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로부터의 자유
2003년 10월 19일 가을 정기법회
그 동안 잘들 지내셨습니까? 파리에 있는 길상사 창건 10주년이어서 거길 좀 다녀왔습니다. 그곳 주지스님이 편지 보내기를, 저를 그곳에 오게 하기 위해 봄부터 기도를 했답니다. 기도의 영험이 있었는지, 제 마음이 움직여서 다녀왔습니다. 한 열흘 돌아다니면서 해 주는 밥 얻어먹다 보니 새삼스럽게 혼자 끊여 먹기가 머리 무거워집니다. 습관이란 그렇습니다. 어디에 의존해 버릇하면, 타성이 생겨서 자기가 지니고 있는 능력이 개발되지 않고 쇠퇴해 버립니다. 될 수 있으면 의존하지 않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10여 년 전 처음 유럽 여행을 하는 길에 파리를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불자들의 모임에 참석했었는데, 절이 없어서 한 불자가 운영하는 식당 한켠을 빌려 집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들의 바람이 조촐한 절 하나를 갖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과 의논해 절을 갖기로 마음을 내었습니다.
<화엄경>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일이 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천당도 지옥도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절을 갖자는 한 생각으로 인해 절이 세워졌습니다. 좋은 일에는 마음을 같이 하는 이웃이 생깁니다. 절을 세운다고 하니까 파리의 한국 화가들이 작품들을 내놓고 국내에 있는 분들도 작품을 내놓아서, 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다 모아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한 생각 일으키는 데서 시작됩니다.
제가 1975년에 서울에서 지내다가 문득 서울이 싫어졌습니다. 중노릇을 다시 시작해야 되겠다, 생각하고 여기저기 터를 찾아다니다가 조계산에 아무도 살지 않는 허물어진 빈 암자가 있어서 그곳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때까지 절에 들어와 지내며 옛 스님들이 지어 놓은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나도 이번 생에 나뿐만 아니라 이다음에 오는 스님들도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작은 암자를 하나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불일암을 짓게 된 것입니다.
절만이 아닙니다. 새집으로 이사 가든 새로운 직장을 마련하든 혹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든 한 생각 일으키는 데서 시작됩니다. 한 생각 일으키지 않으면 일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한 마음을 어떻게 내는가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밝게 내면 밝은 쪽으로 가고, 어둡게 내면 어두운 쪽으로 갑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순간순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들 각자의 구체적인 삶입니다.
과거, 현재의 모든 부처들이 공통적으로 말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을 ‘칠불통계七佛通戒’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악한 짓 하지 말고 선한 일 두루 행해서 그 마음을 맑히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불교란 무엇인가? 어려울 것 없습니다.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행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든 한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매순간 마음을 맑히는 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한숨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마음을 맑히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 한순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한순간이 바로 생과 사의 갈림길입니다.
불교 수행법 중에 관법灌法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와 생각을 낱낱이 관찰하는 정진입니다. 달마 스님의 <관심론>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지 일이 모든 행위를 조절한다.觀心一法 總攝諸行”
여기에서 모든 행위란 우리의 업을 의미합니다.
또 <법구경>에는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물 대는 사람은 물을 끌어들이고 활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곧게 한다. 목수는 재목을 다듬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다룬다. |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을 살피는 사람입니다. 어느 절과 교회에 나가고 어느 종파에 속해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체가 아니라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교이든 기독교이든 회교이든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전체가 아닌 부분에서는 항시 대립과 갈등이 생겨납니다. 내 절 네 절 따지고, 내 종교 네 종교 따집니다. 진정한 신앙의 세계는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고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의지했든 부처님을 의지했든 혹은 예언자를 의지했든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인도에서는 예로부터 쉰 살의 나이를 ‘바나프라스타’라고 불러 왔습니다. ‘산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라는 뜻입니다. 나이 쉰이 되면 자식 키우는 일도 대충 마쳤으니 서서히 산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의무를 다했으니 이제는 자기 몫의 삶을 위해 마음을 닦으라는 가르침입니다.
명상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안으로 살피지 않는 종교는 맹신에 빠지기 쉽습니다. 광신자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어떤 선각자의 명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명상을 하지 않고 종교를 접하려는 것은 마치 뿌리를 잊어버리고 가지를 붙드는 일과 같습니다.
수십 년을 절에 다니면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귀 기울이고, 낱낱이 살피고 분석하고 되돌아보려면 깊은 주의력과 인내력과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입으로는 염불을 외면서 마음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집중은 다르게 말하면 커다란 침묵의 세계입니다. 그 안에 시간과 공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바닷속 같은 깊은 침묵입니다. 그곳에는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성스럽고 영원한 것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설령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이미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열매에 씨앗이 들어 있듯이 우리들 심성 한가운데 깨달음의 빛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움틔우지 않고 묵혀 두고 있는 것입니다.
