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신도 우리를 용서한다.
2004년 4월 18일 봄 정기법회
온 천지가 지금 꽃과 잎입니다. 겨울 동안 아무 표정도 없이 묵묵히 있던 나무들이 저렇게 활짝 잎을 펼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생물들은 봄철이면 안으로 차곡차곡 지녔던 생명력을 마음껏 뿜어냅니다. 보십시오. 나무마다 다른 빛깔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나무의 진짜 빛깔입니다. 이 기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 거의 같은 초록이 됩니다. 그러나 처음 피어날 때는 그 나무만이 지니는 아주 독특한, 여리고 투명한 빛깔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자기 특성들을 지니고 있는데 세상에서 어울려 살다 보니까 그 특성들이 소멸되고 거의 비슷비슷하게 닮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겪은 경험인데, 꽃은 가까이서 볼 꽃과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볼 꽃이 있습니다. 매화나 수선화, 배꽃, 제비꽃은 가까이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복사꽃이나 산벗꽃은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복숭아꽃을 보고 있으면 이 나이에도 설렙니다. 또 그런 분위기에 반쯤 기대고 싶어집니다. 봄날 핀 분홍색 꽃에는 그렇게 사람을 들뜨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숭아꽃 빛깔이 너무도 좋아서 거기에 홀려 한 가지 꺾어다가 화병에 꽂아 볼까하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이건 아닙니다.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복숭아꽃에게는 미안하지만, 멀리서 바라볼 때는 아주 환상적이고 사람을 들뜨게 하는데 바로 가까이에서 대하면 그 맛이 사라집니다.
인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이에서 대해야 그 사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가까이 대하면 실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때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수행자들은 멀리서 바라보아야지 가까이 대하면 크게 실망할 수가 있습니다.
‘청정한 승가야중僧伽耶衆에게 귀의한다.’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제가 몇 해 전에 어떤 사람에게서 듣고 크게 깨쳤습니다. 그 사람은 절이 아닌 스님들이 모이는 사무실 비슷한 곳에서 경전 강의가 있어 몇 차례 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님들한테서 역겨운 냄새가 풍겨 도저히 들어가고 싶지 않았답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을 포함해 함부로 지내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그런 역겨운 냄새가 나는 모양입니다. 그 사람은 속으로 ‘아. 도 닦기 전에 몸부터 닦아야 하겠구나.’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많은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승려들은 좀 무심해서 입는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일하다가 땀이 나도 잘 씻을 줄 모르고, <반야심경>에서 늘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하니까 깨끗할 것도 더러울 것도 없다는 것이 관념화되어 잘 씻지 않습니다.
꽃과 새 잎사귀가 펼쳐지는 이 눈부신 신록 앞에서 ‘사람도 꽃과 나무처럼 철 따라 새롭게 피어날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전 생애를 두고 제가 행할 수 있는 가르침을 한마디 내려 주십시오.”
스승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이다.”
용서란 남의 허물을 감싸 주는 일입니다. 또 너그러움이고 관용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여러 미덕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미덕입니다.
오늘은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 사람에게는 누구나 크고 작은 허물이 있습니다.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허물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꾸짖으면 결코 고쳐지지 않습니다. 허물을 지적받고 질책 받는 사람은 그만큼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미리 가려야 할 것은, 선의의 충고와 꾸짖음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선의의 충고는 인간 형성의 길에 유용합니다.
그렇지만 함부로 꾸짖거나 흉을 보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허물을 감싸 주고 덮어 주는 용서는 사람을 정화시킵니다. 순식간에 정화시키고 맺힌 것을 풀어 줍니다. 용서는 마음속에 사랑과 이해의 통로를 열어 줍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정과 사회를 가릴 것 없이 용서의 미덕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남의 결점만을 들추는 사람은 남이 지닌 미덕을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다 결점 투성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결점만을 들추면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미덕을 놓치게 됩니다. 그의 시선에는 온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봄날, 꽃과 잎이 눈부시게 피어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것은 훈훈한 봄기운 덕입니다. 제가 사는 곳도 예전 같으면 4월 말이나 5월 초순이 되어야 진달래가 피는데 벌써 피어나고 있습니다. 날씨가 따뜻하니까 꽃과 잎들이 서둘러 피어납니다.
가을날 잎이 지고 만물이 시드는 것은 차디찬 서릿바람 때문입니다. 남의 허물이나 결점이 눈에 뛸 때 그 시선을 돌려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는 그런 허물과 결점이 없는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중생계는 너나 할 것 없이 비슷비슷한 속성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법구경>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남이 했든 말았든 상관하지 말라. 다만 너 자신이 저지른 허물과 게으름만을 보라. |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참된 수행자가 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거든 언제 어디서나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으라. 그리고 그 누구의 허물을 들추지 말라.”
