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과 신심명, 그리고 일기일회

36), 중생이 앓으면 나도 앓는다

혜주 慧柱 2010. 5. 23. 07:44

중생이 앓으면 나도 앓는다

2003년 12월 21일 길상사 창건 6주년

 

“중생이 앓으면 나도 앓는다.”

<유마경維摩經>에 나오는 교훈입니다. 이웃이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는 것입니다. 함께 나누는 윤리입니다. 이 윤리 없이는 세상이 존속될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맑은 가난을 표방한 길상사라면 앞으로 어떤 수행자들이 살든 간에 이 도량에서는 그런 정신이 길이 이어져야 합니다.

최근에 들어서 큰스님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있습니다. 총무원에 근무하는 어느 스님 이야기를 들으니 한 달 사이에 여섯 분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저도 스님들 죽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선가에서는 죽음에 이르러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는 일이 마치 무슨 의식처럼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임종게臨終偈 또는 유계遺戒라고 합니다. 열반송이라는 말은 한국에서만 요즘 쓰고 있을 뿐 불교역사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임종게는 대게 짧은 문장으로 생사에 걸림이 없는 심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임박해 가까운 제자들에게 직접 전하는 생애의 마지막 한마디입니다. 따라서 죽기 전에 미리 써 놓은 것은 유서일 수는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임종게는 아닙니다. 타인의 죽음을 모방할 수 없듯이 마지막 남기는 그 한마디도 남의 것을 흉내 낼 수가 없습니다. 그의 살아온 자취가 그를 지켜보고 있고, 그의 죽음까지도 주시하고 있기에 가장 그 자신다운 한마디여야 합니다.

남악 현태南嶽玄泰 스님이 있습니다. 이분이 예순다섯 살에 입적합니다. 외떨어진 암자에서 홀로 아주 맑게 산 분입니다. 가끔 지나가는 스님들만이 찾을 뿐 세상과는 교섭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임종하기 바로 전날입니다. 곁에 아무도 없자, 산 아래로 내려가서 지나가는 한 스님을 불러다 화장을 당부합니다. 나무를 암자 앞에 쌓아 두고 승복을 입고 그 위에 앉아서 입적합니다. 이분이 남긴 임종게가 있습니다. 그때 화장을 도운 객스님에 의해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전등록>과 <조당집>에는 이분의 행적이 자세하지는 않지만 간략하게 나오고, 임종게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나이 올해 예순다섯, 사대가 주인을 떠나려고 한다.

도는 스스로 아득하고 아득해서 거기에는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다.

今年六十五 四大將離主 其道自玄玄 箇中無佛祖

 

머리를 깎을 필요도 없고 목욕을 할 필요도 없다.

한 무더기 타오르는 불덩이로 천 가지 만 가지가 넉넉하다.

不用剃頭 不須澡浴 一堆猛火 千足萬足

 

대개 돌아가시기 전에 머리를 깎고 목욕하는 일이 있지만, 한 무더기 타오르는 불덩이 속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데 무엇 하러 굳이 목욕하고 삭발을 하게는 가, 이런 뜻입니다. 요즘 선사들의 임종게처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야단스러운 소리가 아니라. 자기 심경 그대로를 평범한 말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조 혜능 스님의 제자로 남양 혜충南陽慧忠 국사라는 큰스님이 있습니다. 한번은 법회에서 왕이 많은 질문을 했는데 스님은 그를 전혀 눈여겨보지도 않습니다. 왕은 화가 나서 말합니다.

“대 당나라의 황제인 나를 국사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러자 스님이 왕에게 묻습니다.

“폐하께서는 허공을 보십니까?”

왕이 대답합니다.

“그렇소.”

그러자 스님은 다시 묻습니다.

“허공이 폐하에게 눈짓이라도 하던가요?”

남양 혜충 스님은 임종에 이르러 유언을 듣고 싶어 하는 제자들을 꾸짖으며 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대들에게 말해 온 것이 모두 내 유언이다.”

따로 구차하게 유언 같은 것이 필요 없다는 소리입니다.

또 어떤 스님은 제자들이 임종게를 청하자 이렇게 나무랍니다.

“아니, 임종게가 없으면 죽지도 못한단 말이냐?”

그러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말 외에 다른 임종게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죽을 때 어떻게 죽는가, 무슨 말을 남기고 죽는가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한 생애를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할 뿐, 죽음의 현장에서 야단을 떠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구차하게 임종게니, 유언이니 남기지 않고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큰스님들이 불교 역사에 아주 많습니다.

또 스님들을 화장하면 사리라는 것이 나왔다고 요란을 떨곤 하는데, 사리가 나온 것도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사리는 원래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말로, 타고 남은 유골을 가리킵니다. 불교에서 화장을 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 본래무일물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소식입니다. 바로 그것이 가풍입니다. 죽어서 사리를 많이 남기면 큰스님이고, 사리가 없으면 큰스님이 못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13세기 송나라 때 조원祖元 스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송나라 말기 원나라 군사가 쳐들어와 조원 선사가 있던 온주 능인사에도 군사들이 난입합니다. 그러나 선사는 태연자약하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습니다.

“천지에 지팡이 하나 꽂을 땅 없으니 기쁘도다. 사람도 비고 법마저 비어 있네. 원나라의 무거운 삼척검은 번뜩이는 그림자 속에 봄바람을 베누나.”

그러나 원의 군사들이 그의 의연한 자세에 놀라 모두 칼을 거두고 엎드려 절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조원 선사는 이런 임종게를 남겼습니다.

 

부처니 중생이니 모두 다 헛것, 실상을 찾는다면 눈에 든 티끌.