커다란 침묵과 하나 될 때 내가 사라집니다. 무아의 경지에 듭니다. 어딘가에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집니다. 내가 없는 그 무한한 공간 속에 강물처럼 끝없이 흐르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혼돈 상태가 아닙니다. 정신은 또렷하고 아무 번뇌 망상 없는 그 침묵 속에 강물처럼 흐르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자유가 있지만, 궁극적인 자유는 자기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자기 하나의 무게를 어찌하지 못해서 이 세상을 도중하차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자기 문제입니다. 자기로부터의 자유는 본질적인 자유입니다.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은 현재를 최대한으로 사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불행과 슬픔에 젖어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 앞에 아직도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으로 산다면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집중력이라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침묵의 세계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삶의 과제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앓는 일로, 누구에게는 재산적 손해로, 또 누구에게는 정신적인 갈등으로, 그것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그 생에 연륜이 쌓입니다. 육신의 나이만 먹어서는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다가올 때 회피하지 말고 맞닥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에 깊은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나에게 이런 문제가 닥쳤는가?” 그것을 화두 삼아야 합니다. 자기 삶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불교는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이지만, 우리가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배우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온갖 집착에서, 작은 명예에서, 사소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텅 비울 때 모든 것이 비로소 하나가 되며, 자기를 텅 비울 때 그 어떤 것에도 대립되지 않는 자유로운 자기 자신이 드러납니다. 이를 불교적인 표현으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즉 텅 비울 때 오묘한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으로부터 해탈된 자기, 모순과 갈등을 벗어 버린 자기, 개체인 자기로부터 전체인 자기로의 변신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자기실현의 길이고, 형성의 길입니다. 부처는 단지 먼저 이루어진 인격일 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온전한 인간에 이르는 길입니다.
불교는 이와 같이 자기 탐구의 종교입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하며, 자기 탐구의 길에서 수많은 자기를 만나게 됩니다. 타인과 세상의 존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초기 불교에서 자기 자신을 강조한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라는 뜻에서입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해 타인과 세상에 도달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개체에서 전체로의 변신, 이것은 질적인 변화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갇혀 있다면 그것은 불교도 아니고 종교도 아닙니다. 참된 지혜란 함께 살고 있는 이웃의 존재를 찾아내는 따뜻하고 밝은 눈입니다.
<원각경圓覺經>은 설합니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온 법계가 청정해진다.”
이 복잡한 세상을 살다 보면 자기가 완전히 해체되어 산산이 흩어져 버립니다. 하루 한 시간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시간, 좌선이나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하루 한 시간이라도 홀로 조용히 앉아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종교인만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적어도 하루나 이틀 정도는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고 있습니까? 그런 이치를 깨닫고 적어도 자기가 건강할 때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자신이 진 빚을 갚는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번 마음먹고 시작한 일은 어기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하나 약속을 지켜 나감으로써 자신에 대한 믿음이 싹트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삶의 질이 향상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일깨우라.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라. 자신을 일깨우고 되돌아보면 그대는 마침내 안락하게 될 것이다. |
<법구경>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삶에서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자신의 능력과 시간을 기울이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무가치한 일에 시간과 능력을 탕진하면 인생이 녹슬어 버립니다. 쇠만 녹이 스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도 녹이 습니다.
<빠삐용>이라는 오래된 영화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살인을 하지 않은 빠삐용이 살인 혐의로 수감됩니다. 무인고도에 있는 감옥의 독방에 갇혀서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실패합니다. 그리고 며칠째 굶김을 당한 채 혼수상태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재판관에게 자기는 살인을 하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으니 풀어 달라고 하자 재판관이 말합니다.
“너는 인생을 낭비한 죄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능력을 무가치한 일에 낭비한 죄라는 것입니다. 빠삐용에게만 해당되는 진리가 아닙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건강과 시간을 무가치한 일에 소비해 버리면 그 생이 녹슬 뿐 아니라 어딘가에 갇혀 버립니다.
<숫타니파타>의 ‘성인의 장’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러 가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이 되라. |
자기 확신을 가지고 어디에도 거리낌 없이 살라는 교훈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항상 내 등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주시하는 눈이 있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시작도 끝도 없는 아득한 전생부터 밤이고 낮이고 나를 지켜보는 그 눈길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고단해서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을 놓치면 “스님!”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입니까?
그 누구를 말의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를 지켜보는 그와 떨어져 있지 말고 순간순간 그를 의식하면서 그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붙잡으려고 하면 멀어지고, 찾으려고 하면 사라집니다. 눈을 안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 속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제 말을 들을 줄 아는 그는 또 누구입니까? 헛눈 팔지 말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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