖에 모르면 타인을 배려할 줄도 모릅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부분적인 자기로부터 전체적인 자기로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럽다는 의미입니다.

 

나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기에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언제나 이웃과 타인을 배려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른다는 것은 조그만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부분적인 자기에서 전체적인 자기로 자신을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덕이란 무엇인가? 남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곧 자비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12,000여 명의 어린이들이 버려진다고 합니다. 오늘도 몇 십 명이 버려질 것입니다.

주로 미혼모와 이혼한 사람들이 아이를 버린다는데, 말 못할 사정 때문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자신만의 표준입니다.

자기 상황만 생각하는 일입니다. 어린 생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생명을 배려한다면, 자기 상황이니 말 못할 사정이 어디 있습니까?

다 말할 수 있는 사정입니다. 이는 이기심에서 생겨난 그릇된 행동입니다. 자기에게서 태어난 그 어린 생명을 어떻게 버릴 수 있습니까?

자신에게 맡겨진 생명입니다. 이런 짓은 인간의 도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인과법칙으로 본다면 그 일로써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고비로 얽히고설켜서 주고받는 새로운 갈등이 또 생겨납니다.

우리가 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에게 맡겨진 어린 생명을, 자신을 의지하고 세상에 온 어린 생명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양육의 과정을 통해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집에 석 달 된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자기 엄마 아빠에게도 낯을 가리는 모양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집에 갔는데, 아기가 매우 귀엽게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서투르게 안아 주니 아기가 무척 좋아했습니다.

아기에게 이야기를 건네면 응답이라도 하듯 옹알거립니다. 사정이야 다 있겠지만 그런 아기를 어떻게 버립니까?

더구나 자기가 낳은 자식을 말입니다. 오랫동안 그런 업을 익혀 왔기 때문에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철이 드는지 전에는 거의 생각하지 않던 일들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을까?’ 가끔 생각합니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은혜를 입었는가?’ 스물네 살 때 절에 왔으니,

어느덧 반세기가 가까워집니다.

‘그동안 내가 절에 와 시줏밥 먹고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는가?’ 하고 생각할 때면 스스로 부끄러워집니다.

왜냐하면 저는 남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음에도 남을 그렇게 많이 돕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받은 도움에 비하면, 남을 도운 일은 그 백 분의 일이나 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것은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덕이란 어디서 오겠습니까?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선뜻 도울 때 덕이 자랍니다. 어디서 덕이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을 기꺼이 도와줄 때 덕의 싹이 자라납니다.

 

아름다운 세상이란 이렇게 연등을 잔뜩 걸어 놓고, 꽃이 만발한 세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믿고 도우며 인정이 넘치는 곳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낼 수는 없습니다.

오늘 모임만 하더라도 며칠 전부터 많은 분들이 노력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때그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선뜻 나서서 도울 때, 우리 삶의 질이 향상되고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가 새로워집니다.

 

남을 도울 때는 자기 생각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편의 자존심과 선택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가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상대편을 돕는다고 해서 무슨 은혜라도 베풀 듯 행동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베풂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내가, 우리가 나서서 도울 차례입니다. 기회는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그때그때 우리에게 기회가 옵니다

 그것을 미루지 마십시오, 미루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남을 도와서 그 사람의 삶이 좀 더 나아진다면 내 삶도 그만큼 향상됩니다.

또 남을 돕고 살면 그 도움이 크든 작든, 우리가 헛된 삶을 살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타인의 삶에 밝은 영향을 미치는 행동은, 우리 자신의 삶에도 그만큼의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어서 그 영향이 밝게 미친다면, 나 자신의 삶도 의미를 지니게 되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이웃이 도움이 필요로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길 앞에 마주 서게 됩니다. 한 길은 모른 체하는 것입니다.

‘나 살기도 빠듯한데 어떻게 그런 마음을 내겠는가?’ 또 다른 길은 사람의 도리로 여겨 흔연스럽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우리는 일상에서 늘 마주칩니다.

절 안에서도 그렇고 절문 밖에서도 그렇고, 사소한 일상사 속에서 늘 두 갈래 길 앞에 마주 섭니다.