내 사리 천지를 뒤덮었으니 식은 재는 아예 뒤지지 말라

諸佛凡不同是幻 若求實相眼中埈 老僧舍利包天地 莫向空山撥冷灰

 

사리 줍는 것을 한번 보십시오. 타고 남은 유골을 돌에 갈고 체에 거른 뒤, 거기서 또 무엇을 골라냅니다. 마치 사금이라도 캐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입니까? 돌아가신 스님이 타고 남았으면 그대로 처리해야 하는데, 이것을 덜덜 갈아서 체에다 거른 뒤 사리인지 냉면인지를 가려냅니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사리가 그토록 대단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부처님의 진신 사리는 어디에 있는가? 부처님의 육신에서 나온 사리, 그것은 망치로 때리면 깨집니다. 대단치 않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신 사리, 진짜 법신 사리는 어디에 있는가? 45년 동안 중생을 교화하면서 가르친 바로 그것입니다. 대장경으로 전해진 바로 그것, 그 법문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이 없었다면 불교가 오늘까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진짜 사리는 그분의 가르칩입니다.

고려 말에 백운白雲 선사라는 큰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읊었습니다.

 

사람이 칠십을 사는 일 예로부터 드문 일인데

일흔일곱 해나 살다가 이제 떠난다.

人生七十歲 古來亦希有 七十七年來 七十七年去

 

내 몸은 본래 없었고 마음 또한 머문 곳 없으니

태워서 흩어 버리고 시주의 땅을 차지하지 말라.

我身本不有 心亦無所住 作灰散十方 勿占檀那地

 

내 갈 길 툭 틔었거니 어딘들 고향 아니랴.

무엇하러 상여를 만드는가. 이대로 홀가분히 떠나는데.

虛濫皆歸路 頭頭是故鄕 何須理舟楫 特地慾歸鄕

 

임종게를 보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스님들이 죽으면 5만개 또는 7만개의 국화 송이로 요란하게 상여를 만들곤 합니다. 곧 태워 버릴 것을 그런 식으로 장식을 합니다. 백운 스님의 임종게는 아주 간절한 유언입니다. 살아서도 늘 시주의 은혜 속에 지냈는데, 죽어서까지도 뼈엣 무엇이 나왔다며 부도나 탑을 만들어 또다시 시주의 은혜를 입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남의 이야기입니다. 만약 우리 자신이 내일 죽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남기겠습니까? 각자 한번 정리해 보십시오. 당장 내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때가 옵니다. 저마다 섣달 그믐날이 옵니다. 그때를 가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이런 기적 같은 삶을 헛되이 보낸다면 후회하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죽음을 어둡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삶의 한 모습입니다. 삶의 한 과정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 무의미해집니다. 죽음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약 2백년, 3백년 산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살 만큼 살았으면 교체되어야 합니다.

죽음이 싫으면 살줄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는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갈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을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남습니다.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 어머니가 큰 수술을 여덟 번이나 받아서 마치 몸이 굴속 같았다고 합니다. 자궁암을 비롯해 위암, 장암 등 암이 전이되면서 그때마다 위험한 수술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이런 수술들을 받고도 그 어머니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 의사들 자신도 매우 놀라워하면서 신기해합니다. 삶은 실로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 어머니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집에 정신박약아 아들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항상 누워서만 지내기에 대소변까지 받나 내야 합니다. 나이가 스무 살인데도 서너 살짜리 유아 정도의 지능밖에 안 됩니다. 말도 세 살 먹은 아이들 정도밖에 못 합니다. 아이가 부실하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부부는 이혼을 합니다. 의사들은 아이가 3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생명의 신비를 현대 의학은 알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일하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아들은 이불 속에서 어머니를 쳐다보며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는 아주 좋아 어쩔 줄 모릅니다. 종일 혼자 누워 있다가 유일한 가족인 엄마가 밖에서 돌아오니까 대단히 기쁜 것입니다. 이런 아들을 대할 때마다 어머니는 하루 일의 피로를 잊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아이를 위해서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큰 수술을 여덟 번이나 받았으니 오죽하겠습니까? 날씨가 궂거나 무거운 것을 들면 수술 자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몇 번이나 자살도 결심합니다. 그러다가도 ‘이 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내가 죽을 수는 없다. 저 아이가 어미인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살지 않으면 저 아이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이 한 생각으로 자신이 고통받는 것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여덟 번이나 수술을 받고도 이 어머니가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의사들이 3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아이가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날, 어머니는 아들이 좋아하는 팥을 넣은 찹쌀밥을 지어서 생일을 축하해 줍니다. 이날 아들은 어머니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엄마, 고마워요.” 하고 말합니다. 아들은 그저 생일을 축하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한 것이겠지만 어머니에게는 스무 살 성년이 된 오늘까지 키워 주어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정박아인 자식을 연민의 정으로 보살피는 어머니의 그 지극한 정성이 어머니 자신이 죽을 고비조차 몇 번이고 무사히 넘기게 한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인생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장애자인, 정박아인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인생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어쩌면 그 어머니를 병고로부터 살려 내기 위해 보살이 정박아가 되어서 그 집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일은 알 수 없습니다. 의미로 보면 충분히 그렇습니다. 살아갈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습니다.

합장하고 저를 따라 외우시기 바랍니다.

 

중생이 끝없지만 기어이 건지리라.

중생이 끝없지만 기어이 건지리라.

중생이 끝없지만 기어이 건지리라.

 

날씨가 추워 밖에서 떨고 계시는데 오늘 제 이야기가 너무 길어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