이것이 스승의 가르침입니다. 자기 자신을 주시함으로써 밖으로 한눈파는 일이 사라지게 됩니다.
일단 지나간 일을 다시 들추지 마십시오. 과거를 묻지 마십시오. 그것은 아물려는 상처를 건드려 덧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친구 간이든 부모 자식 간이든 또는 부부간이든 이미 지나간 과거사를 들추어내어 다시 곱씹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습니다.
가족 사이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업을 지어서 같이 단란하게 사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갈등이 심해 늘 분란이 있고 편치 않는 가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단면만 가지고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데, 시작과 끝도 없는 업의 흐름으로 보면 이전에 지었던 업의 찌꺼기가 남아서 지금도 파동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멀리 있으면 안 되니까 바로 그 집의 자식이나 아내가 되어서 낱낱이 들쑤셔 놓는 것입니다.
옛날 사막지방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일화를 모아서 엮어 놓은 글이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입니다. 그 책을 보면 수도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수도했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 수행자가 선배인 원로에게 묻습니다.
“내 이웃의 잘못을 보았을 때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그대로 덮어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요?”
누구나 지닐 수 있는 의문입니다. 이때 원로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웃의 잘못을 덮어 주면 그럴 때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덮어 주신다네. 그리고 이웃의 잘못을 폭로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을 폭로하지.”
용서가 있는 곳에 신이 계십니다.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부처와 보살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일종의 업의 놀음입니다. 업이란 무엇입니까? 몸으로 그렇게 행동하고, 입으로 그와 같이 말하고, 속으로 그와 같이 생각하는 것, 이것이 업입니다. 내가 살 만큼 살다가 이 세상과 작별할 때 내 영혼의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는 것은 내가 살아온 삶의 자취이자 찌꺼기인 업입니다.
업은 한 생애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작도 끝도 없는 업의 바다에서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무수히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 윤회라고 합니다. 마치 수레바퀴가 돌듯이 한다는 뜻입니다. 육도 윤회라고 하는데, 육도라는 것은 중생의 업에 의한 생사를 반복하는 여섯 가지 세계로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 수라계, 인간계, 천상계를 가리킵니다.
업으로 인해 맺힌 꼬투리를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로워집니다. 어디에 맺혀 있으면 안팎으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고 늘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가 투명해야지. 무언가 꼬투리가 있어서 얽히게 되면 서로가 불편합니다. 그것은 누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만듭니다.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면 누구나 이 세상을 떠납니다. 싫든 좋든 일단 죽음이 나를 찾아오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생명의 현상입니다. 죽음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1막의 끝입니다. 2막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언가 맺어짐이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어두운 것으로, 괴로운 것으로,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음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매듭을 짓는 일입니다. 이 육체가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여 육체의 소멸을 아쉬워하고 무서워하고 이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 두려워하지만, 우리 영혼은 어디서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불생불멸입니다. 본래 그렇게 있는 것입니다. 늘 인연 따라 새로운 몸을 받았다가 버리고 또다시 받을 뿐입니다. 나무를 보십시오. 저 나무가 살 만큼 살고 죽는다고 해서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씨앗이 덜어져서 새로운 나무를 이룹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그렇습니다. 죽음도 살아가는 모습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다음 생을 하나의 새로운 시작으로 생각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평소부터 그런 생사관을 갖는다면 순간순간 사는 일이 그렇게 막막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려울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 순간순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새롭게 챙겨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종점에서 용서 못 할 일은 없습니다. 한세상 업의 놀음에서 풀려나야 됩니다. 부모는 자식을 가르치면서 자식의 허물을 끝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한 여성과 한 남성이 강인한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됩니다. 대지의 어머니, 아버지가 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속담에 “남의 모카신을 신고 십 리를 걸어가 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처지에 서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바르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용서는 내 입장이 아니라 저쪽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거쳐서 저쪽 상처가 치유될 뿐 아니라 굳게 닫힌 이쪽 마음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너그럽습니다. 일단 마음의 문이 열리고 나면 그 문으로는 무엇이든 다 드나들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용서를 통해서 인간됨이 형성되고, 그 사람의 그릇이 커집니다. 이것이 또한 사람이 꽃피어 나는 소식이고 인간이 성숙해 가는 소식입니다.
지금 여기 오신 분들 중에 만약 누군가와 맺힌 것이 있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제 이야기를 들은 인연으로 다 풀어 버리십시오.
새잎이 펼쳐지는 이 눈부신 계절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에 잠재된 좋은 기운이 새잎처럼 펼쳐질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으면 설령 내 안에 아무리 좋은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잠들어 버리고 맙니다. 무거운 짐을 부려 놓고 가볍게 살아야 합니다. 얽히고설킨 업의 관문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제 말은 이만 마칩니다. 남은 이야기는 지금 눈부시게 피어나고 있는 나무에게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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