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자리에서 생사가 벌어지고 있다
2003년 5월 15일 여름안거 결제
오늘은 황벽 희운 선사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분이 언제 태어났는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서기 850년 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 사람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이분만 어떤 문헌을 찾아보아도 속성俗姓을 알 길이 없습니다. 임제 스님, 조주 스님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선사의 속성이 기록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육조 혜능 스님도 속성이 ‘노’씨입니다. 속성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황벽 스님의 탈세속적인 면모를 잘 드러내줍니다.
중국 선종사를 보면 이름난 큰스님들은 재가불자들, 특히 할머니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절에 다니는 불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할머니들의 눈이 밝습니다. 덕산 스님도 떡장수 할머니에게서 길을 안내받았고, 조주 스님에게도 영향을 끼친 노파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역사 속에서 많아 나옵니다.
황벽 스님 역시 그러했습니다. 스님은 항상 걸식을 했는데, 갈 때마다 문이 닫혀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다른 집은 문을 열어 음식도 주곤 하는데, 한 집만은 늘 닫혀 있는 것입니다. 하루는 그 집 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스님들이 들어가 걸식을 청합니다. 집주인 할머니는 황벽 스님을 보더니 이렇게 호통을 칩니다.
“이런 염치도 없는 어리석은 화상 같으니!”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이런 소리를 합니다. 그래서 황벽 스님이 황망이 되묻습니다.
“밥도 주지 않으면서 염치없다고 꾸짖으니 웬일입니까?”
이에 노파가 대꾸합니다.
“겨우 그 모양이라니, 한심한 화상이로군.”
이때 황벽 스님은 노파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노파는 황벽 스님이 큰 기량을 지닌 분임을 미리 알아보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노파는 집 안으로 스님을 맞아들인 뒤, 공양을 잘 올리고 나서 묻습니다.
“스님은 지금까지 어떤 공부를 해 왔습니까?”
황벽 스님은 노보살에게 믿음이 가서 자신의 속마음을 다 열어 보입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공부했는지 이야기하자, 노보살이 말합니다.
“나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는 몸이라 법기가 아닙니다. 백장 대사는 선림禪林의 스승으로 우뚝 솟은 분이니 찾아가서 묻고 배우십시오.”
이어 노보살이 당부합니다.
“스님은 훗날 뭇사람의 스승이 되실 분이니 부디 가볍게 처신하지 말기 바랍니다.”
노보살이 일러 준 대로 황벽 스님은 백장 스님을 찾아 갑니다. 그리고 백장 스님을 만나 이렇게 묻습니다.
“스님께선 예전부터 전해 내려온 일을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부처님 때부터 내려온 불법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백장 스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황벽 스님을 보자마자 속으로 ‘이 녀석은 손보지 않아도 클 만한 녀석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감탄합니다. 황벽 스님이 다시 이야기합니다.
“스님의 가르침이 뒷사람들에게 끊이지 않고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백장 스님이 입을 엽니다.
“나는 처음부터 그대가 그 일을 맡을 사람이라 생각했노라.”
그러자 황벽 스님이 말합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다만 그 말씀 한 마디뿐이었으니, 이로써 만족합니다.”
다시 백장 스님이 응수합니다.
“좋다. 그렇다면 그대는 훗날 나를 도와서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가 만나는 소식입니다. 따로 묻고 답할 필요 없이 서로를 보자마자 첫 눈길이 마주치면서 전하고 받습니다. 목격전수目擊傳授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길이 마주쳤을 때 주고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스승과 제자만이 아닙니다. 흔히 첫눈에 반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짜 만날 사람들은 눈길이 마주쳤을 때 그렇게 됩니다. 백장 스님과 황벽 스님이 바로 그렇게 만났습니다. 믿음과 신의로써 맺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백장 스님은 황벽 스님에게 뒷날까지도 부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 법이 육조 스님 이래 마조, 백장, 황벽, 임제 스님의 계통으로 이어져 크게 융성합니다. 이분들은 중국 불교뿐 아니라 세계 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이분들의 어록을 ‘4가 어록’이라 따로 부르기도 합니다. 제가 오늘 소개한 일화는 고승들의 전기를 기록한 <조단집>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오늘 스승의 날을 맞이해 우리는 진정한 스승과 제자기 어떻게 만나는가를 되새겨야 합니다. 이때부터 황벽 스님은 백장 스님 문하에서 열심히 수행합니다.
하루는 백장 스님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황벽 스님에게 묻습니다.
“어디를 갔다 오는가?”
“대웅산 밑에서 버섯을 따고 오는 길입니다.”
황벽 스님이 답합니다. 아마도 버섯 딸 철이었나 봅니다. 이런 문답을 보면 그 당시 스님들이 탁발도 했지만, 자력으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버섯 같은 것을 채취해서 부식으로 먹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백장 스님이 묻습니다.
“호랑이를 보았느냐?”
돌연 황벽 스님이 호랑이 흉내를 내며 으르렁거리면서 스승에게 달려듭니다. 이날 백장 스님은 대중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대웅산 밑에 호랑이가 한 마리 있으니, 다들 조심하기 바란다. 늙은 이 사람도 오늘 한 번 물렸다.”