모른 체할 수도 있고, 모른 체하지 않고 선뜻 손을 뻗을 수도 있습니다.

 

선택권은 우리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모른 체 돌아서는 것은 삶에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입니다.

선뜻 나서는 것은 지난 세월의 도움을 갚는 것입니다. 내가 지난 세월 빚진 도움을 갚으면서 내 삶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오래전, 어느 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지금도 기록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한 가난한 절이 있었습니다.

밥 먹을 형편이 못 되어서 아침에는 겨우 죽을 먹고 점심에는 나물이 전부인, 대중은 많은데 매우 가난한 절이었습니다.

하루는 마을 사람이 찾아와서 절 책임자인 노스님께 자기 집안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절이 무척 가난해서 끼니도 기약할 수 없는 마당에, 한 신도가 와서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침 불상을 만들 때 쓰려고 준비해 놓은 구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시주가 불상을 조성할 때 사용하라고 준 구리동판이었습니다.

노스님은 그 구리를 마을 사람에게 주면서 양식과 바꾸라고 합니다. 그러자 젊은 스님들이 거세게 항의합니다.

 

“시주가 부처님께 쓰라고 보내온 동판을 어떻게 남한테 내줄 수 있습니까? 이것은 호용죄互用罪가 아닙니까?”

호용죄라는 것은 가령 시주가 법당 지을 때 쓰라고 준 시줏돈을 요사체 짓는 데 쓴다든가, 그 밖의 다른 곳에 전용하는 것을 이릅니다.

불가피한 경우에는, 사전에 시주의 양해를 구해 다른 데 쓰겠다고 승낙을 얻고 나서 써야 허물이 안 되지,

시주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명목을 바꾸어서 쓰면 그것은 호용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노스님이 제자들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옳다, 이것은 호용죄에 해당하고 부처님께 쓸 제물을 내 멋대로 처분했기 때문에 지옥에 가도 좋다.

그러나 절 아래 사람이 다 굶어 죽어 간다는데, 수행자가 하루 이틀 굶은들 그것이 수행에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오히려 그런 일을 통해 수행의 덕을 쌓지 않겠는가? 또 본래 내 것이 어디 있는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먼저 쓰라고 우리가 맡아 갖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말씀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승과 소승이 나뉩니다.

소승은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이고, 대승은 보다 큰일을 위해 규약과 규칙을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런 일들을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해서는 작은 것을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방편입니다. 그런 노스님이 사는 절이기에 좋은 절입니다. 설령 비가 새고 끼니가 어렵더라도 좋은 절입니다.

그 깨어 있는 정신이야말로 수도 정신이고, 살아 있는 정신이자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정신입니다.

 

남을 돕는 일에 어떤 보상이 따른다면, 그 보상이란 곧 내 가슴이 그만큼 따뜻해지는 일일 것입니다. 또 내 시야가 그만큼 넓어집니다.

삶의 의미가 그만큼 깊어집니다. 남을 도우면 존재의 깊은 의미를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보시를 제1바라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바라밀이란 우리가 세상을 건너는 일, 세상을 사는 일입니다. 세상을 사는 일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덕이 무엇인가? 보시라는 것입니다.

남을 돕는 일입니다.

 

오늘이 부처님오신 날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오신다니 어디서 왔습니까? 무엇하러 왔습니까? 각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처님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과 우리를 별개의 존재로 보지 마십시오.

우리들 자신이,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부처님의 화신들입니다. 천백억화신들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그런 도리를 가르친, 그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저마다 우리가 그런 부처님입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 가질 때, 그 자리에 자비로운 부처님이 오십니다. 그들이 곧 부처님입니다.

그 마음을 일으킨 행위를 한 그들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오신 날이 오늘 하루로 그친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생일잔치를 하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모든 불자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 부처님이 오시도록 마음에 새겨 끊임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날에만 부처님이 오신다면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뭐 대단한 일입니까? 언제 어디서든 부처님이 오셔야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정토요, 극락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함께 만나도록 오늘 부처님오신 날을 맞아서 거듭 정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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