제자인 황벽의 기량을 대중 앞에서 공인한 것입니다.
선종사에 보면 좋은 거사님들이 참 많습니다. 노보살님들 뿐만 아니라 눈 밝은 거사님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 가운데 배휴라는 분이 계시는데, 8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당나라에 산, 문인 관료입니다. 어려서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고, 채식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는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 하고 물으면 “채식만으로도 넉넉한데 어찌 산 짐승의 고기를 먹는단 말이오?” 하고 대꾸했습니다. 매우 착실하게 배울 것을 다 배운 분입니다. 관료가 되어서는 민폐를 없애며, 당나라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올바른 선정을 펼칩니다. 그래서 임금이 무척 신뢰했습니다. 배휴는 부임할 때마다 그 지방의 절을 찾아서 참배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배휴는 한 절을 찾아가서 법당에 참배한 뒤 선사들의 초상을 모신 조사당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초상 중에서 하나를 가리키며 그곳의 원주스님에게 묻습니다.
“저 영정은 누구의 초상입니까?”
“이 절에 살다 돌아가신 한 스님의 초상입니다.”
원주스님의 대답을 들은 배휴가 되묻습니다.
“초상은 여기 있는데 그럼 그 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이 말에 원주스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배휴가 다시 묻습니다.
“이 절에는 참선하는 스님이 없습니까?”
원주스님이 답합니다.
“요즘 어떤 스님 한 분이 와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냅니다. 그가 참선하는 스님인 듯합니다.”
그러자 배휴는 “그 스님을 한번 뵙게 해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이 당시 황벽 스님은 자신이 살던 황벽산을 떠나 이름을 감춘 채 대중 속에 숨어 은밀하게 정진하면서, 절 안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원주스님은 배휴가 참선하는 스님을 소개해 달라고 하자 허드렛일을 하던 황벽 스님을 소개해 줍니다. 일을 하다가 불려온 황벽 스님을 향해 배휴가 말합니다.
“제가 조금 전에 물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원주스님은 대답을 아끼셨습니다. 스님께서 대신 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배휴의 청에 황벽 스님은 물어보라고 합니다.
“영정은 여기 있는데, 이 스님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때 황벽 스님이 큰 소리로 “배 장관!” 하고 부릅니다. 배휴는 깜짝 놀라 엉겁결에 “예!”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지 황벽 스님이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하고 묻습니다. 이 순간 배휴는 눈이 번쩍 뜨입니다.
이것이 남의 법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살피고, 바로 그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현재의 자리에서 헛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딴 데 팔지 말라는 것입니다. 화두를 참구하거나 염불한다고 해서 정신을 다른 곳에 두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배휴는 찬탄합니다.
“스님께서는 참으로 선지식입니다. 이처럼 분명하게 사람을 이끌어 주시는데 어찌하여 몸을 숨기고 계십니까?”
그날부터 배휴는 제자의 예를 갖추어, 자신이 부임한 고을에 스님을 모시고 와서 법문을 청해 듣습니다. 배휴는 황벽 스님을 만날 때마다 절을 지어 그곳에 모시겠다고 청하지만, 스님은 이를 거절하며 법문만 해 주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법문을 모은 책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전심법요>와 <완능록>입니다.
요즘 참선하는 사람들은 흔히 화두를 붙들고 있기가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화두를 들고 있는 것이 쉬운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이든 재가신도이든, 화두를 들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그 일이 쉽다면 누가 정진하겠습니까? 잘 안 되니까 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인욕정진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러 생에 걸쳐 익힌 업 때문에 늘 졸음과 망상에 빠집니다. 이래저래 한 해 두 해 지나가 버립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화두가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며, 이 화두를 들고 있다가 버리고 저 화두를 들고, 그 일을 계속 반복합니다. 이런 식으로는 얼음판에서 미끄러지는 참선이 되어 버립니다. 말하자면 기름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가 문제이지, 화두가 좋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이나 한 가지 붙들고 거기에 일로매진하면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이 익어 가는 법입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안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이려면 우선 관념적인 데서 벗어나야 합니다. 늘 듣던 소리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에 안착해 바로 지금 이 자리를 살펴야 합니다. 생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생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도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삶과 죽음으로부터의 해탈도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다른 어느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소식 하겠다는 생각을 쉬어야 합니다. 깨닫겠다는 그 생각부터 쉬어야 합니다. 깨닫겠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망상입니다.
이 여름을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보낸다면 결코 허송세월하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우리는 본래의 밝음을 드러내기 위해 정진하는 것입니다.
좋은 여름 되기기를 바랍니다.
'금강경과 신심명, 그리고 일기일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43), 부분적인 자기에서 전체적인 자기로 (0) | 2010.05.23 |
---|---|
41), 마음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 (0) | 2010.05.23 |
40), 영혼의 밭을 가는 사람 (0) | 2010.05.23 |
39), 문명은 서서히 퍼지는 독 (0) | 2010.05.23 |
38), 자기로부터의 자유 (0) | 2010.05.23 |